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이사야 61:6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시편 48:14
잠결에도 비가 퍼붓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아이들이 또 못 오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아이의 문자 하나에도 종일 마음이 쓰여,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 그냥 두어야 할지 생각하느라 진이 빠지기도 하면서. 대관절 내가 왜 이런 데까지 신경을 쓰느라 마음이 어려운가 싶었더니,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하는 오늘 아침 말씀 앞에서, 그런 거였구나!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가끔은 아니꼽기도 한 것이다. 내가 얘한테 왜 이처럼 마음을 쓰고 얼레고 달래야 하나 싶은 것이다. 바빠서, 일이 많아서, 요즘 경황이 없어서, 하는 아이들의 대답이 공연히 채근하던 내 마음을 서럽게도 한다.
얘가 교회에 나오든 말든, 신앙생활을 바로 하든 말든, 믿음을 잃든 말든 왜 내가 이처럼 쩔쩔매야 하나 했더니 말이다. 그 마음을 주가 내 안에 넣으셨으니 나도 당최 감당이 안 되는 거였다. 누구보다 차갑고 야멸찬 사람이라, 좋을 때야 그냥 좋은 정도지 싫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리곤 하던 게 아닌가. 나름 끊고 맺음이 정확하여 특히 누구에게 짐이 된다 싶으면 먼저 이별을 고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참 차가운 사람이란 소리도 곧잘 듣곤 하였는데.
일일이 열거하여 아이들 이름을 적어놓곤 한다. 언제부턴가 인사가 되어 ‘기도할게요.’ 하는 소리가 그저 빈말이 되지 않기 위해 저의 사연을 간단히 적어 붙이기도 하였다. 그랬다가 어느 날 다 잡아 떼고 없애는데 또 보면 덕지덕지, 잊지 말아야 할 이름과 기도해야 할 사연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가 한 장 한 장 또 늘어난다. 그러고 있는 내가 신기해서 하는 소리다. 좀체 먼저 연락을 안 하는 사람인데 자꾸 마음이 쓰여 문자라도 적어 안부를 물었던 아이에게서 아주 퉁명스런 답이 오고나면 내내 서운함으로 ‘내 그럴 줄 알았다’ 서럽기도 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질감을 곱씹다보면 꼭 떠오르는 사람이 렘브란트이다. 음악도 그렇지만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사람이 꽤 비싼 값을 주고 화집을 하나 산 것도 유일무이하게 렘브란트의 것이다. 신대원을 다시 할 때 접하게 된 <탕자의 귀향>이 매우 인상적이어서 그랬는가. 연이어 어린 자녀 셋을 잃고, 아내 사스키아도 먼저 떠나보내고, 성공하는가 싶던 그의 초기작품도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가난과 좌절의 역습이 계속될 때 저는 성경을 만나게 되었고 <목동들의 경배>을 비롯해 성경 이야기를 화폭에 담기 시작하였다. 혹자는 저를 일컬어 ‘빛의 화가’라 한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르는데도 <탕자의 귀향>은 명암처리가 가히 천재적이라 할 수 있다. 돌아와 아버지 품에 안긴 아들과 이를 반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둘러선 그림자 속의 사람들 둘과 머쓱하니 서서 지켜보는 큰아들의 표정하며. 다정히 다독이는 아버지의 손은 남성과 여성의 것이 한데 어우러졌다. 왼손은 심줄이 굵은 부성의 마음을, 오른 손은 가녀린 모성의 마음을 담아낸듯하다.
‘전에’와 ‘후에’의 차이는 선명하였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사 9:1).” 과거 시점을 말해주는 ‘전에’ 어떠하였던 것이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며 ‘후에’로 일컬어질 때의 그 변모는 극과 극이다. 예수님은 성경에 응하는 삶을 사셨다.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마 4:13-14).”
가끔 내가 너무 무모하게 성경을 의존하나 싶다가도 그게 아니면 답이 없다는 데 새삼 고개를 숙인다. 성경에 응하는 삶. 그것 역시 실은 내가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여실히 느낀다. 누구에게 강요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교회를 나오게 하는 일에서부터 아이의 믿음생활에 이르기까지 내가 어찌 관여하여 변하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 어색한 표현이지만 나의 기도판에는 뭐가 자꾸 덕지덕지 사연이 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어서 말이다.
이렇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오늘 말씀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그리 하심은 주님이시지 내가 아니다. 나로 마음 쓰이게 하고, 그것으로 생각하며 주를 찾게 하시려고. 나는 이제 확신하는 것이 ‘내가 주의 일을 하려하는 게 아니라, 주께서 날 위해 일하시게 해야 한다.’ 이게 보니까, 앞에 것이 더 쉽다. 내가 주를 위해 일하는 게 주가 날 위해 일하시게 하는 것보다 말이다. 그러자면 맡겨야 하는데 미덥지가 않아서, 너무 묘연하고 막연하여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싶어서. 그러느니 내가 주를 위해 일할 테니 주께서 날 좀 돕는 정도로 해결하려 드는 것이다.
