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
전도서 5:3, 5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편 124:8
‘죄성 지수’ 검사를 통해 나의 교만이 또 시기가 높다는 것을 알겠다. 누가 볼까봐 소심하게 체크하였다. 아직 내용을 충분히 숙지한 게 아니어서 뭐라 설명할 수는 없으나, 그럴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베커스의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를 극복하는 비결>을 읽으면서 말이다. 내 안에 이는 감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깨우침과 함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변명도 늘 같이 움직였다. 그러니 왜 나는 순수하고 단순하지 못한 것일까?
아이가 다 늦어서야 예배에 왔다. 천안에서 무려 3시간이 걸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같이 점심을 먹고 또 다시 천안으로 돌아가는데 그만큼의 시간이 걸려야 할 거였다. 신기할 정도로 기특하면서도 뭘 여기까지 오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괜히 미안하고 고마웠다. 애써 왔으면 좀 더 있다 갔으면 좋겠는데, 서둘러 돌아가는 데서 서운하였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리감이 들었다. 그냥 그러려니 해도 될 일인데, 자꾸 뭔가 좀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앞서서일까? 여러 감정이 동시에 생겨나는 데는 나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자유함에 대해 욕심이 생겼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6).” 그런데 왜 늘 내 안에는 숱한 생각이 같이 엉켜있는 것일까? 기특하면 그냥 고맙고 감사하면 될 일인데, 감사만 했으면 좋겠는 자리에 동시에 서운함이 또한 불만이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봐도 늘 골난 사람처럼 군다. 뚱하니 혼자 있을 땐 서러움마저 들면서 말이다.
딸애는 시험공부를 하였고, 아내는 아이들 가르칠 수학문제를 풀었다. 나는 누워서 책을 들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자유를 사모한다는 건 자유하지 못하다는 소린데, 머리로 알겠다고 하는 말씀을 가슴으로 느끼기까지 그 거리가 불가근불가원인가? 그러니 가슴으로 느끼는 것으로 삶으로 사는 데는 그저 묘연한 일이기만 한 것인가 말이다.
뭔가 여기까지 온 아이를 좀 더 재미나게 해줘야 한다는 이상한 조바심이 내 안에 있다. 혹은 말씀을 전하면서도 듣는 이들의 자세를 살펴 알 수 없는 어정쩡함이 들었다. 결론은 내가 주 앞에서 온전하지 못하여서일 건데, 누굴 보고 또는 무엇을 앞서 기대하는 마음 때문일까? 어떻게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괴리감이 나를 엄습하였다. 그래서 가끔은 터무니없지만 황당한 은사를 바라기도 한다. 뭔가 좀 신비한, 초능력의 하나같은…. 나도 안다.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상상인지 말이다.
이처럼 내 안에 이는 어떤 조바심이 결코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도 말이다. 내가 나서서 뭘 좀 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러지 못하는 데 따른 자괴감이 나를 쥐고 흔드는 것을 잘 안다. 이보다 더 큰 교만이 없을 거란 생각도 든다. 결국 내가 좀 알아서 하고 싶다는 소리다. 하나님을 못 믿겠다는, 혹은 너무 더딘 것 같다는 불만이 있어서다. 지난 주에 성경공부를 할 때 아이가 ‘이제 그만 교회를 다닐까 한다’는 객쩍은 소리를 해서 그런가? 은연중에 자꾸 아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 주만 바란다는 건 어쩌면 터무니없는 기적이다. 그렇게 바라고 설교도 하고 내가 구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데서 좌절한다. 어찌 주만 바라고 살 수 있을까? 돈도 있어야 하고 어떤 보람도 성과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정말 이러고 있는 게 맞나? 혹시 여기서 그대로 안주하려는 나의 무의식이 이것을 주의 뜻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럼 대체 내가 뭘 해야 하는 것이지? 아이를 배웅하면서 어떤 서운함이 또는 안타까움이 내 목을 조이는 것처럼 불안하였다.
내 안에 이는 열망이 나를 삼키지 않게 하소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아이들이 그 먼 데서 여기까지 온 것에 비해 내가 우리 교회가 너무 해주는 게 없는 것 같은, 불안 같은. 내 안의 만족이 나를 삼키는 것은 아닐까? “이르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왕하 10:16).”
