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04 주일
잠언 17:24
지혜의 자리
17:24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
들어가는 말
왜들 이렇게 두리번거리는 걸까? 쉬 이 말에 귀를 기울였다가 저 말에서 실망하고, 저 말에 이끌렸다가 이 말에서 걸려 넘어지기 일쑤다. 누군 그리스도인으로서 문신을 해도 되느냐 마느냐를 놓고 고민한다. 누군 죽은 자를 화장하느냐 매장하느냐를 놓고 씨름하고, 누군 또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교회에 바치는 게 맞느냐 그르냐를 따진다. 동성애를 지지해야 옳는지, 사형제를 반대해야 하는지, 죽어서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 가족은 여전한지, 부모자식 간은 어찌 되며 부부사이 또 어떻게 되는지를 두고 설왕설래 말이 많다.
기준이 분명하지 않을 때 흔들림은 요란할 수밖에 없다. 무엇으로 기준을 삼느냐 하는 것인데, 나는 오늘 ‘지혜의 자리’를 통해 우리가 두어야 할 마음가짐을 검점하기 원한다. 우선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 으뜸이다. 문신을 하고 성소수자를 지지하며 더 좋은 다음 생을 꿈꾸는 일에 있어서, 그게 과연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일에 무슨 상관이 있는가 따져볼 일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 이에 필요한 일인가?
그렇다면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뜻을 어찌 구할 것인가? 이에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삼는다. 이때 말이란 말과 말 사이의 의미가 깊고, 주어와 목적어는 분명하여서 하나님 외의 다른 모든 것을 경계한다. 다들 나름의 성경을 근거로 ‘나의 하나님’을 운운하지만 정작 그 안에 감추어진 것이 있으니, 자신을 위한 하나님인지 하나님을 위한 자신인지를 눈여겨볼 것이다. 그런데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는데, 우리는 미련하여서 항상 먼 데에서 찾는 꼴이다. 미련함이란 포기하기 싫은 것이다.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건 지키고 싶고 저건 내어주기 싫다. 그러니 다 알면서도 자꾸 먼 산을 쳐다보며 지혜를 구한다.
오늘 본문은 그리하여 지혜의 자리가 어떠한지를 말해준다. 저의 가정은 어떻고 저의 사람 관계는 어떠하며 저의 말투는 어떻고 저의 생각은 어떠한지를 알려준다. 우리는 지금 지혜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지 아니면 일부러 먼 산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리느라 미련을 떨고 있는지, 도대체 문신을 해도 되나 안 되나, 화장을 할지 매장을 할지, 동성애나 사형제를 찬성할지 반대할지, 십일조를 낼지 말지, 교회를 갈지 말지… 그런 일로 씨름하고 있을 것인가? 왜 그런가 하면, 한 마디로 싫은 것이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다 내어놓는 것을 주저하는 것이다. 그러느라 고심하면서 무슨 선한 것을 보겠다고 그리 혈안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1. 지혜의 가정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7:1).” 무슨 조건이 화목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거기가 천국인 건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잠깐 동안 그것으로 즐거움을 누릴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 없는 천국보다 하나님이 계신 지옥이 더 낫다. 여기가 천국이라며 즐거워하는 이들의 말로는 끔찍하다. 환각에 취하고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오늘만 살다 그만인 인생에 대해서는 지옥도 아깝다.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시 37:16).”
저는 하나님을 모심으로 자족할 수 있는 것이다.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6-17).” 여기에는 인생 역전이 있다.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17:2).” 도구로 사용하라고 주신 걸 주인으로 모시고 살려니까 그 인생이 얼마나 고달플까?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시 111:10).”
그러므로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전 4:13).”
2. 지혜로운 마음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마치 성도로 살면, 그리스도인이 되면, 교회를 다니면 만사가 행복하고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처럼 여기는 데는 어리석음뿐이다. 그럴 거면 굳이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일이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사 48:10).” 연단없이 뛰어난 장수는 없다. 이를 아는 자는 기도한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시 26:2).”
누구는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교회를 오고, 누구는 하는 일이 좀 잘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 빌고 또 빎으로 더 나은 인생을 바라는 데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삼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나의 필요를 위해 구한다면 굳이 그이가 하나님이 아니어도 상관없는, 목각인형이든 금신상이든 오래된 나무뿌리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고로 지혜로운 마음은 시달리지 않는 게 아니라,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 하는 고백에 있다.
3. 지혜의 사람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잠 17:5).” 지혜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우선한다. 내 생각이나 내 기분에 의해 사람을 대하는 게 아니다. 내 판단과 기준을 삼는 게 아니다. 여기에 나를 두시는 까닭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인 것이다. 곧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네 가운데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습 3:12).” 저를 지으신 이가 저의 곁에 나를 두셨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얼마나 겉사람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지 모른다. 남에게 보여지는 나를 중시하며 저가 보여주는 겉치레에 끌려 사람을 대할 때가 많다.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3-4).”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미 충분하다. 자신을 속인다고 하나님까지 속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르리니 내가 들을 것이며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 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9).”
주를 바라면 바랄수록, 말씀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더 불편하고 더 괴로운 까닭은 당연하였다. 우리가 거룩한 게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주의 영이 거룩하셨다. 그러므로 주의 영을 모시고 사는 동안 우리는 끝간데없이 시달리는 것이다. 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어둠은 짙어지게 돼 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러므로 지혜의 사람은 단 한 시도 하나님 없이는, 말씀 없이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자의 언어는 다르다.
