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전봉석 2017. 6. 1. 07:44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

전도서 1:3, 5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시편 120:1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복이겠으나 무엇보다, 주를 바라고 증거 하는 삶이어야 더욱 복되다. 모든 게 그 자리와 위치를 차지함으로 생은 공존하는 것이겠으나, 말씀을 연구하고 주님만을 바라는 삶으로의 값이 더욱 귀하다. 같은 층에 사는 중늙은이사내는 평생을 택시운전으로 밥벌이를 하여 먹고 살았다고 했다. 어쩌다 개인면허를 잃고도 저는 회사택시를 몰며 늙어간다. 낮에 들어와 잠깐 눈을 붙이고 저녁 늦게 혹은 아침 출근시간대를 끼고 무거운 몸을 움직여 일을 한다.

 

어쩌다 그 일을 하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새벽같이 일어나 떡방아를 돌리는 이와 야채가게를 여는 이와 가게 앞 진열대의 물건을 정돈하는 이와 빵집 주방에서 빵을 굽는 이와 문방구 계산대에 앉아 있는 이와… 아침마다 사람을 마주칠 때면 늘 동일하여서 그 동일한 모습이 때론 경탄스럽다. 어김없이 아침은 찾아오듯 그 시간이면, 두부가게 남자는 분주하게 콩물을 내린다. 나이가 들어 어느새 기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면서도 우린 다시 익숙하게 우리 삶을 지배해온 일을 한다.

 

오늘은 잠언의 말씀을 지나 전도서로 갔다. 지혜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돈하고 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그것으로 우리가 “구부러진 것도 곧게 할 수 없고 모자란 것도 셀 수 없도다(전 1:3, 5).” 인생의 덧없음에 대하여, 그게 또 사는 일이겠거니 생각하지만… 어차피 그러하다면 주를 바라고 주를 의지하며 주를 드러내어 나타내는 일에 전력을 다하는 게 또한 복되었다.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

 

나는 바울 사도의 이 말의 의미를 이렇게 이해한다. 주 안에서 모든 게 다 가하고 유익하나,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2).” 주의 뜻을 증거하고 전하여 장래에 우리의 소망에 대하여 말씀을 증거 하는 일이 복되다. 이로써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 자신에게 주신 바 그 생을 다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삶으로의 감사도 복될 것이나,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

 

주어진 삶에 충실하여 성심껏 주어진 삶을 감사로 다 하는 것이 유익하고, 그것으로 주의 교회와 주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일이 복될 것이나 말씀을 다루며 사는 일이 값지었다. 이쯤 되고 보니까 다들 ‘어쩌다 보니’ 그렇게 살고 있었다. 친구는 제대한 후 우연히 선배가 소개한 극장에서 기획 일을 도와주다 오늘에 이르러 여러 영화제를 실무적으로 주도하는 국장이 되었다. 누군 하루가 멀다 하고 해외를 돌아다니며 사업을 이끌고, 누구는 스스로 말하듯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약국에만 들어앉아 있다.

 

돌아보니 어느새 중년이 되었고 할 줄 아는 게 그것뿐이라 선뜻 다른 일은 엄두도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게 되었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전 1:8).” 그러니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인생 위에서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9-10).”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늘 똑같은 말 같은 말씀을 읽고, 아이들을 향해 늘 되도 않는 마음으로 소망을 품고, 그 타령이 그 타령인 듯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나… 싶다가도, 그러고 사는 게 인생이라면 이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나! 난다 긴다 하던 이도 어느새 늙어 운신을 다하지 못하는 걸 보면,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4).” 그래서 누군 더 기를 쓰고 살고, 누군 다만 시간에 맡긴 듯 자신을 방치한다.

 

치과에 가서 잇몸치료를 받았다. 다들 노인 대하듯 어쩔 수 없다는 데 무상함을 느꼈다. 어쩔 것인가. 신체의 노쇠함과 같이 더는 어쩔 수 없는 무엇에 대하여 순응하는 수밖에. 그럼에도 젊게 산다며 기를 쓰고 몸을 관리하고 노년을 희구하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여태 그렇듯 살았으면서 다시 또 그 일을 바라는가, 싶어서 말이다. 잇몸이 내려앉고 너무 약해서 잘 관리하셔야겠어요. 젊은 간호사의 말에 그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돌아와 베커스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를 극복하는 비결>을 읽었다.

