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전봉석 2017. 8. 22. 07:52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

이사야 63:19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시편 50:15

 

 

 

‘의문은 죽이는 것이고, 영은 살리는 것이다.’ 다급하고 급박한 상황에서 순종이 우선이지, 이를 구구하게 설명하고 동의를 구해야 할 겨를이 없다. 당장 뛰어내려! 하고 다그치는데도, 어떤 상황인지, 왜 그런지, 뭐 때문에 그래야 하는지, 납득과 동의를 구하고 있는 꼴이다. 아이와 말이 길어지면서 나는 예수님을 생각하였다. 노아의 때가 떠올랐다. 아무렇지도 않고만 왜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저들 마음에 의구심만 드는 것이다.

 

모처럼 아이의 연락을 받았다. 이런저런 일을 말하다 저가 다니는 교회가 이단이라는 걸 알았다. 처음 드는 느낌은, 어쩐지! 싶은 것이다. 아이의 열심이 또 그 마음에 충일함이 너무 과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러했다. 부랴부랴 <이단과 교회>라는 책을 뒤져보고 매형에게 전화를 해서 묻고 그곳 자료를 메일로 받았다. 아이도 그런 지탄(?)을 들어 알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일정 부분은 인정하면서 자꾸 구구한 자기변호를 이어갔다.

 

내가 아는 이단의 정의는 간단하다. 성경의 권위와 교회의 적통을 부정한다. 기존 교회와 교단의 문제를 부각시켜 자신들의 존립 이유로 삼는다. 삼위일체 논쟁, 성경무오의 논쟁,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성자 하나님 되심의 논쟁 등. 오랜 시간 숱한 믿음의 사람들이 싸우고 일궈온 교리를 훼손한다. 가장 단적으로는 성경의 한 부분을 새롭게 부각시켜 자신들의 논증으로 삼는다. 가령 치유라던가 구원의 문제, 또는 천국과 재림에 대하여, 혹은 전도사역에 초점을 맞춰 열심을 다한다. 저들은 스스로를 고립시킴으로 정예화 한다. 엘리트주의적이다. 다소 은밀하다.

 

한 번 빠지면 나오기 힘든 게 자신의 약함 때문이다. 이를 상호 보완한다. 필요에 의해 결합된 관계여서(영적으로 목말라하는 갈한 심령이 있다. 눌린 부분 또는 자신의 아집에 대하여 저들 교회가 또 교리가 만족함을 더하는 것이다.) 싫은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 사이트를 알려주고 설교를 좀 들어보라고 하였다. 어디가 왜 나쁜지, 뭐가 문제인지 말해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편의 설교 동영상을 펼쳐보았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순회 캠프(나는 그것을 여름 수련회로 이해했었다.)를 앞두고 캠프의 정당성을 성경을 근거로 설명하고 있었다. 또는 회복에 대하여, 치유에 대하여.

 

그 안에 있는 경우와 밖에서 이를 보는 경우가 엄연히 다른 것이어서 우리의 갑론을박은 끝이 없을 거였다. 급 피로감이 몰려와 아이와 카톡을 미뤄두었다. 일어나보니 장문의 내용이 들어와 있었다. 요는 납득이 되게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다. 뭐라 한들, 거기서 죽었던 이가 살아와서 증언을 한들? 부자가 애원을 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눅 16:28).” 죽었던 나사로를 보내 증언하게 해달라는 소리였다. 이에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29).”

 

그럼 어느 교회로 가요? 하는 아이의 물음이 당황스러웠다. 늘 가장 반기고, 좋아라 한다는데 한 번도 여기에 온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이사를 했으니 인사치레로라도 말이다. 나는 그 사실을 일깨웠다. 아이의 다음 말은 ‘너무 멀어서’였다. 그럼에도 거기서 여기까지 예배에 오는 애가 있다. 그럼에도 내가 아는 아이들은 다들 이래저래 다녀갔다. 마음이 먼 거냐? 거리가 먼 거냐? 물어놓고는 나의 질문이 유치하게 느껴졌다.

 

말 그대로 사탄이 득세를 한다. 여러 모양으로 어떻게든 훼방을 논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8-9).” 이 말씀을 전한 이가 베드로다. 저는 앞서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절대 자신은 그럴 리 없다고 장담했다. 죽기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라 호언했다. 한데 자신이 그리던 그림이 아닌 것이다. 멀찍이 서서 끌려가는 선생을 보았다. 충성을 다짐하던 그런 상황이 아닌 것이다.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눅 14:66).” 적당한 거리가 결국 문제였다. 전에 언제, 아이는 기억도 못하겠으나 또래 누가 왔을 때였다. 나는 그 아이에게 교회로 예배에 나올 것을 당부하고 있었다. 그때 아이는 우리 교회를 자랑한다는 말이 ‘여기는 강요를 하지 않아서 좋아.’ 하는 것이다. 내내 그 말이 마음에 남았었다. 신기하지? 하나님에 대해서는 늘 알고자 하고 갈망하는 마음인데 하나님은 싫은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바라는데 하나님은 여의치 않은 것이다.

