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심령은 그의 병을 능히 이기려니와 심령이 상하면 그것을 누가 일으키겠느냐
잠언 18:14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
시편 108:13
‘모든 행동에는 영적 근거가 있기 마련이다.’ 윌리엄 D. 베커스의 말에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오래 되새겨보았다. 저의 논지는 기독교인이 일반인들 보다 심리적으로 더 복잡한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저들에겐 굳이 죄의식이 없는 문제나 자책할 게 없는 일을 신자는 무겁게 받아들이기 때문이겠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로웠느니라(롬 6:20).” 그땐 더 자유로웠는데, 그럴 수 있겠구나!
나는 <희망소식>을 읽고 내친김에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를 극복하는 비결: 죄악상담메뉴얼>이란 저의 책을 한 권 더 주문하였다. 조금 너무하다 싶게 온종일 글방은 조용하였다. 다들 바쁜지 어떤지, 이웃하고 있는 사무실이 텅텅 비어서 현관 등만 켜두고 안쪽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럴 수 있는, 나의 여건을 사랑한다. 병적인 부분에 대하여도 하나님이 그리 두시는 데 따른 감사로 여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게 그러니까 못하는 것들에 비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오후께 초등부 아이들과 수업을 했다.
완전한 사람으로 사는 이는 없다. 다들 어디가 아프거나 마음이 상했다. 그러고 있는 나를 두고 안타까워하는 이도 있지만, 그래서 드는 희망이란 게 남들처럼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이다. ‘사람의 심령은 능히 병을 이긴다.’ 나는 오늘 잠언의 말씀을 새롭게 읽는다. 병을 낫게 한다는 데 주안점을 두는 게 아니라 병으로 얻을 수 있는 승리의 과제가 더욱 풍성하다. 모두는 아프다. 몸이 아프면 마음이 상한다. 상한 마음에는 건강한 영혼이 깃들지 않는다. ‘심령이 상하면 누가 일으키겠느냐!’
나는 이 물음을 시편으로 답을 찾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는 우리의 대적들을 밟으실 자이심이로다(시 108:13).” 내가 나를 상대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주를 의지하는 것뿐이다. 의지함으로 용감해질 수 있다. 어떤 병,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니라 그것으로 누릴 수 있는 주의 도우심과 인자하심이 더 크다. 나름 건강하다고 여겼을 때, 좋은 게 좋다던 시절에는 몰랐던 좋음이다.
“너희가 그 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롬 6:21).” 그 끝을 아는 자의 삶은 이제 풍미를 더한다. 나만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게, 알 수 없는 여유로움이 있는 것이다. 가끔 저들의 인사가 ‘좋아보이세요.’ 할 때의 그 당연함에 대하여는 어찌 길게 설명할 게 없다. 초딩 아이가 스스럼없이 다가와 미주알고주알 속엣 얘길 할 때, 우리는 이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와 그런 얘길 나누었다. 안 믿는 아이와 그 가정을 위해 기도하라고 우리에게 두셨다. 어린 게 뭐 그리 속 끓일 게 많다고 위경련이 잦은 게 안쓰럽다. 자신이 못 생겼다고 여기는 아이는 이제 4학년인데 덕지덕지 화장을 한다. 유난히 목소리도 크고 제 할 말만 해대는 아이를 이젠 성가시고 귀찮은 게 아니라 안 됐다고 여긴다. 더 비싸고 더 좋은 걸 가졌다고 자랑하는 아이의 허기를 느낀다. 그러다 보니 맡기신 아이들에 대한 기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기도 말고는 다른 대안이 우리에겐 없다.
전에는 무슨 열매가 있었던가? 어떤 보람을 가지고 무엇에 희망을 걸고 살았던가? 하나님 없는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1-3).” 왜 자꾸 ‘이런 아이들’을 곁에 붙이시나, 이제는 안다.
주는 나의 피난처요 요새요 의뢰하는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108:1).”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곧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57:7).” 이와 같은 다윗의 고백이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그러므로 나의 의지는 당연하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내가 하면 되었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108:2).”
아, 이것으로 내가 배부르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잠 18:20).” 아침마다 내가 말하는 이와 같은 말들로 나의 하루는 늘 새 힘을 얻는다. 비록 한나절이 되기도 전에 또 무력감을 느끼고 금세 시들해서 비실거리는 경우도 있지만,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4).” 이제는 안다.