4. 지혜의 언어
“지나친 말을 하는 것도 미련한 자에게 합당하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존귀한 자에게 합당하겠느냐(잠 17:7).” 늘 돌아보아 자신의 말을 더듬는다. 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말들이 이제는 스스로에게 걸려 가시가 된다. 아프다. 자꾸 찔려서 살 수가 없다. 의인의 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특징은 뚜렷하다. 첫째, 정의를 말한다. “의인의 입은 지혜로우며 그의 혀는 정의를 말하며(시 37:30).” 둘째, 생명을 살린다.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잠 10:11).” 셋째, 사람을 교육한다.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21).”
넷째, 지혜를 낸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31).” 곧 다섯째, 기쁘게 할 것을 안다.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32).” 정의가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다. 생명의 샘은 무엇인가? 말씀이다. 그것으로 사람은 교육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 그러므로 참 지혜가 있다. 이로써 기쁨의 주체를 바로 아는 것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 8:8).”
그러므로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4:18).” 곧 우리가 천국을 바라는 까닭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도 그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시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우리는 거룩을 위해 예민한 사람들이다. 작은 시비에도 주의한다.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잠 17:14).”
5. 지혜의 수고
“미련한 자는 무지하거늘 손에 값을 가지고 지혜를 사려 함은 어찜인고(잠 17:16).” 죽었다 깨어나도 우린 우리의 수고와 애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주의 영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성령이 내 안에 거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결코 거룩을 도모할 수 없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말씀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된다. 내 의지로 수고할 때는 좌절뿐이라. 어찌 감당이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음이 가난하여진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4).” 아무리 채우고 다져도 우리의 심령은 가난을 호소할 따름이다. 주 없이는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린 애통한다. 나는 나를 어쩔 수 없다. 내가 이 인생을, 내 자녀를, 어쩔 수 없어서 말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4).” 주가 주시는 위로가 아니고는 위로는 없다. 이내 나는 온유한 자가 된다. 주만 바라는 것으로 말이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 나를 에우고 있는 땅이 넉넉하다. 그러므로 더욱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 말씀을 사모함이 그런 것이겠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 은행 잔고가 또는 자자손손의 형통함으로 배부른 게 아니다.
주의 마음으로 나는 저들을 긍휼히 대하게 된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7).” 그리하여 나를 향한 주의 긍휼하심을 받기 때문이다. 늘 더럽고 추하고 보잘것없으나 주를 바람으로 나의 마음은 청결하여진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8).” 눈여겨 가만히 있을 때 주를 보기 때문이다. 공연한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 것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9).” 나는 저들과 신분이 다르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 천국은 어김없이 내 것이다.
지혜의 수고는 이처럼 수고한 게 많은데 수고롭지 않다. 고생스러운데 고생스럽지 않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1-12).”
6. 지혜의 강건함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어찌 사람으로 사는 날 동안 근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그럴 수 있는 비결은 주의 평안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들 보험을 들고 혹시 몰라 예비비를 책정하며, 친구도 물질도 자신의 이로움을 구하는 데 소용되지만 성도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리는 자이다.
힘든데 괜찮다. 고단한데 싫지 않다. 기꺼이 눈물로 나아가 씨를 뿌린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6).” 울지 않기 위해, 눈물을 닦는 일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도 씨를 뿌리러 나간다. 곧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그러므로 마음의 즐거움은 심령의 양약인 것이다. 이에 작은 시비도 주의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
저는 그럴 수 있는 게 좋은 동행을 가졌기 때문이다.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사는 날 동안 내 곁에 좋은 동행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그러므로 스스로 벌을 자초하지 말자.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요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잠 17:19).” 반대를 위한 반대, 시비를 위한 시비를 좋아하는 무리가 있다.
나오는 말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24).” 주께서 오늘 내 곁에 두신, 영적인 나의 동지를 알아보자. 같이 믿는 가족으로 친구로 내 곁에 두신 이들에 대하여 감사하자. 그리하여 누구에게 나도 그리하자. 어떤 친구를 바라는 것과 같이 어떤 친구가 되어줄지를 생각하자.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다. 내 앞에 있고, 네 앞에 있다. 왜 저가 거기에 머무는지를 알자. 때로는 갈 바를 알지 못하겠을 때, 양 떼의 무리를 따라서 가자.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 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지니라(아 1:8).”
앞선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놓치지 말자. 나만 이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1-2).” 저들도 우리처럼 근심하고 갈등하고, 악전고투하였다. 그럴 수 있었던 게 모세니까, 다윗이니까, 바울이니까, 저는 특별하였으니까가 아니다. 저는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말씀만 의지하고 갔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11:8).” 저들도 주의 영이 함께 하지 않으셨으면 중도에 사울왕처럼 혹은 막판에 가룟인 유다처럼 제 갈 길로 갔을 것이다. 지혜의 자리에 머물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우리가 구할 것은 충성이다. 헛된 기준과 허황된 망상으로 갑론을박하지 말자. 어차피 그러는 자들은 명철한 자 앞에 있는 지혜를 한사코 외면할 것이다. 그러라 하고, 우리의 구할 것은 충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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