어쩌면 자꾸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 그리 조급하게 굴곤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생각하기에 지쳐 널브러져 있었다. 오랜만에 사장이 건너왔다. 바빴던 그간의 사정을 말해주고 옆 사무실 누가 나가고 들어오는 이야기를 들려주다, 내게 공부하러 오는 둘째 아들 이야기를 하다 갔다. 늘 보면 뜬금없다. 가끔은 들어주는 게 내 일이다. 전에 누가 와서는 실컷 자기 말만하다가는 묻지도 않았는데 제가 여기만 오면 고해성사를 하고 가는 것 같네요, 하고 실없이 웃었다. 그런가. 나는 무모하고 단순한 사람이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 이와 같은 말씀을 붙든다.
아이에게 답을 하기는 ‘바빠서 여기까지 오기 힘들 땐 가까운 예배당을 찾아서 주일을 꼭 지키도록 해’ 하였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나는 항상 단순한 이 진리 앞에서 아버지 품에 안긴 탕자를 생각한다. 누구보다 그게 나였기 때문이다.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고 지쳤을 때, 주님! 하고 부른 나의 외마디 비명이 오늘에까지 나를 인도하신 게 아니던가. 성경의 논리는 간단하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14).”
오늘에 내가 목사로, 또 우리 교회가 보잘것없으나 여기에 교회로 있는 까닭이었다. 존재만으로 이미 복음이 되는 삶이었다. 곧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15).” 그저 저의 말을 들어주기만 하는 날이 거듭된다 해도, 저가 그처럼 찾아와서 미주알고주알 묻지도 않은 말을 두서없이 하다가는 것이 어찌 내 의지에 따른 것이던가.
또 누가 와서 갑자기 서둘러 휑하니 돌아가는 사장을 뒤로 하고 드는 마음이 뭐냐? 싶다가도 그러라고 토요일 오후 내내 거기에 두셨던 거였구나, 짐작하였다. 내가 오란다고 올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아이를 오게 하려고 아이들의 흥미를 끌만한 무엇을 도모하는 일이 여의치도 않고. 그러느라 드는 마음보다 무던히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주께서 일하시게 하는 것이겠거니…. 램브란트가 램브란트이기까지 저의 지난한 고난의 삶을 어찌 말로다 설명할 수 있을까.
새삼 나의 어정쩡한 기도판이 또 누구의 이름으로 덕지덕지 채워진 것을 보고 생각하였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 1:16).” 그러고 있는 게 내 일이었다. 한심하고 처량하고 또는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시간이지만, 그래서 기도를 한다. 누구 이름을 적는다. 그의 사연을 생각한다. 그러게요, 하고 주님께 맞장구를 치듯 주님의 생각을 좇는다. 저는 그저 이만큼뿐인 것을, 할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주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할 때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히 11:7).” 아멘. 오늘의 내 일이 너무 보잘것없고 한심하기 그지없지만, 그래서 문득 기도판을 도로 채운 이름들이 또 그 사연이 전혀 쓸모가 없는 듯하지만, 나의 생각이 또 기도가 주를 일하시게 하는 자리인 것을. 내가 주의 일을 한다고 나서는 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게 하는 자리가 더 값지고 소중하다는 걸.
때론 몸서리치게 외롭고 답답하고 죽을 것처럼 쓸쓸한 일이기는 해도, 그래서 성경을 알게 되고 그 이야기를 화폭으로 옮기게 된 램블란트나 끊임없이 드는 우울감과 자살충동에 시달리면서 저가 할 수 있는 게 주를 바라는 일밖에 없었던 윌리엄 쿠퍼의 찬송처럼. <샘물과 같은 보혈은>(새찬송가 258) 날마다 매순간에 성령이 일하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윌리엄 쿠퍼는 69세를 살며 67편의 찬송시를 남겼다.
저의 시 어느 대목을 적어두었다.
...
두려워하는 성도여
새 용기를 가질지니
짙은 구름을 깨뜨리는 큰 긍휼로
네 머리를 두르시는도다
불완전한 감각으로
주를 판단하지 말라
그분의 은혜를 신뢰할지니
엄숙한 섭리 뒤에
미소 짓는 얼굴을 숨기시는도다
그분의 목적은 곧 열매를 맺을지니
매순간 이를 펼쳐 보이시는도다
그 싹은 비록 쓴 맛을 지닐지라도
그 꽃은 달콤하기만 하다네
맹목의 불신으로 그분을 잘못 판단하고
그분의 사역을 덧없이 탓하는 우리여도
하나님은 자신의 해석자
마침내 그분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하실지로다
어디 메모해둔 것이라 정확한 제목도 출처도 모른다. 다만 그 옆에 같이 적어둔 스가랴 13장 1절의 말씀이 저의 시를 해석하시는 것 같다.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여기에 오늘 말씀을 더해본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사 61:6).”
아,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시 48:1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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