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
잠언 12:28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시편 102:27
윌리엄 D. 베커스의 <희망소식>(CLC)을 읽었다. ‘불안과 두려움에 맞서고 싶은 사람에게’라는 부제가 달려있었다. 아이 둘에게 책을 권하였다. 밥간의 <영혼치료상담>도 유익하였다. 일부러 성경적 관점의 심리치료 관련 서적으로 한동안 독서 방향을 잡았다. 오전에 성경공부를 온 아이에게도 책을 권하였다. 읽는다는 일은 매우 적극적인 관여다. 거기에 글쓰기가 함께할 수 있다면 참 유익할 텐데, 열에 아홉은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아이와 함께 <가라사대>를 읽으며 창세기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우리 삶과 생각과 의지에 접근하여 자기 이야기를 끌어들였다. 나는 그래서 상담이라는 표현보다 성경공부라는 표현을 더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굴 상담하고 누구에게 있어 내담자란 말인가! 주 앞에 정직할 수 있는 시간이 ‘성경공부’이다. 공부란 학문과 기술을 배우는 일이다. 앞에 성경을 붙이면 하나님을 배우고 그 하신 일을 주목하는 것이다.
그의 공로우심을 말이다. 공평하고 의로우신 주의 성품을 우리는 바로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린 한 번도 공평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의를 알지 못한다. 이를 배운다는 것은 더 가까이 다가가는 행위로써 성경공부보다 유익한 게 없다. 때론 한두 구절의 말씀을 놓고 자기 이야기의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늘어놓느라 시간을 다 허비하는 것 같으나 유익하다. 왜냐하면 우리 이야기 안에 하나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이와 함께 에덴에 대해 말씀을 나눌 때, 현세의 에덴과 장래에 들어갈 내세의 에덴에 대해 같이 나누었다. 곧 하나님은 오늘도 가장 적합한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심으로 오늘 우리에게 에덴을 두신다. 우리는 매순간 이를 다스리고 경작해야 한다. 수시로 드는 뱀의 유혹으로부터 말씀을 가지고 맞서야 한다. 하나님은 오늘도 매순간의 에덴을 조성하신다. 이는 영원한 에덴의 모형이 된다. 곧 우리의 영원한 삶은 이미 시작됐다.
아이는 그렇군요, 하고 늘 한 발 물러서 있다.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늘 ‘거기’에 있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설령 의심이 가득하다 해도 도마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처럼 아이를 주 앞에 두시는 데 감사하였다. 같이 말씀을 읽고 설명을 나누고 생각을 집약하여 그 의미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주의 관여는 결코 허술하지 않으시다. 나는 어줍고 모자라도 그 어버버한 설명에도 주의 인자하심과 지혜는 함께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의로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내셔야 했는지, 그러할 때 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는지, 결국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주님의 보혈로 거룩을 덧입고 살아야 하는 데 따른 의미를 되새겼다. 같이 점심을 먹고 당구를 치고, 돌아와 탁구도 치면서, 이와 같은 모든 시간이 주의 임재 안에서 우리로 주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는 거였다. 뒤미처 중2 아이들이 왔고, 아이의 원고를 첨삭하고 ‘감사 편지’를 쓰게 하였다.
“공의로운 길에 생명이 있나니 그 길에는 사망이 없느니라(잠 12:28).” 이를 어디서 알 수 있을까? 말씀뿐이라. 우리 모두는 미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심리구조를 안고 살아간다. 때론 버거워서 몸도 마음도 시들하지만 그런 가운데서 주의 도우심을 마주한다. 나는 다만 권하고 함께 나눌 뿐, 내가 어찌 누구를 구원하고자 하는 게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의 버벅거리는 삶의 모습 또한 좋은 교재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연약하고 늘 부질없이 사는 것 같지만, 공의로우심은 주의 길에만 있다. 불공평한 현실에서 이를 어찌 알까?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시 119:50).” 나는 가정예배에서 시편 119편을 같이 읽으며 확신할 수 있었다.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102:27).” 그 공의는 한결같으시다. 처음 사람 아담의 에덴에서 함께 하신 주님은 오늘 나의 에덴에서도 동일하시다. 면면이 나의 에덴에서 주관하시는 이가 편견 없이 우리 각자의 에덴에서도 무궁하시다.
