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 64:6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편 51:10
8월의 가을하늘이었다. 눈이 부셔 저 멀리까지 바라볼 수 없는데도 한참을 창가에 서있곤 하였다. 마음이 어지러워서였을까, 투명한 파란하늘 끝을 찾아 시선을 두고 싶었다. 다들 참, 누구라고 할 거 없이 다들 자기 곤조대로 산다. 누군들 그 자신의 곤조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일에 있어서도, 다만 자신의 필요에 따른 것은 아닐까? 생각은 저 혼자 파란하늘을 휘젓곤 하였다. 누구를 겨누어 말을 열거할 것도 없다.
기껏 약속의 땅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반 지파가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이유여서,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어린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이 땅의 원주민이 있으므로 우리 어린 아이들을 그 견고한 성읍에 거주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서 가”겠다는 것이다(민 32:16-17). 그리하여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홉 지파와 반쪽 만이었다.
“이는 르우벤 자손의 지파와 갓 자손의 지파가 함께 그들의 조상의 가문에 따라 그들의 기업을 받을 것이며 므낫세의 반쪽도 기업을 받았음이니라(34:14).”
아침에 성경을 읽다 생각이 무거워졌다. 사흘 길이면 갈 걸 사십 년이 걸려 당도한 땅 앞에서 또 주춤거려 먼저 구하게 되는 게 자기들 곤조에 따른 것이라니. 자신들의 가축과 어린 자녀들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 누군 안 그렇겠나만. 자기들 아집에 따른 판단이 단순히 자신의 문제로 그치는 게 아니라는 데 두려움이 느껴졌다.
아이에게서는 답이 없자 나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아내는 전날에 장모에게 뭐라 한 것 때문에 마음이 걸려 내내 생각을 두고 있었다. 노인들을 상대로 무슨 치료를 하고 건강식을 파는 따위의 장사가 어제오늘 이야기도 아닌데, 물건이야 그렇다 해도 먹는 것은 더욱 주의할 거여서 아내는 자꾸 성화를 부리는 거였다. 아들 내외 모르게 그러고 끌려가는 일이니 저들의 상술에 우리가 어찌 대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한 노인 고집을 누가 꺾을 수 있을까? 애는 애여서 곤조통을 부리고 늙어서는 어른이 되었으니 또 그 고집이 장난이 아니다.
그러니 그 근원에는 자기애가 뚜렷한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을 위하여’ 하는 단서를 달지만 보면 그게 자기만족인 경우다. 어느 것도 아닌 게 없다. 개중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을 으뜸으로 치는데 것도 보면 다 자기고집이 동원된 마음일 때가 많다. 희생을 운운하지만 실은 자신이 좋아서, 그러고 싶어서 한 일일 경우가 허다하다.
중2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특히 부모 이야기가 나오면 하나 같이 입을 삐쭉거리기 일쑤다. 할 말이 많은데, 은연중에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이라 어찌 말로는 할 수 없고. 가끔 아이의 글에 삐져나온 부모 이야기로 나는 가늠해볼 따름이다. 늘 활달하고 유쾌한 아이어서 몰랐는데, 어릴 적 엄마가 우울증을 앓았고, 그 기간 자신을 방치한 데 대해 소상히 기억하고 있었다. 별일도 아닌데 트집이 잡히면 며칠씩 시달림을 당하는 바람에 견딜 수 없었다는. 그때마다 엄마의 말과 태도에는 ‘이것이 다 널 위해서’라는 단서였다.