내 입의 말이 나의 심령을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몸이 아니었다. 환경이나 여건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내가 어떤 말로 주께 고백하느냐, 하는 거였다. ‘믿음은 이내 행동을 유발한다.’ 히브리서 11장은 이와 같은 자들의 향연이다. 좋은 환경과 여건이 저들로 주를 바라게 한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저들은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았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32).”
곧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고 의를 행하였다. 믿음으로 약속을 받아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였다. 불의 세력도 멸하고 칼날에도 피하지 않았다. 이는 곧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그야말로 불가사의한 일에 넉넉할 수 있었다. 고문도 채찍도 조롱도 결박당함과 옥에 갇힘도,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는 일에서도 저들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38).”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저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으로 모든 악함과 거짓과 고통과 절망도 우리를 능치 못한다.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시 30:10).”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54:4).”
가령 그렇게 새침을 떨던 아이가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아이엄마는 어떤 질병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얼굴이 ‘무섭게’ 생겼다. 그래서 아이는 유난히 자기 얼굴에 신경을 썼다. 단지 외모에서 뿐 아니라, 무슨 말만 하면 서러워하거나 의심을 했다. 처음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서 이를 어쩌나 싶게 신경이 쓰이더니, 재잘거리며 깔깔대는 아이를 다른 아이들도 신기하게 여길 정도로 밝아졌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 여기는 교회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고작 일주일에 한 번, 그리고 토요일에 와서 일기를 쓰다 가는 게 전부였는데, 아이가 달라졌다. 우리에겐 아무 것도 안 해도 이미 충분한 게 있었다. 특히 여기는 다른 것이다. 와 있기만 해도 나음을 얻는, 어떤, 치유와 쉼과 평안이 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나의 옛날 친구와 선생은 어려워한다. 할 말도 없고 와 봐야 불편하기만 하고… 그러니 그 차이를 내가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는 가만있는 것 같은데 꽤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역할은 그런 거였다. 왜 이런 애만 올까? 아내는 더 이상 투덜거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보내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뭘 잘 해서가 아니라, 주의 사랑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그 사랑의 불을 쬐게 하시려고 말이다. 저에게도 주의 사랑의 빛이 비추이게 하시려고, 그래서 또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저를 통해 주의 사랑이 전하여질 수 있게 하시려고! 자칫 표현을 잘못하면 무슨 신비주의자처럼 여겨질 것 같고, 마치 나의 자랑이 될까 두렵기도 한데, 면목이 없지만 하나님이 그리하고 계시는 거였다.
얘가 왜 오나? 싶은데 그게 나 때문도 아니었고, 글방 특유의 어떤 끌림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그 안에는 주의 영을 향하게 하시는 상한 심령의 애통함이 있던 거였다. 저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아직 의식하지 못할 뿐이고, 표면적으로 주일을 함께 하지 못하고, 예배를 사모하지 못하며, 하나님을 아버지 부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문득, ‘못난 엄마’를 둔 ‘유난히 예뻐지고 싶어 하는 아이’의 명랑함에서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무엇이 있다. 얘 이상해요, 다른 데선 안 그래요! 곁에 친구도 놀랄 정도로 달라졌다.
주가 하신다. 늘 최종적인 결론은 같았다. 내가 하는 게 아니었다. 때론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속을 끓이지만, 그것으로 기도하게 하시려는 거였다. 거기 있는 거, 그 자리에 늘 그렇게 있어주는 거, 어쩌면 이 일만으로도 이미 충분한 것일 수 있겠구나! 아직 어린 초딩 아이들과 수업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다. 내가 안달복달,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으로 시달리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족하였다. 심지어 아이가 왔다 그냥 가도 말이다.
기껏 뭐가 좀 되려나, 싶었는데 허망하게 아무 것도 아닌 사이가 된 것처럼 허무한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는 내가 빌려준 책도 두어 권 그 사람에게 있는데…. 그런 사람도 어느 길목에서 주님을 만날 때, 나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또 말이 그냥 허투루 버려지는 게 아닐 것을 믿는다. 설령 서로는 잊혀진다 해도, 어느 더 먼 훗날에 우리가 주님 앞에서 반갑게 악수하며 주를 함께 찬송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게 너구나! 하고 지금은 딱 꼽아서 말할 수는 없다 해도, 그래서 그때 우리가 그랬었어! 하고 말할 수 있는 가까운 미래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10).” 나는 아이의 명랑함 앞에서 기뻤다. 우리에게 두신 사명은 선명하였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고후 1:24).” 그러기까지 나를 여기에 두신 이유와 목적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13: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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