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원고]

잠언 19:2 / 지식 없는 소원

전봉석 2017. 6. 23. 14:15

20170625 주일

 

잠언 19:2

지식 없는 소원

 

19:2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들어가는 말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언젠가 “사람이 자기를 위하여 경배하려고 만들었던 은 우상과 금 우상을 그 날에 두더지와 박쥐에게 던지고 암혈과 험악한 바위 틈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땅을 진동시키려고 일어나실 때에 그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하리라(사 2:20-21).” 스스로 의지할 것을 잘 세워두고 살아온 것 같지만,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22).” 길어야 한 세상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이미 우리에게 주신 바 우린 그와 같은 ‘지식 있는 소원’을 가진 자들이다. 곧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23).” 한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지식 없는 소원’이 왜 선하지 못한지, 그로 인해 발이 급한 사람은 왜 잘못 가게 돼 있는지를 알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그 지식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지, 이를 두고 세상은 얼마나 요지경인지, 그 실태를 바로 알기를 원하신다.

  

  

세상은 요지경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잠 19:10).”

 

미련하다는 것은 어리석고 둔하다는 것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는 것이고, 그럼 슬기롭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바로 알고 분별하여 일을 처리하는 지식이 있다는 것이다. 잠언은 우리에게 이를 알게 하려 말씀 가운데 지식이 있음을 일깨우신다. 이어 미련한 자는 멸망한다는 것과 “눈짓하는 자는 근심을 끼치고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느니라(10:10).” 왜 그런지를, 저는 지혜를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계명을 받거니와 입이 미련한 자는 멸망하리라(8).”

 

곧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 사치란 분수에 지나치게 행사하고 꾸미는 씀씀이를 말한다. 물질은 물론 마음을 쓰는 일에서도 필요 이상의 마음을 쏟는 것도 같은 의미다. 걱정과 근심이 이에서 나오고 우울과 자괴감도 여기에 들어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세상에서 이런 자들이 잘 사는 것 같다. 시편 73편은 이를 묵상하게 하신다. 우린 그런 자들을 볼 때 의아해하고 낙심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2-3).”

 

이에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잠 26:1).”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지,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시 73:4-9).” 그러니 더러 부러울 수밖에. 그게 옳은 것 같기도 하고.

 

새삼 무슨 지식을 갈구하며 주 앞에 설까?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 종이 그 지위를 이용한들 종인데 저가 방백을 다스린다니.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10-11).”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돈이 곧 힘이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 19:7).” 그러니 악착같이 돈을 벌고, 억울하면 출세하려고 들지, 별 수 있나?

  

  

지식을 자라가게 하라


“너는 권고를 들으며 훈계를 받으라 그리하면 네가 필경은 지혜롭게 되리라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0-21).”

 

오늘 지혜자는 말한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27).” 그래서 권고를 듣고 훈계를 받으라고 한다. 권고란 무엇을 하게 권하여 이를 따르게 하는 일이다. 한데 나이가 든다는 건 누가 내게 무어라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언제부턴가 따끔하게 훈계하는 사람이 없다. 돌이켜 나이 든다는 건 누구의 말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자기 고집이 강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죽기 전까지 권고를 들어야 한다. 훈계를 받아야 한다. 이는 자라기를 멈추지 않기 위해서다. 배워야 한다. 공부해서 이를 삶에 적용해야 한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이는 마치 자전거타기와 같아서 멈출 때는 그만 쓰러지게 돼 있다. 기력이 다하는 날까지 페달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늙어서 고집부리는 것도 문제지만 어려서 자라기를 거부하는 일도 문제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이에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전 14:20).”

  

  

가난한 자와 부자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미련한 자가 사치하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종이 방백을 다스림이랴(잠 19:7, 10).”

 

자고로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눅 12:34).” 잘 모르겠다 싶으면, 요즘 무슨 생각을 하고 누구와 잘 어울리며 어떤 일에 열심인지, 관심이 무엇이고 나를 쥐고 흔드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살피면 안다. 입만 열면 나오는 소리가 지금의 나다. 저절로 눈이 가는 게 나의 수준이다. 누구도 가난한 자에게 마음을 두지 않는다. 내게 이익이 되는 쪽에 선다. 몸이 원하고 마음이 바라는 일을 구사하려 든다. 그래놓고는 본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항변한다. “사람이 미련하므로 자기 길을 굽게 하고 마음으로 여호와를 원망하느니라(잠 19:3).”

