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
전도서 6:7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시편 125:4
시기는 나를 너와 비교한다. 나의 모자람을 확대하고 너의 넘침을 마음에 담아둔다. 혼자서 판단하고 결론짓고 앙갚음한다. 가장 근간은 형제간의 경쟁의식에서 싹튼다. 창세기 37장에서, 형들은 동생 요셉을 시기하였다(11). 그들에게 아버지는 부당하였다. 그럴 때 ‘타인지향적인’ 삶의 한 방식을 따른다. 남들처럼, 저들을 기준으로 모방한다. 거슬리고, 비아냥거리고(19), 악을 꾀하고(20), 앙갚음을 모색한다(23). 교활함은 능청에서 나온다(32). 시기와 질투는 다르다. 시기는 네 것을 갖겠다는 것이고 질투는 내 것을 지키겠다는 것이다.
시기는 전염성이 강하다. 사탄은 하나님을 시기하였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거슬렸다. 간교함으로 사람에게 다가갔고 그 안에 시기를 불어넣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 이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낮은 자존감이나 자기혐오가 겸손으로 비춰질 수 있다. 자신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람을 혐오하는데 어찌 대응할 길이 없어 자신을 혐오한다. 이는 마치 겸손으로 오인된다. 시기는 교만과 같이 하나님을 대항한다. 환경적 사회적 결함이 아니라 죄다. 오해나 실수가 아니라 엄연한 죄악이다. 내 안에 들어찬 게 시기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말씀을 읽거나 책을 읽을 때면 그게 내 얘기여서 괴로울 때가 있다.
딸애가 글방에 나와 종일 3과목의 시험을 보았다. 사이버대학에서 사회복지사 관련 공부를 시작하여 짬짬이 그리 시간을 두고 있었다. 휴일 전날이라 거리가 어수선하였다. 그럴 때면 괜히 어디라도 갈까, 싶은 마음이 나를 더 괴롭혔다. 할 수 있는 게 책읽기여서 때론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 10).” 이런 말씀이 이제 다행으로 읽히니까 말이다.
모든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창 40:8).” 곧 이김은 여호와의 것인 까닭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아무도 하나님을 당할 수 없다. 아무리 안간힘을 쓰고 악으로 깡으로 이겨보려 해도, 자기 자신도 감당이 안 되는 일이다. 곧 오늘 말씀은 이를 일깨우신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전 6:7).” 뱃속 깊은 그 어마 무시한 세계를 누가 알까?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 26:22).” 그 안에서 온갖 더러운 게 나온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0-23).” 그게 나여서 괴로웠다. 나는 시기와 질투로 똘똘 뭉친 위인이다.
이를 여실히 느끼게 하는 게 사랑이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 13:6).” 내가 주를 사랑하고 하면 할수록, 주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걸 느끼면 느낄수록 내 안에 이고 진 모든 악독으로 괴롭다. 무심히 누구를 비판하고 있는 나를 마주할 때, 남들은 다 잘 되는 것 같은데 싶은, 신포도 같이 진저리치게 하는 무엇이 나를 붙들고 있는 것이다. 마치 겸손인양 겸양을 떨면서 실은 자기혐오에 빠져 있고 낮은 자존감으로 혼자 끙끙 앓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아냥거림으로, 악을 꾀함으로, 앙갚음을 모색하는 일로, 교활한 능청을 떨면서 나의 하루를 주도하려 드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 내가 그러지 못하는 것으로, 나는 사랑을 대치하고 있는 것 같다.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데 따른 절망이 또 화가 나를 몰아세우는 형국이다.
내 안에 두시는 이와 같은 절망이 주의 사랑이려나.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벧전 2:1-3).” 사모하고 사모하여서 갈망하고 갈망함으로 나는 도저히 내가 나를 어찌할 수 없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주의 백성이라.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그럴 수 있게 하시려고 오늘의 나를 맡기신 거였다. ‘내 양을 치라.’ 내 몸을 건사하고 내 마음을 다스리게 하심으로 주의 사랑이 내 안에 함께 하심을,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 23:4).”