 

그대로 살기는 싫고 그렇다고 외면할 수는 없고. 이단의 열심과 열성이 때론 살인적이다. 주말에 가끔 아내와 동네를 한 바퀴 돌다보면 더러 마주치는 청년들이 있다. 둘둘 짝지어 설문조사를 하듯 다가온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에게,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에게 다가가 뭐라 상냥함을 다한다. 처음엔 나도 무엇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연거푸 마주치게 되면서 가까이 가 들어보려는데 심히 불쾌한 듯 경계를 하는 것이다. 그때 짐작을 했다. 나누는 말과 설핏 본 몇 글자 내용을 보고 말이다.

 

참 열심이다. 은혜란 좋은 게 아냐.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당혹스럽고 때론 난처한 것이야. 마치 처녀가 잉태를 하는 것처럼 황당한 일이기도 하지. 여태 괜찮았는데, 잘 살아왔는데, 다들 괜찮다는데, 난 좋은데…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새삼스러운 게 은혜다. 다그쳐 불러 세우시는 일이다. 그리고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눅 17:32).” 뜬금없는 말씀이다. 한 술 더 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이 무슨!

 

아이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이 나는 다급하게 아이를 불러 세우시는 주의 음성으로 들렸다. 나는 연거푸 주께 물으며 하소연하였다. 어떻게 하죠? 뭐라고 하죠? 당장 등짝을 한 대 후려치고 멱살이라도 휘어잡아 끌고 오고 싶었다. 마음이 많이 어렵다. 나는 자꾸 아이를 생각하며 ‘어떻게’를 물었는데, 하나님은 내게 ‘무엇을 왜’에 대해 상고하게 하신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6-17).”

 

나는 아이를 생각하는데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신다. 내가 아이를 생각하는 게 실은 하나님을 더욱 바르게 알고 온전히 찾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이다. 그게 왜 나쁜가? 위로가 되고 위안을 얻고 그 열심을 다해 주어진 삶이, 어떤 문제가, 허기가, 공복감이 채워지는 일일 텐데! 언제 한 아이엄마가 뭐라 항변하듯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이는 모태신앙이었다. 늘 안 믿는 가정에 시집 와 안 믿는 남편으로 인해 신앙이 고달팠다. 늦게 얻은 외아들 하나가 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다 포기해도 아들애만큼은… 신앙으로 기른다고 길렀다.

 

아이가 좀 특이했다. 열심이 남달랐고 열정이 과했다. 수업 때 무슨 말을 하면 얘는 실제 그리 해보는 것이다. 가령 부익부빈익빈에 대한 주제로 글을 쓰고 뭐라 설명하며 노동자들의 생활에 대해, 그 피폐함을 말하였는데 실제 이 앤 그 지역에 있는 노동당에 당원으로 가입하였을 정도니까. 얘가 종교의 다양성을 운운하다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마음으로, 네 어머니 기도제목이 크겠구나, 하였는데… 처음엔 그렇게 반대를 하였는데 아들이 행복하다니까 됐다나?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사 63:19).” 통탄할 노릇이다. 뭐라 한들. 내가 말로 이겨낼 재간이 없다. 설득한다고 될 문제도 아니다. 말 그대로 영적전쟁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기도밖에는 내가 할 일이 없다. 너무 소극적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이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선생님이 좋은 거였고, 그래서 좋아하는 선생님이 그처럼 믿는다니까 그 하나님을 나도 믿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모르겠다. 전에 한 아이의 말이 명치끝에 걸려 한참을 쓸어내려야 했는데, 그와 유사한 이유로 우리 교회에 나오는 게 불편하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내가 혼자 속앓이를 한다고 될 문제일까?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내가 저들에게 막힌 담은 아니었는지. 그래서 나는 오란 소리도 믿으란 소리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인 것 같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나는 이 아침, 한참 머무는 말씀이 서럽다. 어떻게, 좀 내게 능력이 있어서, 저 아이들을 붙들고 싶은데. 돌이켜 주 앞에 세우고 싶은데. 오히려 내가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니. 눈물만 흐른다. 너무 미안하게도 기도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사 63:19).” 아, 주님.

 

이에 뒤이은 말씀이 나를 붙드신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주가 나를 건지심으로 주가 영화롭게 되시기를. 그런 와중에 내가 그 영화를 가로채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입을 삐쭉거리며 주만 바라본다. 뭘 어떻게? 하고 물으면, 자꾸 주님은 무엇을? 왜? 하고 되물으신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미안하고, 죄송하다.

 

시무룩하니 주 앞에 있는 내게,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아이를 품고는 내가 죽겠어서 주 앞에 토해낸다. 그렇다고 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 또한 송구함뿐이지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하지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옛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사 63:16-17).”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