 

답답한 노릇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어? 하는 마음의 저변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를 꿰차고 내어놓기 싫은 것이다. 자기주도적인 삶을 요구하는 시대에 ‘자기행복추구권’을 방어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한 번뿐인 인생이다. 마음이 원하는 걸 해! 세상의 부추김은 가히 공격적이다. 왜 나만 가난한 자를 돌아보아야 하나?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5).” 왜 꼭 부자를 콕, 집어서 말씀하신 것일까?

 

여기서 부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가진 돈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많이 원하고 더 벌려고 돈돈거린다. 저의 주인은 따로 있다. 자신을 위해 고급 세단을 몰고 호화로운 저택에 살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부러움을 사려는 데 기를 쓰면서,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사 5:8).” 저는 끝내 권고를 듣지 않는다. 훈계를 받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 상대적으로 가난한 자는 무방한가? 저도 다를 게 없는 것은 자신이 돈이 없다는 이유로 불행해하는 자이면 다를 바 없다.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고 자기연민에 빠진 자는 부자의 교만함과 다르지 않다. 저들은 알지 못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잠 19:23).” 족한 줄 안다는 것은 주를 경외하는 자의 기본적인 증거다.

    

 

자족의 비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23, 27).”

 

부자는 그의 부함을 주께서 맡기신 것이고, 가난한 자는 그의 가난을 주께서 맡기신 것이다. 건강한 자는 그의 건강을, 병약한 자는 그의 연약함을, 주께서 그리 두신 것이다. 이를 바로 아는 것이 지식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결코 궁핍함이 좋을 리 없다. 육신의 고통이 감사할 일도 아니다. 아픈 건 아픈 거고, 배고픈 건 배고픈 거다. 이를 억지로 꾸며 위선을 떨자는 소리가 아니라, 주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게 복이다. 예수님은 ‘부자와 나사로’를 통해 말씀하셨다(눌 16:19-31). 부자는 결코 모를 리 없다. 자기 집 앞에 거지 나사로가 있었다. 부자의 특징은 무관심이다. 저는 자기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정도를 기부로 또 선을 행함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자신은 수억 원의 차를 몰면서 어느 고아원엘 다녀오고, 수천만 원의 외투를 걸치고 한 끼 식사로 수백만 원을 쓰면서 사회에 얼마 환원하는 것으로 우쭐해한다면… 뭐라 할 말이 없다.

 

참 가난한 자란(혹은 부자란) 어떤 것일까?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생이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듯 보이나, 맡기신 바 그 주어진 생을 다한 자였다.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움’이란 뜻이다. 저는 가난하여서 천국에 간 게 아니고, 저는 부자여서 지옥에 간 게 아니다.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와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부자’로 사는 것.

  

  

나오는 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제한하여 부를 축적하는 데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하여 스스로 가난을 모면하려 불만을 품는 것도 마찬가지다. 부자는 교만을 무기로 삼고 가난한 자는 자기연민을 무기로 삼는다면 이는 다르지 않다.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잠 19:15).” 영적으로 게으름이란 부자로 또는 가난한 자로 스스로 자고하는 자이다. 저들은 권고를 듣지 않고 훈계를 받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2).”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선명해진다. “내 아들아 지식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는 교훈을 듣지 말지니라(27).” 그러자면 어찌해야 할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만이 가능하다. 왜 사는 날 동안 염려와 근심이 없을 수는 없는 것일까? 사람으로 사는 동안, 육신을 입고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럼 어떤 방법이 없을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그러므로 성령이 나를 주도하시고 인도하여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자.

 

곧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와 같은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그리하여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지식 없는 소원은 결코 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자. 발이 급한 자는 잘못 행하게 돼 있다. 묵묵히 주어진 삶에서, 무던함으로 주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