[묵상글]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전봉석 2017. 5. 15. 07:16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잠언 15:31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시편 105:19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이 단련하신다. 그리하여 생명의 경계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린다. 지혜로운 자 가운데 서게 하시려고, 겸손을 존귀의 길잡이로 보내신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잠 15:33).” 그렇게 아이들이 주일을 기억하고 주 앞에 나올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는 것 같다. 뭐 그리 특별한 게 없는데도, 그리 행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시는 데 감사하였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요 12:28).” 내가 구할 것은 주의 영광인 것을 새삼 확신하였다. 아이들을 잘 건사하여 좋은 친목을 다지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저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이게 하는 것도 옳은 게 아니었다. 그런 거 보면, 그 나이 때 한참 관심이 갈만한 것을 아무 것도 제공하지 못하는데 주일 날, 한 시간 반씩 걸려서 ‘여기까지’ 오는 그 자체가 기적인 것이다.


아내와 딸애가 오대산으로 여행을 갔다. 큰애는 약속이 있다면서 점심을 먹고 서둘러 돌아갔다. 두 아이가 남아 탁구를 치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첫 휴가를 나온 아이의 손을 잡고 기도하였다. 주일 날 부대로 와서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가 좀 지루한가 보다. 여자 분이고, 설교가 너무 길고, 그래서 그런지 열 명도 참석하지 않는다고 아이는 말했다. 그럼에도 주일을 지킬 것과 말씀을 사모할 것을 당부하였다. 보고 싶은 걸 보지 말고 봐야 할 것을 보라고 일렀다.

 

누구도 그런 소릴 했었다. 남한에 내려와 열심히 교회를 다녔다는 것, 그런데 목사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교회가, 거기까지… 늘어지는 지청구가 그래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어차피 그런 사람은 뭘 해도 또 똑같은 소릴 했을 것이다. 묵묵히 우리에게 두신 환경과 여건에서 오롯이 주를 바라기를. 나는 아이에게 당부하였고, 그 소리는 곧 나를 향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환경을 보고 여건을 고려하여 마치 그것 때문인 것처럼 굴지만 실은 어차피 그럴 거였다. 아담이 하와를 탓하고 하와가 뱀을 탓하였지만, 굳게 말씀을 붙들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또한 그리하게 되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이미 얻었다 함도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우린 다만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뿐이다. 그것이 잘 갖추어진 교회에 있을지, 덕망 높은 목사의 설교에 있을지, 서로 단결하여 한 지체가 된 성도와 성도 간에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으로 여기까지 오고,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주께 아뢰고, 묵묵히 노아와 같이 아무도 호응하는 이 없다 해도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는 것뿐이다.

 

설령 이 길이 정말 미련하여서 어느 훗날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해도, 도리어 더 한심하고 처량한 인생이었다 해도, 모든 게 신기루였다 해도,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이것이었다.

 

저마다 주신 삶을 사는 것이겠으나 그래서 누구는 평생 남의 세금 계산서를 관리해주고, 누구는 한국경제의 흐름을 분석하고, 누군 장사를 하고, 운전을 하고, 운동을 하고, 공장에 다니면서 평생을 그리 늙어간다고 할 때… 나는 아이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 모든 게 주 안에서 주의 이름으로 행하여짐으로 감사하고 소중한 생이 되는 것이겠으나, 주만 바라며 살 수 있기를. 그러기 위해 가장 지근거리에서 주를 따라 살 수 있기를. 그게 무엇일까를 놓고 생각하고 기도하고 주의 인도하심을 바라기를.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다들 돌아가고 아이와 남아 그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혼자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몸을 비틀었다. 밤낚시를 좀 갔으면 했는데 전날부터 팔을 드는 게 아팠다. 멀리 어디 경치 좋은 데를 상상하며 밤에라도 아내와 딸애가 간 곳으로 가볼까? 하다 것도 그만두었다. 조금 우울하다 것도 그만하였다. 그런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연연해하지 않는 게 지혜였다. 어김없이 자야 할 시간에 잠이 왔고 깨어나는 시간에 일어났다. 됐지 뭐. 내게 두신 여건과 상황이 때론 맘에 안 들어도 그리 허락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확신한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예수께서 그리하실 수 있는 것은 강한 의지 때문이 아니다. 어떤 신념이나 보람을 두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8).” 능히 그 모든 걸 피하실 수 있었으나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 그리하여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9-10).”

 

육체로 있을 동안에 우리도 어차피 필연적인 것이다. 그걸 어찌 좀 모면해보려고 하는 게 불순종을 낳는다. 나중으로 미루고 또는 자기에게 합당한 것으로 선택하여, 믿어도 적당히 딱 그 정도 선에서만 유지하려고 든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신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럴 거였으면 변화산에서 영광의 광채가 되셨을 때 그대로 승천하셨으면 더 화려했을 것이다. 신화가 난무하고 허황된 우상으로서의 영광을 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님은 산을 내려오셨고 기어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가 고난을 받으신 것은 순종이었다.

 

아이에게 들려주었던 말이 어느새 나에게 이르시는 말씀이 되었다. 곧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잠 15:31).” 묵묵히 말씀이 응할 때까지,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9).” 그러느라 뒹굴고 먼 길을 돌아 고달프기 짝이 없는 광야 길을 배회했어야 한다 해도,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잠 15:30).”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아무리 다들 뭐라 해도 볼 수 있는 눈과 좋은 기별을 들을 수 있는 귀가 복이었다.

 

살면서 사느라 사는 동안에 얼마나 자주 부딪치는 문제인지 모른다. 아이도 복수전공을 따 놓고 군대를 간 터라 나와서 경제를 같이 할지 그냥 묵묵히 한 길만 팔지, 막상 군대에 있으니까 생각이 많아지더라고 했다.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자. 과연 주님은 무얼 바라실까? 잘 모르겠을 땐 말씀 붙들고 말씀만 의지하면서 가자. 설령 그러느라 생을 다 허비하는 것 아닌가, 조바심도 들겠지만 하나님 없이 성공한 인생이란 게 뭐 그리 대단할 수 있겠는가! 한 시간 남짓 아이와 얘길 하다 나는 아이 손을 잡고 주께 기도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에 있는 스올을 떠나게 되느니라(15:24).” 이 땅에 있을 땐 스올이 천국보다 좋아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훈계 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32).”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와 같은 말씀으로, 말씀이 응할 때까지 말씀으로 단련됨을 기꺼워하자. 마음으로 은근히 기쁜 일이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내밀한 주의 은총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시 105:1).” 곧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3).” 이에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4).” 그리하여서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2).”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또 하루를, 생을 허락하시는 이유였다. “이는 그들이 그의 율례를 지키고 그의 율법을 따르게 하려 하심이로다 할렐루야(4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