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전봉석 2017. 6. 4. 07:14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9, 12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시편 123:1

 

 

 

나의 걸음이 누군가에게 발자취가 된다는 건 두려운 일이다. 오락가락하지마라. 뒤따르는 자가 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신중하고, 뒤에 오는 이에게는 큰 의지가 되겠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내가 의지하는 말씀으로,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애를 보지 말고 주님을 봐야 해. 사랑하되 주의 사랑이어야 해. 나는 참지도 인내하지도 못하겠다는 걸 항상 주 앞에 고하면서 그리하여 주의 도우심을 바라야 해. 동기 전도사에게 말해주었던 걸 오후께 아내에게도 말해주었다. 어쩜 그래? 아이엄마는 결국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내는 수긍에 앞서 체념이 밀려오는가 보았다. 그렇지 뭐, 그럴 줄 알았어! 아, 이 일은 참 고약한 일이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논다. 화딱지가 나고 속이 상했다. 저들에게 말해주었던 말이 내게 더욱 간절하였다. 주님만 바라야 해.

 

이때, 나 혼자가 아니어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끊어지지 않으니라.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1).” 나 말고도 주를 바라는 성경의 인물들이 그랬던가 보구나.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4:4).” 사람에게 기대하는 일이란 바람을 잡는 꼴과 같다.

 

됐어. 거기까지 했으면 더 신경 쓰지 말자. 다음은 하나님이 하셔야지. 아내와 멀리 산책 겸 동네를 돌다 말하였다. 주의 이름으로, 주의 사랑이 아니면 다 헛될 뿐이다. 그래봐야 내 안에 만족함이 더한 것뿐이고, 고작 아이엄마의 됨됨이가 어떤 것뿐이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구차스럽기만 하다. 어느 시점에서는 그냥 두는 것도 지혜일 테지. 다만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안 됐고 서글플 따름인데 것도 어쩌겠나. 더 손을 내미는 것도 욕이겠다.

 

각자의 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지만 서로의 생각은 같지 않았을까? 주님만 보고 간다는 게 때론 구슬프고 애처로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인생만 놓고 본다면, “그러므로 나는 아직 살아 있는 산 자들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들을 더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아직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에서 행하는 악한 일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복되다 하였노라(2-3).” 다들 사느라 기를 쓰지만 사는 게 그저 고역이라. “내가 다시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1).”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자의 허망함에 대하여는 두 말할 것 없다. 본인들은 그게 좋다고 하는가 모르겠는데, 어쩔 것인가?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5).” 하필, 종일 들고 있던 책의 내용이 교만을 다루고 있었다. 모든 악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마음의 근간이었다. 저는 주목받고 싶고, 관심을 받으며 칭찬 듣기를 고대하고, 찬사를 통해 중요한 사람인 걸 자부한다. 그래서 저는 순종을 못하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러느라 논쟁을 좋아한다.

 

누구를 생각하며 메모해두었다가 모두 내 얘기인 것 같아 뜨끔하였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가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5).”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극진한지, 성령은 시기하기까지, 성자는 날 위해 죽기까지 한 바로 그 사랑이다.

 

그 사랑을 누가 끊을 수 있으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또한 그렇게까지 사랑하신 사랑이어서 성부 하나님도 더는 물러서지 않으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8:17).” ‘결단코’다. 여지가 없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 10:42).” 동기 전도사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었다. 어쩌다 보니 아내도 나도 평생을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온 셈이 되었다. 그만큼 다른 일에 기를 썼다면 더 나은 무엇이 있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애들이잖아. 지나가는 거야. 우리 손으로 결실을 볼 수 없을지 몰라. 하지만 나와 지낸 시간이 또는 내가 던진 말 한 마디가 어느 훗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결정적인 ‘스윗스팟’이 될 수 있다면…!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게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 모른다. 여기서도 성경은 엄연히 말씀하신다. ‘결단코’ 그에 따른 상을 잃지 않으리라. 애들 대하고 건사하는 일이 얼마나 고달프고 부질없는가! 하며 한탄이 또 자괴감이 밀려오다가도 다른 건 또 그럼 뭐 얼마나 더 나은 게 있는가? 돌아보면 이보다 보람도 없다. 사람을 다루는 일이라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지만 여느 일보다 천만 배는 값지지 않나?

 

누군 평생 흙을 다루고 동물을 건사하며 식물을 연구하고 돈을 좇고 명예를 구하며 죽자고 사느라 사는데도 보람을 운운하는데, 하물며 아이들을 대하는 일이 어찌 고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결국 죄는 문제가 아니라 죄다. 죄는 결코 질병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게 아니다. 의도적이며 다분히 의식적이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아이들 앞에 설 때 더더욱 떨리는 게 그래서다.

 

목사님 귀찮게 한다고 엄마가 가지 말랬어요. 사장 막내 아이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말했다. 귀찮아요? 아이의 당돌한 질문에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피식, 웃었다. 아이스크림 줄까? 냉장고에서 쭈쭈바를 하나 꺼내 건네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의 눈과 마주쳤다. 귀찮지 않아, 아빠 사무실에 왔다가 언제든 오고 싶으면 와도 돼. 아홉 살 막내 따님은 내 그럴 줄 알았어! 하는 표정으로 어렵게 쭈쭈바 껍질을 벗겼다.

 

귀찮으면 어쩔 것인가? 나도 누군가에겐 그러했을 걸. 저의 냉수 한 그릇이 오늘에 나로 있게 하는 게 아니었나! 그 작은 자 중 하나였던 내게 누군가 마다하지 않고 건넨 냉수 한 그릇이 결정적으로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이와 같이 주의 길을 가는데 스윗스팟이 되었다. 지옥을 무서워하는 걸 보니까 너는 믿는 사람이 틀림없어! 내가 아홉 살 때 혹은 더 어릴 때 믿음이 믿겨지지가 않아 무서워하고 있을 때 누가 들려준 말이었다. 자살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야, 했던 말 한 마디. 괜찮아,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은 너를 특별히 사랑하신단다, 하던 의문의 명제 하나.

 

아이는 쫑알거리며 쭈쭈바를 먹었다. 그리고 피아노를 쳐도 되냐며 건반 앞에 앉았다. 서툰 솜씨로 나에게 들려주겠다며 여러 곡을 연주하였다. 어느 늦은 봄날의 토요일 오후, 좀 더 훗날에 아이는 이때를 어떻게 기억이나 할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아무런 꾸밈없이 정직하기만한 아이를 보면 이와 같은 말씀이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막 10:15).”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천국이라면 모를까!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천국은 천국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기도한다.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13).” 하면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어른인 줄 알 때 넘어진다. 내가 귀찮아요? 하고 묻던 아이의 당돌함이 나를 일깨웠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같음이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의지하리로다(시 52:8).”

 

주일 날 아침, 회사 일로 예배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아이의 문자를 어제 받고도 대꾸를 하지 않다가 이제야 답을 보냈다. 늘 말씀 붙들고 기도하며 지내자. 말씀이 아니고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걸어가신 길임을 확신하면서, 말씀 붙들고, 주님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밖에는 내 수고와 애씀이 무슨 선을 이룰 수 있을까! 네가 있어서 나도 기도한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전 4:9).”

 

내가 걸어가는 이 길이 주님의 길이기를 바라는 건 뒤따라오는 이가 있어서다. 나 혼자면 패하겠고 둘이면 맞설 수 있나니,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12).” 오늘 말씀을 나는 그렇게 읽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한 걸음 한 걸음이 길을 낸다. 어느덧 저만치 와 있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시 123: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