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전봉석 2017. 8. 21. 07:31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이사야 62:4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자꾸 참견을 한다. 말쟁이 같다. 자기 말만 하려 하고, 뭐라 하면 남을 가르치려고만 든다. 충분히 남의 말을 먼저 들으라고 해도, 내가 늘 아내에게 하는 볼멘소리다. 그런데 실은 그게 나였다. 누구의 허물이 크게 보인다. 말은 안 해도, 그의 약점을 가지고 저를 판단한다. 아이들을 보면서도 그래서 끌리고 저래서 멀리한다. 그게 실은 내 것과 다르지 않아서였다. 내가 싫어하는 나를 상대적으로 저에게 기준을 두고 이를 빌미로 판단하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게 나다. 누구를 뭐라 할 거 없다. 주일 오후, 새로 들어간 딸애의 직장 문제로 이런저런 얘길 나누었다. 그러다 누구에 대한 말이 나왔고 본의 아니게 우린 저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대목에서부터는 내가 자꾸 훈계질을 하고 있던 것이다. 심지어 점쟁이나 무당이 하는 짓처럼 함부로 가늠하고 추측하고, 이를 마치 내가 가진 대단한 영적 능력이나 되는 것처럼 굴었다. 나의 기질이나 성향의 문제가 아니라, 교만이었다. 자기만 볼 수 없는 자기 얼굴을 두고 남을 뭐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주 앞에서 겸손하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지 않겠나. 돌아앉아 또 나의 그런 모습을 마주하면 나는 항상 좌절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모습만 보이고 사는 것 같아서 말이다. 오죽하니 가족들을 모두 다른 교회로 보내고 싶다. 말씀에 미치지 못하는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저들 앞에서 말씀을 증거 한다는 게 당최. 특히 아내에게는 항상 부끄럽기 짝이 없다. 어쩜 그렇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는 모습만 하고 사는지 원. 하물며 주 앞에서는 오죽할까? 어찌 감당이 안 됩니다, 하고 주 앞에 엎드린다. 나에겐 내가 제일 어렵다.

 

오늘 아침, 말씀의 위로가 크다. 그런 나를, 그럼에도 주의 사랑하는 여인으로 대해주시는 게 아닌가.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사 62:4).” 나는 주와 ‘혼인한 여인’이라는 쁄라. 그리하여 나를 주의 ‘기쁨으로 삼으시겠다’는 헵시바. 곧 주의 기쁨이 나에게 있다! 아, 생각만으로 민망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늘 염치가 없어서. 다음엔 좀 잘해야지, 하고 벼르고 또 다짐하지만 번번이 돌아앉으면 또 마주해야 하는 나의 부끄러운 모습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비가 억수로 퍼붓고 있는데 아이가 군포에서 예배에 왔다. 늦지 말고 조금만 더 일찍 오지, 예배시간에 좀 더 적극적으로 눈도 마주치고 하지, 녀석이 좀 수더분하여 이런저런 말도 좀 하고 그러지. 내 안에 이는 이런저런 불만이 아이가 돌아가고 난 뒤에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여기까지(!) 예배를 나온다는 게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지 않던가.

 

아내와 딸애가 먼저 들어가고 나 혼자 글방에 남아 있으면서 생각하였다. 그 자체로 이미 기쁨이었다. 대견하고 기특하기만 한 것이다. 그런데 내 안에 못된 근성은 자신도 도달할 수 없는 이상형을 그려놓고 자꾸 아이를 대입시켰다. 남을 견주어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엄히 지적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 23:15).”

 

외식함에 대하여 주님은 단호하셨다. 구제할 때(마 6:2), 기도할 때(5), 금식할 때(16),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7:5).” 그러니 내가 얼마나 가증한가.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15:7-8).” 마음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실제의 삶은 거리가 멀다. 내가 조바심을 내는 것이다. 다그쳐 남을 닦달하긴 잘하면서 정작 자신에겐 관대한 것이다.

 

아, 바울사도의 통탄해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겠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롬 7:22-23).” 그러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그런 거 보면 예수님의 산상수훈 교훈이 하나도 내가 임의로 이룰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나는 내 의지로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는다. 늘 내 문제로 찔찔거리지 주의 마음으로 애통해할 줄 모른다. 그러니 온유하지 않다. 의를 구하지 않고 이에 갈급함도 없다. 가까운 사람도 긍휼히 여길 줄 모르고, 마음이 청결하기는커녕 화평케 하지도 못한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을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저 내가 잘하는 건,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자를 발견한다. 저의 애통하지 못하는 심령을 판단하고, 왜 저처럼 고집에 센지 비난한다. 도무지 나는 내 의지로 가망이 없는 것이다.

 

전에는 그래도 좀 나은 줄 알았는데, 해보면 될 줄 알았는데, 최소한 저들보다 괜찮을 거라 여겼는데. 말씀 앞에 설 때면, 이처럼 나의 모습은 송두리째 발각이 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말씀은 두렵게 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스스로 존귀를 떤들 그게 허세고 허영일 경우다. 이만하면 됐지 뭐, 하는 어떤 억울한 심정이 먼저 올라오는 것이다. 다 그런 거 아냐? 하면서 그 뒤로 숨기나 하고. 그러다 누구의 허물 앞에서는 거품을 물고 혀를 끌끌 찬다.

 

어쩌면 좋을까?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12).” 뭐 그렇게 대단한 인생을 살겠다고 허우적거리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셀라)(13).” 그래봐야 종말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것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사랑이 너무 극진하시지 않나.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사 62:11).”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런 나를 주와 혼인한 여인으로, 나로 인하여 그 기쁨이 가득하시다니.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께서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 바 된 자요 버림 받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12).” 투덜거리듯 아이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그 길을 멀다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가는 그 일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였다. 그게 어찌 우리 의지로 되는 것이겠나? 무덤덤하니 그저 싱겁기 이를 데 없어도 그 안에 성령이 아니시면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내 나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 5:8).” 다른 무슨 변명이 필요할까. 조금은 너그럽고 의연하였으면 좋겠다. 깊은 시선으로 주의 뜻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 삶 가운데 드러내었으면 좋겠다. 누구에게 뭐라 하기 위한 게 아니라 내가 주 앞서 늘 그러하였으면 좋겠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송구할 따름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사람에게, 나는 주의 쁄라라. 저의 헵시바라. 감히 나는 고개도 들 수 없는데,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 62:1)” 주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2-3).”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다. 주의 손에 아름다운 관, 주의 손에 왕관이 될 것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말 4:2).” 나는 여실히 할 수 없음을 발견하고 주 앞에 엎드릴 때마다, 주가 하신다.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셀라)(시 46: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