아빠 혼자 있으면 진짜 심심하겠다. 오후께 딸애가 공부를 마치며 말했다. 그런가? 새삼스러워서 나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아내가 나와서 잠깐 멀리까지 갔다. 전주콩나물해장국으로 저녁을 먹고 돌아왔다. 그렇게 느껴서 그런가? 사람들이 다 어딜 가지 못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유난히 바글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거리에서도 식당에서도 불안하였다. 나 원, 돌아와 가정예배를 드리고 얼른 잠을 청했다.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던 사람이, 그러게. 참 심심하게 됐다.
그것으로 말씀을 직면할 수 있다면 복일까?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 5:26).” 나는 자꾸 어디가 아프다. 내가 아픈 걸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데 쓸 수는 없다. 아프다는 말이 이젠 너무 민망하여서 아내에게도 말하기가 어렵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기도 글을 쓰기도 어렵다. 어딜 가면 마음이 먼저 어렵고, 몸은 주체할 수 없는 피로를 호소하며 아우성이다. 투기는 시기의 격한 반응이다. 빼앗아 망가뜨리고 싶은 욕구다. 어차피 내 것이 되지 못할 바엔 다 같이 못 가졌으면 하는 훼방이다.
일찍 깼다. 비가 오려는가, 온몸이 극성이다. 가끔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한다. 기어이 아이엄마는 우리에게 실망을 주었다. 염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 그럴 줄 알았어! 아내의 냉소적인 체념이 이해가 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공연히 하나님께 향해 서러워진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 공모전 대회 날짜가 지났다며, 아이가 마치 글을 못 쓴 걸 내 책임인양 말했다. 애나 어른이나, 너나 나나, 사람이란 게 신물이 난다. 뭐 좀 나아지는 게 있어야 희망도 걸고 기대도 하는 것인데. 하나님은 참 너무하신다.
감사와 원망이 내 뱃속에 같이 있다. 분노 같은 아니 어떤 화가 나를 절망하게 한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전 4:4).” 그것이 다, “사람의 수고는 다 자기의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채울 수 없느니라(6:7).” 그러니 어쩌면 좋을까? 무엇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 나는 거의 습관처럼 주의 이름을 부른다. 끙, 하고 자다가 돌아누우면서도. 멈칫, 길을 가다가도. 문득, 누굴 생각하다가도.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시 125:4).” 아뢰고 바랄 따름이다.
주가 선대하지 않으시면, 나는 어디로 가리까. 더는 거짓 만족으로 살 수는 없다. 갑자기 이솝의 ‘수전노 이야기’가 생각난다. 저는 남 몰래 모든 재산을 팔아 금덩어리를 샀다. 이를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낡은 담벼락 아래 묻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모르게 위로를 얻었다. 그런 저를 의심하는 자가 어느 날 수전노의 금덩이를 훔쳐갔다. 수전노는 슬피 울며 괴로워했다. 한 이웃이 다가와 수전노에게 말했다. 여보게, 돌덩이를 그곳에 묻어두게. 어차피 쓰지도 않고 묻어두기만 했을 거 아닌가. 거기에 금덩이가 있다 생각하면 되지 않겠나?
어리석음이란 자기만족에 겨워 사는 일이다. 나는 어떻게 선한 자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정직한 자가 될 수 있을까? 참 두려움을 아는 일이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눅 12:5).” 경외함이란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갈망하는 것이다. 마치 아침 해가 돋을 때, 엄청난 폭포 밑에 섰을 때,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경탄이다. 아! 하는 외마디 경배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그에게 가르치시리로다(시 25:12).” 주가 나를 주관하여 주시기를. 나를 붙드심으로 내가 요동치 않게 하시고, 흩어짐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택하신 길을 가르치실 것을.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34:9).”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0) | 2017.06.08 |
---|---|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0) | 2017.06.07 |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0) | 2017.06.05 |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0) | 2017.06.04 |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0) | 2017.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