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전도서 2:26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121:3
이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음이 어려웠다.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몫이로다(전 2:10).” 기껏 애써 나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어떤 보람을 기대하건만 당최 내가 바라던 것이 아니다. 아이는 누굴 사귀는데 하필 그 짝이 어떠했고, 그 시어머니 자리가 췌장암 3기라며 기도를 부탁했다.
대체 무슨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고 내 마음이 즐거운 대로 나는 막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의 열심이 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고 이만하면 되겠지, 하는 나의 수고로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11).” 그래서 이제 열매를 거둘까 하였는데 도로아미타불인 셈이다.
우리가 서로 그런저런 사이로 만나면 더는 기대가 없을 수 있을까? 그저 좋은 사람으로 적당한 존경도 받으면서 양껏 만족하면 그만이었을까? 아무 소용이 없는 듯, 하나마나인 것처럼, 차라리 아니한 만 못한 것 같은 어떤 불안이 나를 엄습하였다. 아이와 성경공부를 하는 동안이었고, 누구와 문자를 하다 드는 불편함이었다.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23).”
중2 녀석은 아예 대놓고 졸았다. 이런 걸 언제까지, 왜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은 날마다 내게 묻는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 할래? 이 길이 맞나? 잘하고 있는 것일까? 너만 이상한 거 같아! 그리하여 고단하기만 한 하루였다. 아이들이 다 돌아가고 다음 날 작성할 설교 원고 초안을 만드는데 공연히 심통이 났다. 왜 하필 또 아이는 그런 애(?)를 사귄 걸까? 분명히 전에 그러저러하니 피해야 할 상대는 어떤가 하고 성경공부 때 일러 주었던 것 같은데. 남자애 얼굴을 보니 잘생겼다. 근사함에 속수무책이었나?
참 신기한 건 하지마라, 가지마라, 하는 데로 기를 쓰는 것 같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네 삶이란 게 이처럼 하나님과 반대쪽을 향해 냅다 뛰어가는 것 같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우매자가 당한 것을 나도 당하리니 내게 지혜가 있었다 한들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도다 이에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것도 헛되도다 하였도다(15).” 그러니 어쩔까? 살아봐라. 네가 살아봐야 정신을 차리지, 하고 내버려놔둬야 하는 것인지. 우리가 지혜가 있다 한들, 자신의 수고와 애씀으로 보람을 찾는다 한들, 이것도 헛되도다.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다는 것만 분명해진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굳이 구원을 받을 이유가 없다고 여기는 데야 별 수 없는 노릇이지 않나?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 앞에 실소를 금치 못한다. 노아를 생각해보자. 평생 메시아를 기다렸던 시므온을 떠올려보자. 과연 그들은 어떻게 그 장구한 기다림을 지속할 수 있었을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상에서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이처럼 야단법석인가 말이다. 그러니 다시 돌아오는 마음은 살아봐라. 살아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랄 때까지 혹시나, 설마, 하는 생각으로 미루고 또 안이하여 영적인 둔감함을 만끽하며 살다보면 알게 되겠지. 왜 주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 하시며 경고를 하셨는지를 말이다(눅 17:32). 이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마음도 주의 의도하신 바이겠거니.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가 누렸을 잠깐의 완전함에 대하여도 저가 완전함으로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훼손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설왕설래 한들 우리는 결코 그래볼 수 없는 것이겠으나,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본연의 그 완전함에 대하여 우리는 담대히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관계가 회복된 것이 아닌가? 이를 아무리 말로다 설명을 한다고 한들 어찌 논리적으로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증명할 수 있겠나!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
성령의 내주 임재하심이 아니고는 결단코 불가능한 일일 거였다. 주일 지나고, 한 번이라고 성령을 달라고 구해본 적이 있니? 아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전 기도 안 한다니까요! 하고 질문의 의도를 멀리했다. 나는 화가 났다.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기도를 한다. 기도를 할 줄 모르는 생명은 없다. 소위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게 기도가 아닌가? 의식을 하든 의식을 하지 못하든 생명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기도였다. 마치 기도 없이도 사는 것처럼 스스로를 위대하게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만 의지적으로 하느냐 수동적으로 하느냐, 의식하고 하느냐 무의식적으로 하느냐의 차이다. 의지와 의식의 세계는 그러므로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빌고 바라느냐 하는 차이여서 중요한 본질은 여기서 갈린다. 믿든 안 믿든 누구나 기도를 한다. 날씨가 좋기를, 차가 제 시간에 도착하기를, 먹은 게 소화가 잘 되기를, 오늘 하루도 무사하기를… 사소한 것 같으나 우리의 사소함으로 생은 유지되는 것이고 이에 기도란 모든 산 것들의 필연적인 구사요 간구요 바람인 것이다.