 

영화 <세븐>을 다시 받아두고 며칠째 보지 못하고도 있다. 교만, 시기, 분노, 탐욕, 나태, 정욕, 탐식에 대해 이것들이 실은 습관적이었다는 데 새삼 놀랐다. 오랜 세월 우리 안에 켜켜이 쌓인 죄 덩어리인 셈이다. 본래 우리가 선하다는 말은 헛되다. 아이들 논술 교재로 쓰곤 하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 그와 같은 우리의 본색을 불편하게 드러낸다. 영국의 소년합창단이 어느 날 무인도에 불시착하면서, 천사 같던 소년들이 광기어린 흉포성을 드러내는 데 놀라울 따름이다.

 

영적 통제가 없다면 인간의 본성은 얼마나 악의적이며 야만적인가. 이를 교육으로 무마하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우병우’가 어디 한둘인가? 서정인의 <강>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저마다 천재고 영재였다가 둔재로 변해갈 뿐이다. 저들에겐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뭐라 해도 자신이 무엇을 어째서 왜 잘못이란 건지, 저들은 알지 못한다. 요령껏 법망을 피해 사는 게 능력인 세상이니까 말이다. 다들 그런데, 여태 그래왔는데, 그저 새삼스러운 게 원통할 따름이겠다.

 

그게 어때서? 하는 교만의 출처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 2:16).” 몸에 원하는 걸 바라고 눈에 좋은 걸 희구하면서 이 땅에서의 자랑에 충실하였던 생은 자기아집으로 똘똘 뭉쳐 도대체 그게 왜 나쁘다고 하는지 저는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다. 이에 시발점은 시기였다. 남들처럼 아니 남들보다 나은 삶을 꿈꾸었던 것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 그래야 하는 게 그게 어디 우리 의지로 되는 일이겠나? 우리 안엔 분노가 가득하다. 억울한 것이다. 자기만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한,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죽었다 깨어나도 그럴 수 없는 일이다. 분노와 다툼이 없다면 더 이상 이 세상은 세상도 아니다.

 

이는 탐욕 때문이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전 6:9-10).” 별별 소릴 다하지만 이는 탐욕이다. 성소수자의 인권을 운운하고, 동성애를 두둔하며 마치 더 나은 이로운 삶을 꿈꾸는 것 같지만 이내 탐욕이다. 성적 쾌락을 바랄 따름이다. 영화 <더 노멀 하트>를 받아두었다.

 

잠언에서 누누이 강조한 바, 영적인 나태는 약도 없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26).” 저는 그 탓을 하나님께 돌린다. 사리에 맞게 말해줘도 소용없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잠 26:16).”

 

뭐라 한들, 별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의 정욕을 따를 뿐이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당돌하고 자긍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들을 비방하거니와(벧후 2:9-10).” 그런 게 뭔지 대충은 안다. 우리 건물에도 보면 마사지샵과 음침한 바가 즐비하다. 심지어는 같은 층에 여러 개가 동시에 붙어 있기도 한다.

 

그저 자기 배만 채우느라 최소한의 인간의 도리도 저버린 지 오래다. 이것이 바로 일곱 번째, 탐식이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9).” 땅의 일을 생각하는 데는 별 수 없다. 자기 배 불리는 데만 혈안이 돼 있다. 양심이고 뭐고 개나 물어간 지 오래다. 개처럼 벌어 정승처럼 쓰겠다는 소린데, 개는 늙어서도 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나의 오늘을 사랑한다. 돈벌이는커녕 밥벌이도 못하는 주제로 살고 있지만, 나로 하여금 주의 말씀을 사모하게 하심으로 오직 주만을 바라고 의지할 수 있게 하시는 데 감사하다. 가난도 질병도 나이 듦도 외로움도 그 모든 게 그리하여 더욱 주를 구하게 하는 데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때론 그저 하루를 전전긍긍하듯 내 몸 하나에 쩔쩔매는 형국이지만, 그래서 ‘파리대왕’이 새롭게 읽힌다. <세븐>이 파헤치는 죄의 실상이 눈에 보이고, <더 노멀 하트>의 끝내 어리석음이 두렵기까지 한 것이다.

 

연일 벌이지는 ‘박근혜 최순실’ 재판과 새 정권의 인사청문회와 사람들의 설왕설래가 모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끔찍하고 서럽다. “의인은 거짓말을 미워하나 악인은 행위가 흉악하여 부끄러운 데에 이르느니라(잠 13:5).” 그러므로 “악한 자가 이를 때에는 멸시도 따라오고 부끄러운 것이 이를 때에는 능욕도 함께 오느니라(18:3).” 이를 바로 알게 하시려고, 주는 나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곧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시 120:1).” 인생이란,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 강물은 어느 곳으로 흐르든지 그리로 연하여 흐르느니라(전 1:7).” 그러므로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들과 미련한 것들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도다(17).” 결국은 주께서 내게 응답하심이라.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시 120: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