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말씀을 열면, 깨닫게 하나이다

전봉석 2017. 5. 31. 07:39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잠언 31:8-9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편 119:130

 

 

 

오늘 말씀을 입에 머금고 있다 보면 마음이 기우는 쪽을 보게 된다. 신원을 간구할 줄 모르는 부모와 그 밑에서 안간힘을 쓰며 사투를 벌이는 아이 말이다. 가령 이제 초딩 4학년인 아이는 다 알면서도 조모를 엄마로 부르고, 맞벌이를 해야 하는 조부모와 나이어린 친부의 녹록치 않은 생활을 눈치 챘다. 아이는 결코 친모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러느라 자기 혼자 있는 시간을 주체할 길이 없다.

 

한 아이는 아버지가 없다. 엄마는 새벽까지 일을 해야 한다. 언제든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붙들려 산다. 어린 게 위경련을 달고 사는 것도 그 때문이겠다. 애간장이 녹는 것이다. 이번 주부터 아이를 보내지 않았는가보다. 교육비를 넉 달째 못 보내더니 결국 그리 결정을 했는가. 아내는 아이엄마의 문자를 보여주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미안하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그 밑에 대신 답장을 적어주었다. 아내가 읽고 그리 보냈다.

 

요는, 그냥 보내시라. 형편 되는대로 하시라. 아이가 싫다 그러면 모를까, 좋아라하니까 상처받지 않게 그리하시라. 같이 어려운 처지에 그 마음 안다. 미안해하지 마시라. 그리 적었다. 어쨌든 그리 됐다. 할 수 있는 만큼 하자. 우리도 아이가 마음에 밟히는 데야 별 수 있나. 마음 주시는 대로, 주께 하듯 하자. 가정예배를 드리며 아내에게 말하였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우리 성도의 사명이겠다.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억지로 끌려 다녀서도 안 되겠지만, 어려운 형편에 죄송하다는데,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 이는 엄연한 말씀이다. 때로는 힘에 겹고 그래서 심통 난 아이처럼 뚱한 마음이 먼저 들기도 하지만,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은 어쨌든 하기 싫다는 소리다. 그러니 어쩌나?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손해를 보는 것 같으나, 우리도 은혜를 입은 것이라 이는 내 것이 아니었다.

 

아내는 요령이 생겨서 ‘이건 다 후원헌금으로 드립니다.’ 하고 교육비를 못 내는 아이를 교회로 돌린다. 못 내는 건 그 부모지만 안 주시는 건 하나님이실 테니까. 주님께 알아서 하시라, 내어맡기는 셈이다. 내 코가 석 자나 되는데, 하는 말의 의미는 실제 그리 고상하지 않다. 말 그대로 콧물이 댓 발은 빠져 훌쩍거리는 신세다. 그런 걸 훌쩍 하고 들이마시면 또 간단하다가도 어느새 콧물을 길게 빠뜨리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 내 코가 석 자라는 말은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 하겠으니까 할 수 없다는 형편이다. 그런 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생은 다 지 코가 석 자다.

 

죄는 언제나 정서적 고통을 수반하고 실제 삶의 처우를 개선하려 들지 않는다. 가장 선호하는 건 안주하는 것이다. 개혁은 무슨, 변화도 원치 않는다. 모든 질병의 저변에는 죄가 깔려있다. 죄를 질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조현병으로 몰아 죄를 희석하고,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려 드는 일은 끔찍하다. 죄는 질병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질병의 저간에 죄가 깔려있다. 가령 낮은 자존감에는 교만이라는 끔찍한 자기애가 서려있다. 피해의식은 시기에서 나오고, 빈곤은 탐욕의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곧 내 코가 석 자인 채로 살아가는 삶의 면면에는 ‘어쩔 수 없다’는 자기애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5:18).” 오늘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얼굴이 아닐까?

