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전봉석 2017. 8. 25. 06:53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사야 66:17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

시편 53:2-3

 

    

 

그러니 겸손하여서 주님만 바라는 삶이 어찌 자기 의지로 가능한 일일까?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라(2, 11).” 오늘 이사야서는 그 단순하고 명료한 진리를 일깨우신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심과 같이 주의 손으로 ‘이 모든 것’을 지으셨다는 사실 앞에 서면 어떤 두려움에서도 놓여난다. 근심과 걱정이 부질없다는 생각에 이른다. 그래봐야 모든 게 주의 뜻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심령에 통회하는 마음을 얻는다. 이 둘은 같이 가는 것 같다. 내가 주 없이는 아무 것도 없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심령의 가난함으로, 애통하는 심령이 되는 것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3-4).”

 

하루 앞서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유독 이와 같은 말씀으로 위로를 얻었다. ‘가까운 미래’ 그 불투명한 내일 앞에서 우린 얼마나 속수무책인지. 오늘 장모님 종합검진을 위해 아내는 일찍 서둘러 친정으로 가야 한다. 해서 글방으로 오는 아이들 수업을 금요일로 모는 바람에 하루 앞당겨 설교문을 작성해야 했다. 늘 드는 마음이지만 나는 목사를 주방장과 같다고 여긴다. 저는 부지런하여 더욱 신선한 식재료를 구해야 하고, 언제든 식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각각의 요리를 차려야 한다. 그러니 저가 하는 일이 뭐겠나?

 

전에 시 쓰는 친구가 했던 말처럼, 자신은 밥 먹고 똥 싸고 일하고 사랑을 하면서도 시 생각만 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은 아닐 거였다. 일주일 동안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생각을 하였으며 얼마나 주를 바라고 또 구하며 주의 이름을 불렀는지, 나는 공교롭게도 설교원고를 작성하다보면 여실히 알 수 있다. 전날에 어떠했는지, 아침에 묵상글을 쓸 때면 알 수 있듯이. <가까운 미래>로 제목을 삼고 주제를 이끌어가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감사였다. 내가 이러고 있을 수 있어서, 이게 나의 생업이 된 것이어서 말이다.

 

물론 지치고 피곤하여 금세라도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그 또한 인생이어서 그러하지 않겠나.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무얼까? 뭐라도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이유가 득시글거리는 가운데, 주를 앙망함이란 기다리는 것이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 40:29).” 주가 하신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28).”

 

내가 주를 위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위하여 일하실 수 있게 하는 것.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신 주님이 피곤한 나에게 능력을 주실 수 있도록, 무능한 나에게 힘을 더하실 수 있도록,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31).” 그러니 답은 주를 앙모함에 있었다. 앙모하다를 찾아보니 ‘카바’ 곧 기다림이란 뜻이었다.

 

그런데 참 그게 쉽지 않다. 온전한 기다림은 주를 향한 분명한 확신에서 비롯된다. 체념이 아니다. 포기는 더더욱 아니다. 그 어떤 안간힘보다 더욱 간절한 기다림이다. 이게 안 되니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그래서 꼼지락거리는 것일 테고 그 성과를 스스로 두둔하게 되는 것 아니겠나. 오늘 말씀에서 그 목소리를 듣는다. “스스로 거룩하게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에 있는 자를 따라 돼지 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 66:17).”

 

못 기다리겠으니까 사울은 나서서 제사를 도모하다 주를 거역하는 자가 되었다. 나름의 수고와 애씀으로 더는 확신할 수 없으니까 가룟인 유다는 끝내 주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 테고. 다들 나름의 어쩔 수 없음을 이유로 삼고 애쓴다. 그 애씀이, 스스로 거룩을 구별하고 스스로 정결을 도모하는 자나 가증한 일을 범하는 자나 다 같이 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자는 강하게 말하는구나. “지나치게 의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지혜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하게 하겠느냐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전 7:16-17).”

 

‘지나치게’ 자기 수고를 또는 업적을 공로로 삼으려 할 때 이미 저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입으로는 주를 바라고 누구에게 증거하기는 주를 향하였지만 실제 저의 마음은 자기 아집과 자기만족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문득 드는 생각이 행여 또한 나의 기다림이 그러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주의 은혜를 ‘값없이 주신 것’으로만 여겨 너무 당연한 것으로 삼으면 영락없다. 그 값을 내가 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해도 주님이 직접 그 값이 되셨다는 것에 대하여.

 

아프리카 원주민 마을에 한 청년이 있었다. 저는 공들여 카누를 만들었다. 적당한 나무를 고르고 벌목하여 벌인 후 수많은 시간을 공들여 카누를 완성하였다. 그런데 폭우로 카누가 쓸려갔다. 몇 날 며칠을 아무리 찾아 헤매다 한참 아래쪽 마을에 자신이 만든 카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자 저는 극구 우기며 카누가 청년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청년은 몇 배의 값을 물고서 자신의 카누를 되찾아왔다. 구속의 은혜를 이해하는데 적절한 이야기였다.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의 값어치 있는 은혜를 ‘값없이 주신 은혜’로 받으면서 ‘값싼 은혜’로 삼은 것은 아닌지.

 

그럼 포기하고 말던가, 아니면 새로 더 근사하게 만들었어도 될 텐데, 주는 온유하신 분이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사 42:2).” 온유란 ‘잘 통제되는 힘’이다. 헬라어로 ‘파라우스’라 한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 8:7).” 주는 내게 묻지 않으셨다. 왜 그랬는지, 뭐가 어땠는지 다그쳐 추심하듯 꾸짖지도 않으셨다. 다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내가 딛는 오늘의 이 땅을 기업으로 더하시는 것이다. 굳건하여 더는 흔들리지 않기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사 43:1-3).”

 

‘너는 내 것이라.’ 나는 이 말씀보다 더 든든한 게 없다. 그러니 세상이 어쩔 것인가! 이를 바울 사도는 더욱 확실히 하였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3-14).” [그 안에서]다. 가끔은 말씀 그 자체로 다른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 상태로 있는 게 참 좋다. 말 그대로다. 주가 나를 구속하셨고 지명하여 불러 ‘너는 내 것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물이 나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고 불꽃이 나를 사르지 못할 것이다. 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나의 거룩하신 이시고 구원자이시다.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것을 나의 속량물로 주신다. 근사하지 않나? 이런저런 나의 열악함이 또 누추함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그럼에도 주의 온유하심이 나를 그의 피 값으로 사신 것에 대하여 더욱 확신을 더하시는 것이다. 어렵고 힘들지만 그것으로 더욱 주를 바라게 하시는, 세상은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이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8).”

 

힘든데 또는 고통스럽기까지 한데, 나의 개별적인 고통은 어느새 사라지고 주의 말씀 앞에서 ‘아, 참 좋다’ 하는 감격이 또 기쁨이 느껴지는 것이다. 설교원고를 쓴다는 일이 말이다. 부디 그것으로 나의 삶도 동일하기를. 읽는 이와 듣는 이에게도 동일하기를. 같아서 우리의 같은 같음이 개별적인 자기 이야기에서 하나가 되는 주의 이야기로 나뉘어졌으면 좋겠다. 이를 보증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7-18).”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걸 오늘 말씀은 일깨우고 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지각이 있는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각기 물러가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 없으니 한 사람도 없도다(시 53:2-3).” 주를 안다, 내가 믿는다, 스스로 거룩하다, 성실하다 우겨댈 때 알아봐야 한다. 나는 할 수 없음을, 늘 주 앞에 서면 온통 나의 부끄러움뿐이라 송구할 따름일진대.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