내가 어떻게, 뭘, 해야 한다는 열심에 대한 당위가 나를 병들게 하는 거였다. 정작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어떤 불안,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내 안에 있는 건 아닐까? 고단한 몸으로 그저 쩔쩔매는 사람이면서 자꾸 뭔가를 해야 한다는 꿈이, 말이 생겨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탁구 칠래? 당구 칠까? 아이스크림 줄까? 커피 마실래? 나는 졸졸거리며 아이 뒤에서 뭔가 환심을 사려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다 아이가 돌아가고 맥이 탁, 풀리는 것이다.
나는 오늘 말씀이 그렇게 들린다.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기고 말이 많으면 우매한 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 그렇구나. 내가 자꾸 걱정을 한다. 아이들이 안 나오면 어쩌지? 이대로 몸이 안 좋아서 더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 어쩌지? 아내와 딸애도 나를 성가셔하고 부담스러워할지 몰라. 걱정이 많으면 꿈이 생긴다. 현실을 묵묵히 딛고 서기보다 더 나은 무엇을 상상함으로 바란다. 불안은 말을 지어내고 안 해도 될 말은 우매자의 소리와 같다.
결국 “꿈이 많으면 헛된 일들이 많아지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지니라(전 5:3, 5).” 이 무슨 고객만족 차원의 일도 아니고 전전긍긍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느라 정작 하나님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다. 그렇게 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면 늘어져서 아무 것도 하기 싫다. 생각하는 일조차 버거워서 가수면상태로 빈둥거리다 잠에 빠졌다. 해결방법은 주를 경외하는 일뿐인데, 주만 바라고 신뢰한다는 일이 내 의지와 수고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가 보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1).”
그게 나일 수도 있겠다. 주를 바라며 말씀을 듣는 일과 우매한 자의 자리에 빠지는 일이 동시에도 일어날 수 있는 거였다. 말씀 앞에서 그와 같은 나의 마음이 결코 선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아이들을 생각하는 것도, 옳은 방향의 마음이 아닌 것도 알겠다. 그저 나의 조바심이었고 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어찌해서 내가 보람을 느끼고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려는 거였다.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네 발을 삼갈지어다.’
내가 사용하는 신발과 내가 딛고 서는 힘과 내가 주도하는, 발을 삼갈지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다 맡길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묘연한 것일까? 도저히 불가능한 일일까? 아,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 나는 자유함을 원하는데 내 안의 감사는 평안은 기쁨은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그러니까 내 안에 이는 여전한 불안과 초조는 불신앙의 것이다. 아이들을 향한 온전한 주의 사랑을 훼방하고 막무가내로 불만족을 들이대는 꼴이다. 저들을 향한 안타까움이나 안쓰러움은 실제 그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내 안에 늘 허기지는 자기만족에 의한 것이겠다. 뻔뻔하게도 그걸 나는 주의 사랑으로 둔갑시켜 나의 영혼까지 회유하려 드는 것이다.
그러니 가장 서운한 대상은 아내와 딸이고, 나는 자주 저들에게 골난 사람처럼 구는 것이다. 어떻게 나를 몰라줄 수 있어? 하는 억하심정 같은 게 말이다. 아, 언제쯤 철이 들려나? 과연 나는 내 생애에 의연해질 수나 있을까? 주께서 주시는 참 자유는 그저 묘연한 것일까? 막연하여서 괜한 꿈으로나 꾸고 마는 건 아닐까? 일장춘몽처럼 저 혼자 그러다마는 건 아닐까? 꾸밈없이 담대하게, 간단하게 거침없이 주를 바라며 의지할 수는 없는 일일까?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나의 죄책으로부터의 자유, 비난으로부터의 자유, 당위에 따른 의무감으로부터의 자유, 심지어는 한 영혼으로부터의 자유, 주는 내게 자유를 주셨다고 하는데 나는 어째서 자유하지 못한 것일까? 정말이지 나의 책임까지도 주께 맡기고 살 수는 없는 일일까? 그렇다고 그 책임을 다하지도 못하면서 책임을 운운하는 책임 따위로 시달리고 있으니.
아, 나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면.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시 124:7).”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 5:2).” 가만히 입을 다물고 주를 생각한다. 내게 향하신 주의 극진하신 사랑을 묵상한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 주가 아니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사람들이 우리를 치러 일어날 때에
여호와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라면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우리에게 맹렬하여
우리를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물이 우리를 휩쓸며
시내가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며
그 때에 넘치는 물이
우리 영혼을 삼켰을 것이라 할 것이로다
우리를 내주어 그들의 이에 씹히지 아니하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시 124:2-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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