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
잠언 16:11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시편 106:4-5
무엇을 가늠하는 척도의 기준과 누구에 대해 마음을 다하는 역할, 그 마땅히 행해야 할 직무의 원인과 결과는 하나님이시다. 이제는 너무 빤한 소리 같지만 사사로이 드나드는 마음에 대하여는 각별히 주의할 필요를 느낀다. 가령 실망감이나 허탈감 같은 게, 요는 나를 인정받고자 하는 강한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데서 오는 자의적인 해석이겠다. 돌아보면 누군가에게 나도 역시 다를 게 없을 테니까 말이다.
대학 때 같이 어울리던 동기 형님이 전화를 했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늘 또 그런 사람이어서, 계속 울리는 전화기 화면을 보다 이내 받지 않았다. 심심한 안부와 빤한 서운함 따위를 지나가는 말로 보태야 할 게 성가셨다. ‘그런 사람’으로 각인 된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놓고는 생각이 많았다. 아무리 그래도… 하는 자책과 그래 봐야 뭐… 하는 성가신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겠구나, 하는 아찔함이 오후 내내 가시지 않았다. 받고 싶은 것만 생각하지 줘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색하였다.
어떤 구심점이 필요하다. 살다보면 그 추가 움직이듯 본의 아니게 장소를 옮겨야 하고, 사람을 새로 만나야 하고, 무슨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기도 한다. 이때 ‘거기서’로 이어지는 서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데 생각이 머물렀다. 곧 아침에 창세기를 읽다, 아브라함에 대한 묘사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저가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향해 갈 때의 부분이다.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다, 기근으로 인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야 했던….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4).” 곧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12:8).” 이내 남방으로 옮겨가 애굽에까지 이르러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사건과 이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모면하게 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13:18).”
살면서 당면하는 우여곡절에 대하여는 모든 인생이 그렇겠으나, 하나님은 우리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에 대하여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시지 않는다. 문제는 거기서다. 다만 거기서의 정의는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의 문제겠다. 거기서 예배가 드려지다가도 거기서 기근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을 바라다가도 거기서 살 궁리를 하게도 되는 것이다.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12:9).”
그런 거 같다.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건 아니다. 모든 문제는 서서히, 점점, 그래서 굳이 문제의식이 사라지는 때에 닥친다. 에이 설마, 하는 정도의 경각심도 없을 때 말이다. 나는 오늘 본문 말씀을 그렇게 읽었다. 그리하여 “공평한 저울과 접시 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잠 16:11).”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혹은 무슨 일 앞에서든, 과연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거기서’ 있는가?
어쩌면 내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누구를 외면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전에 같으면 반가움이 앞서고 서로 객쩍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아무렇지 않게 실실거렸을 사이인데, 거기서 이젠 싫은 것이다. 전에 선생을 만났을 때도, 또는 누군가 전에는 친하게 지냈던 이에게, 저들은 시답잖게 여기는 일을 나는 귀히 여기는 것 같아서 더는 거기에 도로 가기 싫은 것이다. 그럼에도 저를 마주해야 하는지, 굳이 그럴 거 없이 한 발 물러서는 게 맞는지, 별 것도 아닌 일에 나는 종종 생각을 빼앗기곤 하였다.
나는 이제 주의 택하신 자들의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내가 주의 택하신 자가 형통함을 보고 주의 나라의 기쁨을 나누어 가지게 하사 주의 유산을 자랑하게 하소서” 그러기에는 앞서 “여호와여 주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로 나를 기억하시며 주의 구원으로 나를 돌보사” 주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이 먼저 필요하였다(시 106:5, 4). 자의적으로 내가 맺는 인간관계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이 내 안에 이는 불편함이 때론 낯설다. 전에 그렇게 갈구하고 좋아라했던 것을 더는 마다할 수밖에 없는 나의 ‘거기서’가 새삼스러운 것이다. 점점, 어쩌다 또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암중모색이 닥쳐온다 해도, 그리하여 주의 도우심만이 나의 구원이 되심에 대하여, 이제 나의 거기서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것도 그러기까지,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의 한계에 봉착하고 두 손을 들 때에나 가능하였다.