 

청문회를 한다 싶으면 어느 한 사람 거짓으로 끈을 삼지 않은 이가 없다. 몰랐다, 그런 게 아니다, 하면서 항변하지만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21).” 그러고 살아온 이들이다. 나름 내로라하는 지위를 가지고 누군 교수를 하며, 누군 행정을 담당하고, 누군 사람들을 선도하면서, 한 마디로 앞뒤가 다른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럼 그게 저들만의 문제인가? 악다구니를 하듯 비판을 하고 욕을 하는 사람들도 다를 게 없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화 있을진저!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8).” 더 좋은 집과 더 비싼 자동차와 더 화려한 의상을 꿈꾸는 자는 화 있을 것이다. 그러느라 자신만 잘난 줄 알고, 홀로 거주하려 드는 자는 답이 없다. 저들은 스스로를 믿는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11).” 자기만족에 겨워 사는 것이다. 다 그렇지 뭐, 어쩔 수 없어, 하는 자들은 늘 말한다. ‘내 코가 석 자야!’ 그리고 돌려 치듯 ‘너나 잘해!’

 

때로는 아이에게 화가 난다. 얼레고 달래고, 또 똑같은 소리를 해도 아이는 도무지 변하지가 않는다. 늘 주저하지만 또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딱, 하라는 대로만 한다. 하라 그러니까 한다. 왜 해야 하는지를 모른다. 아무리 말해줘도 시키는 것만 하겠다는 식이다. 그러니 누가 일일이 또 같은 말을 되풀이해줄까? 중2 아이에게 욕을 한 바가지 하고 싶었다. 그리곤 너 가라, 하고 쫓아버리고 싶었다. 차라리 말썽을 부리고, 반항을 하고, 대들기나 하면 좀 나을까? 얘는 늘 바람 빠진 풍선처럼 헐렁한 것이다. 그러시든가요! 하면서….

 

교육비를 받고 하는 일이었다면 그만 하자고 했을 것인데, 교회가 아니라 글방만이었다면 그랬을 것인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10:2).” 보다보면 내가 그 아이라. 영락없이 내가 저러고 있었지 않나? 그런 나를 주님은 끝까지 참고 기다리셨다면, 오늘 나에게도 그리하라고 하시는 게 틀림없었다. 내가 저 아이를 내모는 건 불공평한 것이다. 과부를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 이런.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저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일이다. 참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고,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당장 우리 코가 석 자여서 이번에도 아이 등록금에, 월세에, 카드비에, 어쩔 수 없어 당장 땡빚인 카드론을 끌어다 쓰는 주제에!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둔한 나를 깨닫게 하시나이다.

 

얼마나 역설적인가!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잘나서 다들 제 코는 제가 풀고 산다고 하는 이가 아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우리 손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주 앞에 서는 게 복이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이를 앎으로 나는 이제 내 코가 석 자인 게 오히려 낫다 싶다. 우리의 어려운 형편이 우리로 주를 더욱 바라게 하시는 것이어서 감사합니다. 아내의 기도가 훌륭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 남들이 그 코가 석 자라면 나는 서른 자 쉰 자가 되어 땅에 질질 끌리는 형편이라 해도,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 5:20).”

 

주께서 우리에게 두신 이 한 날의 삶의 목적이었다. 대단히 능숙하게 잘 준행하며 사는 건 아니지만, 이처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실 때면 더욱이 잃어버리지 않기를 위해 기도한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잠 31:30).” 그리하여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31).” 그것이 오늘에 있을지 아주 먼 훗날 죽어서 주 앞에서 있을지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건 ‘칭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주의 의로운 규례들을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시 119:105-106).” 내 마음을 확정하게 하셨으니 또한 늘 새 힘을 더해주실 것을 믿으며,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는 거짓된 자들을 내가 보고 슬퍼하였나이다(158).” 나의 슬픔으로 저들을 위해 마음을 쓰게 하시려는 거였다. 고로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16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