나는 왜 아이가 자꾸 억하심정으로 하나님을 밀어내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스스로도 표현한 것처럼 분노가 그 안에 가득하였다. 자신에게 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 혹은 그 아버지와 형에게 화가 가득하였다. 나름은 이를 인지하고 저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려는 듯 자신을 고되게 몰아대고 있는 것이다. 잘해냈고 알아서 잘하고 있고, 그러니 굳이 하나님이 간섭하실 일이 아니라는 듯. 아이의 말을 끌어내기에 앞서 나는 일부러 더 같이 기도하였고 마치면서도 부러 고개를 숙여 기도하였다. 그 대상을 분명히 하고 싶어서 말이다.
하나님은 일부러 그러신다. 성도라서,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일부러 더 골탕을 먹이시듯 험하게 다루신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그렇지 않으면 죽은 자식이다. 곧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나는 아이의 뻗대고 어깃장을 놓는 그와 같은 자세가 안타까웠다.
그럼 뭐, 정말 그렇다면 상관도 없이 말 그대로 편안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 텐데, 또 그게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려는 게 아니다. 그땐 나도 몰랐었다. 차라리 좋아서 저들과 어울리는 것이면 저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굴면 될 것인데, 그게 또 그렇지가 못했다. 뭔지 모르게 불편하고 답답하여서 어중간하였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이제 그만 다닐까, 생각을 했어요. 어딜? 교회를요. 왜? 그냥 다, 헛된 것 같아서요. 목요일에 지금처럼 오는 건 좋은데, 주일 날, 교회는 좀, 그런 생각을 잠깐 했다고요. 나는 그래서 아찔하였다. 순간 명치끝이 아파왔다. 뭔가 얹힌 것처럼 답답함이 몰려들었다. 이런 걸 계속 해서 뭐하나, 싶으면서 회의와 절망이 휘감는 것도 같았다. 그런 마음의 끝자락에서 또 다른 아이의 기도부탁(?) 문자가 왔으니, 것 때문에도 기운이 빠졌다. 왜 다들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려고 그처럼 안달이 난 것일까?
전에 그 애도 잠깐이었지만 성경공부를 할 때 그토록 당부하고 조심할 것을 일렀던 것만 골라서 일부러 더 그러는 것 같았다. 나는 하나님 앞에 입이 댓 발 빠졌다. 아무리 애써봐야 소용없는 일이 아닐까? 비 한 방울 올 것 같지 않고 사람들은 저마다 장가들고 시집가고 희희낙락 잘만 사는데 유독 왜 나만 이러고 있나 싶은, 노아는 진짜 한 번도 그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었을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아, 이런 고백이 내 것이 되기까지는 또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 해도 또 쳐야지. 칠 수 있는 계란이 내 손에 들려지기만 한다면 또 무모하다 해도 계란으로 바위를 쳐야지. 그럴 수 있는 게 주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해가 내리쬐고 바람이 불고, 나는 가늠할 수 없으나 미생물이 꼼지락거려 어느 날 풍화작용에 의해 바위가 갈라질지 누가 알겠나! 그럴 것이라는 말씀만 붙들고, 다시 또 나무를 등에 지고 산을 오르는 일이겠거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그리하여 나는 나의 고단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저 아이의 맹랑함에 대하여 나의 몽매함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해도 주께서 저를 사랑하심을 신뢰하는 수밖에. 주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을. 그리하여 공연히 내게 오늘을 맡기신 게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가 기뻐하시는 자에게는 지혜와 지식과 희락을 주시나 죄인에게는 노고를 주시고 그가 모아 쌓게 하사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에게 그가 주게 하시지만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2:26).”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일이라면 기도밖에 더 있겠나? 너는 알지도 못하는 허공을 향해 빈다면 나는 무모하다 해도 유일하신 나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수밖에.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시 121:3).”
눈물이 핑, 돌고 가슴이 얼얼하다. 하나마나 한 일인 것 같아도 주가 계심으로 선다. 서서 두 발로 굳게 서서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전 2:22).” 그러니까 말이다. 그 잘난 ‘19만원’만 들고 요리조리 악랄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나, 어디 해외에 수천억의 비자금을 감추고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이나, 구구하게 살 궁리에 매여 사느라 사는 일에 치여 사는 소소한 인생들이나,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자,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하리니 너는 낙을 누리라 하였으나 보라 이것도 헛되도다(1).” 나를 위한 삶이란 게 고작 그런 것이라면!
“이러므로 내가 사는 것을 미워하였노니 이는 해 아래에서 하는 일이 내게 괴로움이요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로다(17).” 하나님이 아니면 거기가 에덴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 먹고 즐기는 일을 누가 나보다 더 해 보았으랴(25).” 그러니 바람을 잡는 일이어서, 주가 아니면 안 되겠다. 주님만으로 죽자. 주의 말씀으로 죽자. 노아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시므온의 다짐이었을 것이다. 말씀이 아니고는 살 낙이 없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그리하여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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