종일 조금은 우울하였고 또는 외로웠다. 일부러 늘 정해진 동선을 따라 움직였다. 혼자 집에 돌아가 점심을 차려먹고 또 같은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두 구절의 말씀이 새삼 깊은 묵상으로 다가왔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 9:23).” 내 안에 이는 여러 생각과 갈망을 저버리고, 나에게 맡기신 한 날 한 날의 무게를 있는 그대로 주를 따르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내가 ‘나의 거기서’ 해야 하는 일이었다. 곧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내가 지는 십자가는 결코 주님의 것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는 구속을 위한 것이다. 내가 다시 주의 십자가를 진다는 건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는 안달이다. 내 십자가는 내게 두신 ‘거기’다. 거기에 기근이 왔더라도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는 일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하나님이 그렇게 굶겨 죽게 하셨을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허물도 선으로 되돌리신다. 이는 주의 작정하심이 아니라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섭리의 문제다.
내가 주의 십자가를 진다고 착각할 때, 때론 이 일이 서럽고 무겁기만 한 것이다. 기껏 구원을 받은 이가 또 뭘 구원 받겠다고,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는 꼴이다. 내 십자가는 내게 두신 거기서다. 이를 회피하고 모면하려다 보면 정작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울 수 없게 된다. 저의 남은 고난은 미진한 구원이 아니라 여전히 남방으로 옮겨가는 주의 사람들이다. 저를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약 5:16).”
그러므로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 좀 손해 보는 것 같고, 나만 괜히 억울한 것 같고, 서럽고 답답할지라도,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 나는 오늘 말씀이 참 좋다. 주가 이루신다. 내가 할 일은 일을 이루는 게 아니라, 거기서 내 십자가를 지는 일이다. 내 십자가를 진다는 건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도하는 것이다.
괜히 주의 일을 한답시고 주의 십자가를 지는 행세를 해선 안 되겠다. 주님의 십자가와 나의 십자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주가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나도 내 십자가를 진다. 전에 같으면 누구에게 떠넘기는 게 슬기로운 사람인 줄 알았다. 난 사람, 부자, 성공한 이의 대부분이 자기가 돈을 벌지 않는다. 남이 벌어주는 것이다. 돈이 돈을 벌게 하면 된다. 출세도 명예도 다 그런 것이다. 나의 선생은 그렇게 말했었다. 내 친구들은 지금도 그런 가운데서 살아간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쉽게 노년을 보낼까? 궁리한다.
한 친구는 어렵사리 건물을 하나 샀다. 늙어서 가장 좋은 수단은 세를 받는 것이다. 저마다 자기 논리로 추를 움직인다. 버젓이 한 쪽이 기운 걸 알지만 개의치 않는다. 다 그런 거야! 하는 저들의 항변에 뭐라 반박할 수가 없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농담처럼 하는 이 말이 진리다. 저들을 부러워하면 지는 거다. 심지어 내 주머니 속에 있는 저울추도 주의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해도, 나만 알 뿐이라 해도,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부터 나오느니라(1).”
내가 누굴 그리워하든, 어떤 걸 선호하든, 뭘 더 귀하게 여기든 하나님은 관여하지 않으신다. 중요한 건 ‘거기서’ 뭘 하고 있냐는 것이다. 궁색함을 짊어지고 주만 따르는지, 이내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는지, 그리하여 고달픈 인생에 대하여는 사는 날 동안 살아서 깨우치고 다듬어져야 할 문제이겠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히 12:29).” 두려워할 줄 아는 게 힘이 된다. 당연히 주의 십자가는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기껏 잘 지내던 것들과 분쟁이 생기고 반목이 커지기도 한다. 아, 이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그러나 결코 그게 다가 아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히 12:3).” 주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이 아니고는 단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한다. 곧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6:2).” 그렇다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여러 나라로부터 모으시고 우리가 주의 거룩하신 이름을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4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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