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
전도서 7:3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그래서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4).” 하시는 거였구나. 그러니까 웃자고 드는 세상에서 자못 진지하게 또한 신중하게 살아야 하는 까닭이 있었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하는 것이 마음에 유익하기 때문이니라(3).” 곧 사는 게 고단해서도 그렇지만 믿는 자로 사는 게 믿지 않는 자로 사는 세상에서 훨씬 더 바보 같기 때문이겠다. 왜 저러고 있나, 싶게. 때론 한심하기 짝이 없는. 그러니 한국에서 목사로 사는 중에 가장 흔하게 무너지는 게 돈 때문이라는 연구 결과를 읽었다.
목사로 살면서 남들처럼 살길 바라는 까닭이겠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지만 구원에 이른 것 외에 남은 행복의 척도를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 말씀에서는 괴리감마저 드는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대뜸 한다는 소리가 청승 떠는 것 같고, 그럴 거 뭐 있나 싶은 것이다.
이솝의 <수전노 이야기>에서처럼 자기만족의 금덩어리가 없으면 사는 즐거움이 없는 듯하다. 수전노의 뜻이 ‘갈고리 발톱’이란다. 움켜쥐기에 용이한 것으로 아귀다툼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재물이 있는 데 마음이 있다고 하셨구나.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그러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35).” 그렇지 않으면 언제 사로잡힐지 또 사로잡을지, 그래서 놓여나지 못할지 혹은 놓지 못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럴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 그러니 이 또한 어디 내 의지와 노력으로 가능한 일인가? 돈이 궁한데 어찌 감사가 나올까? 그럼 어느 정도 있어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데 유용할까?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 달리고 비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그것으로 주를 욕되게 하지 않게 하는 정도이다. 수전노처럼 쓰지 않고 남 몰래 가지고 있는 게 죄다. 넘침으로 거기서 자기가 만족을 누리는 게 죄다.
자동차가 차의 용도를 벗어난 것, 집이 집의 활용도 그 이상일 때, 가방이 가방의 쓰임보다 값이 더할 때, 옷이 옷의 수준 이상일 때… 그것을 남모르게 낡은 담벼락 밑에 숨기고 자기만족에 겨워 사는 자들은 모두 ‘갈고리 발톱’을 숨긴 탐욕주의자들이다. 이에 양심이 호소하는 까닭에 구제하고, 선을 구하며 이로써 자기 값을 다했다고 여기는 마음이 문제였다. 저의 숨겨진 낡은 담벼락이었다. 별 거 아닌 듯 가장하고 실은 그 아래 구덩이를 판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가진 의미도 그 속이 깊은데, 오랜 세월 숱한 사람이 삶으로 살아서 깨달은 바를 함축하고 있어서이겠다. 지혜자는 말한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께서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전 7:13).”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18).” 곧 “내가 깨달은 것은 오직 이것이라 곧 하나님은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이 많은 꾀들을 낸 것이니라(29).”
그러므로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14).” 주의 전능하심 앞에 경외함으로 온전히 한 날의 삶을 살아드리는 데 있었다. 날씨 탓에 여느 날보다 몸이 어려웠다. 오후께 아내와 영화라도 한 편 보러가자고 했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오는 동안 외레 아내에게 미안하였다. 조금은 우울하였고 조금은 멀쩡하였다. 슬픈 것 같다가도 못내 아쉬움 같기도 한….
존 파이퍼 목사의 <돈, 섹스 그리고 권력>이란 책을 주문하였다. 베커스의 책을 이어서 보고 싶었는데 너무 비쌌다. 여느 날과 같이 글방으로 올라가 책을 읽었다. 휴일이라 길거리에 차들이 많았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비가 내렸다. 사위가 어두워진 글방은 고즈넉하였다. 문득 감사하였다가 돌연 슬퍼지기도 하였다. 마음은 저 혼자 들내는 것이니까 일일이 거들 필요는 없었다. 다만 허리가 아파서 눕지도 앉지도 못해 조금 슬펐다. 어쩌겠나. 우울하면 우울한대로 슬프면 슬픈 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21).” 일일이 귀 기울일 거 없다. 그러느라 내 마음이 나를 쥐고 흔들 거니까. ‘나태와 슬픔’에 대해 읽었다. 나태는 헬라어로 하면 축소하다, 참여하기를 주저하다는 뜻을 갖는다. 라틴어로는 ‘슬픔’ 또는 ‘느리게’를 품으면서 ‘슬픔에 빠지다’는 뜻이다. 허리를 흔들며 책을 읽었다. 밑줄을 긋고 그 의미를 살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나태를 ‘영적인 선한 얼굴의 슬픔’이라고 명명했다.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얼굴’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활기 없는, 공연히 하나님에 대해 슬퍼하는 자가 나태한 것이다. 마음의 권태다. 자기비하에 빠진 사람. 진리에 의존하지 않으려 하는 일. 그럼 진리란 무얼까? 마음이 온유한 것, 겸손으로 무장하고 사는 일, 순종의 실천이 가능한 것. 이와 같은 진리에서 벗어났을 때 주변에 있는 누구를, 가까운 이를 혐오한다. 증오함으로 자신의 무력감을 저에게 돌린다. 너 때문이다. 노력을 회피할 빌미가 된다. 죄악 된 습관이다.
내 안에 이는 어떤 슬픔을 노려볼 수 있었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할 때 사람은 슬픔의 지배를 받는다. 아니면 스스로 나서서 쾌락의 향연에 자신을 불사르던지. 유명한 가수 아이가 대마를 했던가보다. 수사를 받고 언론에 노출되자 약을 먹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데… 정말이지 한순간의 일이다. 아무리 난다 긴다 하며 사는 위인이라도 슬픔에 노출된 영혼은 삽시간이다. 지탱하던 것이 갈대지팡이였다.
겅중거리듯 책을 읽다가, 어느 기사를 살피다가, 몸을 건사하다가, 한 것도 없이 또 하루가 갔다. 딸애 방에 들어가 낮잠이 든 아내가 안쓰러웠다. 어려운 마음일 때 말씀은 어김없이 붙드신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주께서 나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지 않으시면, 결코 남 얘기가 아니다.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없어서 두렵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어떠하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슬픈 때는 기도하고 기쁠 때는 찬송하는 게 지혜다. 그러므로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주가 인도하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41:10).”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이 아니고는 어찌 살까? 그리하여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기다리나이다(시 25:4-5).”
내친김에 좀 더 말씀을 찾아보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저가 말씀하신다. “내 아들아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받으며 나의 계명을 네게 간직하며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2:1-6).”
그러면,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거리로 삼을지어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시 37:3-6).” 주가 내게 행하신 일을 묵상할 거였다. 그것을 내 믿음의 분량으로 받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2-3).”
그러므로 족하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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