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전봉석 2017. 5. 17. 07:39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

잠언 17:16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편 107:12, 19-20

 

 

 

믿는다는 건 의지적인 일이다. 값없이 주신 선물이나 이를 받을 지식이 필요하다. 신뢰한다는 건 그래서 실천을 위한 게 된다. 자신이 옳다고 인정하는 곳에 대한 행동이다. 가령 신뢰가 있어야 수술대 위에 눕는다. 신뢰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탄다. 또는 갓 운전면허를 딴 조카아이의 운전 실력을 신뢰할 수 없기 때문에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다. 이처럼 믿는다는 건 행함을 위한 것이지 막연한 구호나 다짐이 아닌 것이다. 그러기엔 지혜가 전제된다.

 

뭐가 뭔지 분별할 수 있어야 어느 은행에 돈을 맡기고, 어디를 가는 길에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판단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저들이 따를 것을 아셨다.’ 본회퍼의 말이다. 여기서의 앎은 단순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이 아니다. 예수님이 물 위로 걸어오라 하셨을 때, 베드로는 부력을 계산하고 시간차에 따른 수면의 장력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곧 앞서 겪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으로 저는 말씀을 따라도 된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때론 이 길이 맞나? 나는 이대로 있어도 되나? 하는 어떤 불안이 엄습할 때, 앞서 나의 길에 함께 하셨던 주님을 아는 앎이 신뢰의 바탕이 된다. 무지하다는 건 미련하다는 것이다. 아는 게 없으니 무모할 수밖에 없다. 어린아이가 순수한 건 아직 영악하지가 않다는 것이고, 이는 천진난만하여 마냥 미련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서도 순수하다는 걸 자랑하는 일은 무지하고 미련한 일이지 천진난만한 게 될 수 없다. 한데도 어떤 값을 지불하여 지혜를 사려는 게 어리석다.

 

오늘 말씀은 이를 정리하였다.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잠 17:16).” 그러느라 자기 수고에 눌려 하나님을 아는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 가령 창세기를 읽으면서 아브라함의 경솔함에 놀랐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창 15:9).” 명령에 따라하였으나,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10).” 새는 작은 것이라 쪼개지 않았다.

 

그러자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11).” 보면 고달픔의 근거는 미련한 데서 온다. 이를 뒷받침하는 게 안이함이다. “해 질 때에 아브람에게 깊은 잠이 임하고 큰 흑암과 두려움이 그에게 임하였더니(12).” 깊은 잠이 임했고 흑암과 두려움이 임했다. 앞서 그는,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3).”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원했다.

 

무지함은 무식한 게 아니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이가 순수한 건 무식한 것이고,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다. 어른이 순수한 건 무지한 것으로 배웠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어 저는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16:2).”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배웠으면서도 그 앎이 바르기까지, 이처럼 맹랑한 짓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모함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12).”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스마엘’은 사람들 중에 들나귀가 되었다. 팔레스타인 중동지역을 보면 연일, 저가 사람을 치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친다.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하며 산다. 말씀을 읽으며 새삼 주의 은혜와 지혜를 간구하였다.

 

어떠니 해도 모든 건 지나간다. 아내와 딸애가 여행에서 돌아왔다. 나는 중2 아이들 수업을 하였고 같이 탁구도 쳤다. 뜬금없이 친구가 감사헌금이야, 하고 10만원을 입금하였다. 그런 마음을 주셨구나, 하고 고마움을 대신했다. 가끔은 하나님이 생뚱맞다. 내가 하는 일이 주의 일인 것을 그렇게 알게 하신다. 친구가 왜 내게 돈을 주겠나? 저는 하나님을 보고 한 것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큰 위로가 되었다. 이게 뭔가? 싶던 마음이 면구스럽게 됐다. 내가 할 일은 분명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딤전 2:1-2).”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우리의 사명 중에 으뜸은 기도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이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먼저는 모든 이를 위한 기도와 간구와 도고와 감사이다. 우리 교회와 이웃한 사무실과 복도에서 마주치는 익명의 다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다음은 새로 뽑힌 대통령과 각 나라의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을 위한 기도다. 단지 저들을 위한 게 아니라 그러므로 나의 경건과 단정함과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위해서다. 누구를 지지했든, 작정을 하고 싫은 데야 뭘 해도 밉상이겠으나, 이와 같은 기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몸에 채우는 일이다. 혼자 웅얼거리고 되뇌고 생각하고 아뢰고 고하는, 기도는 호흡이었다.

 

기도할게. 나는 친구에게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었다. 나는 저가 잘 되길 바라지 않는다. 하는 일이 순탄하길 바라지 않는다. 돈만 많이 벌길 원하지도 않는다. 온전히 주만 바라기를, 주를 사랑함으로 이제 남은 생이 주께로만 향하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차마 어떤 내용으로 기도하는지는 말할 수 없었다. 여전히 잘 어울리는 산악회 사람들과 안 믿는 사람들과의 돈독한 유대관계가 걸림이 된다면, 혼인신고 없이 동거를 이어가는 저의 안주가 걸림이 된다면, 종종 그와 같은 내용을 이야기해도 알긴 알지만 설마, 하는 저의 안이함이 온전히 주를 모시는 데 걸림이 된다면….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시 107:12, 19-20).” 더 나은 삶을 위하여 기도한다. 무엇이 소중하고 참된 축복인지 알게 하시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무조건 환난이나 고통을 회피할 게 아니다. 주께 부르짖는 덴 이보다 좋은 매가 없다. 뭐라 해도 말을 듣지 않으니 별 수 없다. “이에 그들이 그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들의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그들의 얽어 맨 줄을 끊으셨도다(13-14).” 기도할게, 하고 약속이 늘어갈 때마다 마음은 편하지 않다. 저는 돈을 잘 벌게 해달라고 하지만 나는 그리 구할 수 없어서다. 마냥 행복하길, 좋은 일만 있기를 바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기도의 결과는 주의 것이다. 내가 기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의뢰하게 하는 일이며, 하나님의 선한 싸움에 참여하는 일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착한 양심을 유지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주도적으로 일을 하는 데 있어 분노와 다툼이 없이 할 수 있는 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다.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어제 묵상하였던 내용을 정리해보면, 기도의 내용은 모두를 위한 것이고 특히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위한 것으로 그래야 나의 생활이 평안하기 때문이다(딤전 2:1-2). 기도의 목적은 저들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바른 지식에 이르게 하는 일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기도의 제목은 저들로 회개에 이르도록,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 그러므로 구원 받을 자들을 위하여서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9-11).”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어디가 불편하고 힘들어서, 마음은 저 혼자 들쑤셔대며 뒤치락거리고, 입은 멋대로 말을 토해내어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고, 환경과 여건은 늘 답답한 듯 쪼들리기 일쑤지만, 그래서 기도하게 하신다. 그래야 기도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감사를 알게 하시려고 생뚱맞은 주의 손길로 나를 놀라게 하신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적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할지로다(시 107:31).”

 

나로 하여금 찬송하게 하시려고, 또한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 그러므로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14).” 곧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