이를 아는 자는 기도한다. 기도는 큰일이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그러므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13).” 우리의 기도는 노동이다. 이로써 주는 행하신다.
그런 거보면 왜 그리 더딘가, 했더니 자기에 대한 권리주장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는 뭔 고집에선지 기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같이 아멘, 하여서 그나마 다행이라 여긴다. 찬송을 하고 말씀을 같이 읽고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아뢴다. 다만 자기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부르는 데는 여전히 고집을 부린다. 안타깝지만 이를 어찌 강제할 수 없어 그냥 두었다. 뭐라 한들! 보면 우리의 공통점은 자기 고집으로 똘똘 뭉친 것이다. 설마, 하는 아집과 에이, 그게 뭐! 하는 퉁명스러움이 이내 몸이 상하고 마음이 병들 때까지 계속된다.
누구 이야기가 아니라 죄의 속성인 것이다.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신 말씀에 대하여 사사로이 여기는 한 언제든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 된다. 이를 우겨대면서 끝내 고집을 부리는 데야 별 수 있나? 나는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요일 4:4).” 나는 아이가 오는 것과 우리가 말씀을 나누는 일에 있어 이를 결코 누구의 의지로 이루어갈 수 없다는 데 확신한다.
그러므로 아이의 고집에 대한 은근한 기대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어찌 다루실까? 그 완고함을 꺾어 과연 어떻게 사용하실까? 나는 가끔 아이를 보면서 기대에 확신을 더한다. 어느 날 주님은,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요 16:13).” 물으실 것이다. 저마다 그 대답이 다를 테지만,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하시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하고 대답하게 하시려고!
이를 알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러므로 그 앎과 고백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18).” 하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말씀이 천국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19).”
우리에게 맡기신 한 날의 에덴 가운데서 우리는 이에 충만하고 이를 정복하여 이내 다스릴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 1:16).” 어디서 듣고 막연히 아는 정도의 앎이 아니라, 이와 같은 공부는 친히 그의 위엄을 목격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운행하시는지, 이를 어찌 다스리시는지. 내가 보는 것을 아이도 듣고 느낌으로 어느 훗날 자신도 친히 본 자가 되어 증거할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 우리의 수고는 기도뿐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 내가 어찌 나를 두둔하고 지켜야 하는 일이 아니라 주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심으로 목도하는 일. 목도란, ‘두 사람이 짝이 되어 무거운 물건이나 돌덩이를 얽어맨 밧줄에 몽둥이를 끼워 어깨에 메고 나르는 일’이다.
나와 저 아이가, 저 아이와 세상이 서로 나란히 힘에 겨운 일을 나누어 짊어지는 행위가 사랑이었다. 이를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게 성도였고, 그렇듯 주가 이루어 가시는 에덴을 목격하는 이가 증인이었다. 나로 하여금 아이의 돌덩이를 같이 지게 하시려고, 우리로 하여금 서로의 무거운 짐을 어깨에 나란히 메고 걷게 하시려고, 교회를 또 사명을 우리에게 두셨다. 내가 얘 때문에 왜 힘든가, 했더니 그래서였다. 그리하여 주의 이름으로 구하게 하시려고, 나는 아이를 대신하여서도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이를 명확히 설명해준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잠 12:25).” 우리가 함께 추구하고 나누어야 할 선한 말이 무엇인가?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17).” 그렇구나. 이 간단한 명제 앞에 저절로 손뼉을 친다. 그리하여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이니라(19).”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주의 조성하심은 영원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거였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시 102:12).” 곧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17).” 그러므로 “내가 인자와 정의를 노래하겠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양하리이다(10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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