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잠언 11:17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시편 111:10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품은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어려운 일일까? 그래서 저의 잔인함은 몸에 해롭다. 초조와 긴장이 한데 풀어질 때 통제 밖의 감정이 돌출한다. 이를 다스릴 수 있는 게 주를 경외함일 테고, 이는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말씀을 따르는 자로서만 가능하겠다. 그럴 수 있는 게 훌륭한 지각을 소유한 것이고 이는 주를 찬양함으로 영원히 계속된다.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한다는 건 더 나은 걸 바라고 붙들 수 있는 여력이 되는 것이다. 당장의 것을 가장 빠른 방법으로 추구하려는 게 유혹이다. 유혹이란 목표를 향한 지름길을 제시한다. 살아있다는 증거이면서 살아있는 동안 싸워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문득 예수님도 유혹을 당하셨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먼저는 먹고 사는 문제의 근본에 대한 유혹이다. 그럴 수 있다면 그래도 된다는 설정이다.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는 설득이고 그걸 활용하지 못하는 게 어리석은 것이라는 도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게 분명한데, 그럼 그걸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셈이다.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으로 살며 목사가 되었다면 ‘이 정도는 마땅하다’는 제안이다. 이에 예수님의 대처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4).”
먹고 사는 문제의 숭고함에 대하여 예수님은 부정하지 않으신다. 자연적인 수고와 애씀, 선을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그 가치는 아름답다. 하나 그게 다가 아니라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말씀으로 어찌 배고픔이 사라지고 삶의 궁핍이 모면되며 육신의 고통과 정신의 나약함이 해결될 수 있을까? 현실은 똑같다 해도,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궁벽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해도, 그 이상의 가치와 기쁨을 알게 하신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이’의 넉넉함을 아는 사람은 안다.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5-6).” 어쩌면 말씀으로 굳게 서서 성결을 체험할 때 가장 위험한 유혹이 다가온다. 뭔가 이적과 기적을 바라는 것, 그것으로 더 확실하고 굳건하게 설 수 있다는 남모를 확신 같은 것이다. 이쯤 했으니까, 내가 그래도 목사니까, 그래서 어떤 기적을 바라고 구하는 데 주저하지 않을 때, 내 안에 있던 공명심은 슬그머니 권리를 주장한다.
이에 주님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7).”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 우리가 믿음으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시험하곤 하는지 모른다. 그러실 거야, 우리가 어떻게 했는데… 잘 될 거야, 바라는 대로 이루어 주실 거야, 하는 식의 요구는 실제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게 아니라 나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처세였다. 그렇듯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것.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8-9).” 어떤 영광을 보장받고 싶어 하는 욕망이 우리에겐 있다. 천국을 그렇게 바라기도 한다. 앞서 ‘타협의 유혹’과 ‘성결의 유혹’이 있었다면 이제 ‘보상의 유혹’이다. 천국을 마치 보상에 따른 것으로 거짓 약속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
유혹은 물리쳐야 하는 것이지 대안을 강구하는 게 아니었다. 주님은 말씀하셨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 아차, 하는 순간에 드는 게 유혹이다. 유혹을 당한다는 게 죄가 아니라 이를 저울질하다 의지적으로 이를 따르는 게 죄다. 누군들 처음부터 작정을 하고 선악과를 먹었겠나! ‘죽을까 하노라.’ 하는 방심이 들어왔을 때 사탄은 이를 놓치지 않는 것이다.
대놓고 주를 대항하고 악을 저지르게 하지 않는다. 성령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저의 유혹은 매우 합리적이고 합당하며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극히 지당한 것이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우선순위를 바로 하는 것이겠다. 갈 바를 잘 모를 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막 12:30).” 모든 관심과 선택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31).”
결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 이로써 오늘 잠언의 말씀이 훨씬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인자한 자는 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잠 11:17).” 곧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나의 영혼을 이롭게 하는 일이었다. 화가 나고 분노가 내 안에 있으면 내가 나의 몸을 해치는 게 된다. 위로를 찾고 안위를 구하며 고집과 아집으로 더 잔인한 긴장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이를 우선점으로 두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다른 무엇으로 의를 구하고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 경외하기를 다음으로 미루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였다. 곧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저는 안다. 살면서 가장 아름다운 삶은,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이를 붙들고 설 수 있게 성령으로 깨어있으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온갖 수고와 애씀에 따른 선은 성경이 보장한 바 없다. 생각해보라. 예수님은 누구도 강요하지 않으셨다. 흥분시켜 열광하게 하지 않으셨고, 기적과 이적으로 현혹하지 않으셨으며,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오히려 제 발로 찾아온 이에게 생각할 기회를 주셨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 하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58).”
보장된 바 없어도 오직 주만 바라게 하시는 것.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그렇구나. 그런 것을 ‘이것만 해결되면 따르리라.’ 하는 변명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던 것이구나.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눅 14:19-20).” 다들 나름, 먼저 할 일이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 사람의 생각은 함정이 된다. 그럴 때가 너무 많다. 가령 그 훌륭한 세례요한의 회의는 깊은 묵상을 갖게 한다. 정말 이 길이 맞을까? 저가 그인가? 싶은. 이에 주님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마 11:6).” 때론 몇 번씩 되묻기를 이러고 있는 게 맞는가? 하는 것이다. 창가에 서서 누구를 생각하고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오히려 더 빈궁해지는 처지에서 내가 계속 여기에 이러고 있는 게 맞나? 싶은. 나름은 주를 경외함으로 말씀만 의지한다고 하는데, 어떤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을 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7).” 이를 어찌 내 의지와 노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던가!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요 12:16).” 때가 이르러 전에 나의 이러저러했던 것들이 그래서 그랬던 거였구나, 하는 것을 안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 나의 이러저러한 상황을 잘 모르겠더라도, 그래서 말씀을 붙든다.
말씀에 붙들려 살아간 이의 묵상과 삶과 저의 씨름하였던 것을 내 것으로 삼는다. 때론 이런 책을 왜 읽고 있나, 싶은데도 읽는다. 그 말씀이 그 말씀인 것 같을 때도 말씀을 본다. 그저 무던하여서 다시 또 한 날이 밝아 아침에 깨우시고 일어나 앉아 묵상글을 쓰면서, 더는 왜 이걸 하고 있지? 하고 묻지 않는다. 다만 “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잠 11:18).” 주를 외면한 자의 삯은 허무함뿐이다. 온전히 주를 바라는 자의 상은 확실하다. 이에 “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19).”
“할렐루야, 내가 정직한 자들의 모임과 회중 가운데에서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 111:1).” 믿음의 사람들이 따르고 추구하였을 말씀을 붙들 뿐이다. 내 아버지와 형제들이 가는 길을 나도 간다. 저들 모임에서 전심으로 감사한다. 더불어 내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역할을 감당할 수 있기를. 나는 하는 게 없어도 나로 주를 바라게 하시는 이가 이처럼 나를 깨어있게 하심으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기를.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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