같이 있는 아이가 있어 뭐라 묻고 싶은 걸 참았다. 더러는 글로 읽고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주는 게 상책이기도 하다. 그저 글에 대해서만 몇 마디하고 있는데 아이는 ‘선생님도 안다’는 뜻의 눈길을 주어 다행이었다. 폭력은 곤조통에서 어떤 무기를 꺼내드느냐에 달렸다. 간섭과 참견을 사랑이라는 무기로 둔갑시키거나 희생을 헌신이라는 무기로 들어 올리면 뭐라 할 말이 없어진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생각은 저 혼자 덩그러니 떠 있는 구름 같아서 때로는 뻘쭘하기만 하다. 버려두자니 시선에 밟히고 모아두자니 내 마음이 모자라다. 아이에 대한 생각은 찝찝함으로 남아 부유물처럼 마음에 떠있었다. 가라앉았다가도 금세 또 휘저으면 주체할 길이 없었다. 놓아두자. 하나님 앞에 내어놓자. 다스려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으니 나는 그저 한숨만 깊어졌다. 어쩜 이렇듯 우리 사람은 이럴까?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주 앞에 저절로 통회하는 심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기도밖에는 달리 더 좋은 수가 있을까? 한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니이다(사 64:7).”
주가 붙드시지 않으면 어느 인생도 자신의 곤조통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구나. 그렇다면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원수들이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이방 나라들로 주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1-2).” 주가 다스리지 않으시면, 누구라도 먼저 자신의 가축을 돌보고 어린 자식을 위하여 주의 의를 저버리지 않겠나. 급여가 줄었다고 당장에 헌금을 줄이면서도 누리고 사는 데는 거침이 없는 법이다.
당장에 거두어야 할 가축과 돌보아야 하는 어린 자녀가 있지 않은가. 내 마음이 우선인 것이고 나의 판단과 기력이 분명한데 누군들 말씀 앞에 우선할 수 있을까. 아내와 점심을 먹으며 우스갯소리처럼 우린 다짐을 했다. 천만금을 얻는다 해도 돈벌이에 연연하지 말고, 건강에 아무리 좋다 해도 걸신들려가며 늙지는 말자. 죽을 병 앞에서 히스기야 왕의 기도 응답을 누구는 복으로 여기지만 나는 그리 여겨지지 않는다. 저가 그때 낳은 므낫세 왕이 이사야를 톱으로 썰어 죽인 잔인하기 그지없는 인물이 되었다. 주신대로 살자. 생긴대로 살자. 누구와 견줄 거 없다. 하나님만 바라자.
혼잣말처럼 주절거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 다른 방법이 내게는 없다. 이 길이 맞나? 얼마나 더 가야 할까? 그래서 흔히 인생을 사막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는가보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하는 대목이 기억난다. 늘 늦는 아이는 또 늦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어 늦겠다고 하더니 오지 않았다. 궁싯거리며 뭐라 하면 네, 하는 법이 없는 아이는 어김없이 궁싯거리다 원고를 다 채우지 못하고 갔다.
어쩌겠나. 생긴대로 사는 것이다. 별 수 없다. 누가 뭐라 말해줘도, 어떤 엄청난 일이 터졌다 해도, 누군 또 그래서 그 생각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또 회고록을 냈고 저마다 자신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뭐라 말하는 데 치를 떨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는 결국 자신만 모르는 것이다. 이에 진노로 대신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어쩔 수 없이 주의 진노밖에는 답이 없을 때가 있다. 이에 그 진노가 잔인하기만 한 것이 아닌 것은,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3-5).” 살리시기 위해 죽이시는 주의 사랑이었다.
우린 도대체 성한 곳이 없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6).” 그리하여 우리를 찢으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이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호 6:1).” 아니면 어쩔 것인가? 남은 생이 얼마 아닌데 뭐 그렇게 몸에 좋은 걸 찾아 기웃거리는 인생인지. 모래 위에 쌓은 재산을 뭐 그처럼 애지중지하는지.
허물어지고 깨지는 게 복이었다. 죽지 않으면 썩는다. 죽으면 새싹이 돋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죽어야 사는 역설적인 성경의 원리 앞에서 나는 나의 어쩔 수 없음을 주 앞에 고한다.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2-4).”
다윗의 절규하는 심정으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7).” 누구더러 뭐라 하려는 말이 아니라, 나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주께 고하는 일이다. 아,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8).” 그리하여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9).” 우리의 허물과 실수를 주가 아시오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사 1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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