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전봉석 2017. 8. 27. 07:3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예레미야 2:13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8월의 청명한 가을하늘은 낯설었다. 불어오는 바람까지도 선선하여서 토요일 오후는 투명하였다. 너무 옳은 말이라,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들이라,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글은 자꾸 눈이 부셨다. 삶은 지독히 처절하여서 어찌 흙을 묻히지 않고 살 수는 없는 처지인데. 하긴 사람이나 기타 그 무엇에 희망을 거는 건 아니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육신으로 그의 힘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렘 17:5).”

 

오후에 딸애와 아내와 나란히 앉아 교회와 가정의 재정적인 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돈 얘기 앞에서는 우아도 고상도 대수가 아니었다. 실제 문제는 생각보다 위태로웠다. 이를 관념적으로 덮어두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런저런 대책을 강구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것부터 실천하기로 했다. 물론 이제 우리의 기준은 교회다. 주의 이름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다 딸애의 결혼이야기가 나왔고 실질적인 문제를 두고 설왕설래 말들이 오갔다. 좋아한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건 전혀 다른 개념의 일이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사랑은 그저 좋아한다는 감정의 일이다. 혼용해서는 안 된다. 실제적인 문제 앞에서 우리가 주를 의지한다는 일은 전투와 같다. 멀리 후방에 있을 때와 최전방에 있을 때가 다르듯이 남의 나라 전쟁이 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딸애가 눈물을 흘리자 가슴이 아팠다. 서로가 좋다는 데 처한 형편이 말이 아니어서, 어찌 할 방도가 없으니 서글펐던 모양이었다. 운다고 될 일이 아니어서 나는 단호하였다. 늦은 오후께 친구를 만나러 가고, 나는 급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시무룩하게 주일 장을 보고 아내와 동네를 한 바퀴 도는데, 찢어지게 청명한 8월의 파란 가을하늘이 위태로웠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들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결국은 돈이다. 돈돈거리며 사는 이유들이 있었다. 아무리 고상을 떨어도 돈이다. 청빈한 삶도 등 비빌 때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은 심한 도전을 받는 것이다. 나의 고질적인 회피 본능은 외면을 바랐다. 나는 주목 받는 생(生)이기 싫다. “나는 말하기를 만일 내게 비둘기 같이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서 편히 쉬리로다(시 55:6).”

 

그러니까, “내가 멀리 날아가서 광야에 머무르리로다 (셀라) 내가 나의 피난처로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7-8).” 다 나 몰라라 하고 살고 싶다. 나 하나 건사하는 일조차 힘에 겨워하는 사람인데, 새로 아이가 하나 소개 되었다. 월요일부터 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을 다니면서 지진아였다. 아직 한글도 떼지 못했다고 한다. 학원을 전전긍긍하며 다녔다. 여느 학원에서 받아주질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우리에게 온 것이다. 아내와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어디 요양원에나 들어가 남은 평생을 마감하고 싶은 사람인데. 하나님은 어쩌자고 이러시는 것일까? 딸애의 사랑도 안 됐고, 아들 녀석이 사귀고 있다는 아이도 탐탁지 않고, 갑자기 나는 궁지에 몰린 사람처럼 할 말을 잃었다. 세상 그 어디에 안식이 있을까?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3).”

 

이처럼 고결하니 말씀을 묵상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주만 바라고 사는 게 황홀하여서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 17:4).” 그 심정을 알겠다. 산을 내려가기 싫은 것이다. 여기 있는 게 좋사오니, 하고 주께 아무리 고하여도 하나님은 산 아래로 끌어내리신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5).”

 

아, 여기가 좋은데. 이렇게 말씀을 따라가며 이를 음미하고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만 살면 좋은데. 찢어지게 파란 8월의 가을하늘이 눈이 부셨다. 자전거포에 가서 브레이크 노즐을 조였다. 헐거워서 밀리기 때문에 미루다 먼 길로 돌았다. 녹이 많이 슬었네요. 사내는 혀를 끌끌 찼다. 관리인이 버릴 걸 주워 준 게 오죽하겠나. 감사였던 게 순식간에 구질구질하게 느껴졌다. 걸려 있거나 바닥에 진열되어 있는 자전거를 둘러보는데 서러웠다. 아무리 못 줘도 일이십만 원은 줘야 할 것들이었다.

 

그래서들 돈돈하고 사는 것이겠다. 마치 일부러 그러시는 듯, 한 아이엄마가 아이 손을 잡고 와서 어린이용 자전거를 둘러보다 가격만 묻고 발길을 돌렸다. 아이는 입을 댓 발은 빼물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처럼 그렁그렁하였다. 아이는 일찍 돈의 무서움을 체험하는 중이었다. 아이엄마는 자괴감을 억지 미소로 덮으며 돌아서갔다. 하필 그 모습을 내 눈 앞에 보이시는 이유가 무얼까? 나는 심통이 났다. 아무리 공평할 수 없는 세상이라 하지만 그래도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나 역시 입이 댓 발 빠져서 주님께 퉁퉁거렸다.

 

그러니 이 고물자전거를 관리인이 쓰라고 줄 땐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했던가. 비록 녹슬고 낡았으니까 어디 둬도 잃어버릴 일 없고, 두 바퀴 멀쩡하고 페달은 튼튼하니 잘만 굴러가면 되는 거였다. 아내의 걸음과 보조를 맞춰 디딤판을 구르지 않고 있으려니까, 타다다닥 타다다닥 하는 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유난히 청아하고 맑게 들렸다. 아,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땅을 딛고 서지 않은 신앙은 모두 헛것이다. 좋은 말이야 누군들 청산유수 같이 못할까? 나 또한 독야청청할 수 있다. 여기 있는 게 좋사오니, 주님만 함께 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돈 없이 값없이 와서 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 8월의 파란 가을하늘이 이 한끝 차이의 진리처럼 위태롭게 푸르렀다. 이내 나를 이끌어 산 아래로 내려오시는 주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긴 시장통이다. 덕지덕지 물려 있는 결제 청구서와 부채와 당면한 현실은 유혈이 낭자하다. 누구는 일 년을 버티지 못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다.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2).” 이사야는 엄포를 놓는 게 아니다. 돈이 돈을 필요로 하는 세상 구조에서 자 그럼, 우린 무엇을 기준으로 둬야 할까? 아내와 딸애에게 당부하였다. 교회다. 우리의 남은 생은 주께로 하자.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대해서까지 우리 자신은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함께 하신 주님을 붙들자.

 

예레미야는 증언한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우리의 지난 삶이 여실히 그러했음을 잊지 말자. 하나님을 외쳐대며 우린 얼마나 허튼 데 삽질을 하고 살았나. 다시 돌아가느니 죽자. 죽을 마음으로 주를 바라자. 사람을 좇고 누구에게 바랄 거 없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22).”

 

토요일 오후, 우리는 글방에 나와 앉아 속상했고, 서러웠고, 한숨이 깊었다가 주를 바라였다. 다른 더 좋은 수를 바라지 않았다. 행여 사람들처럼 사람답게 살려는 데 초점을 맞추지 말자.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23).” 그 결과로 일찍이 우리는 끝장이 났어야 하는 위인들이 아니었나. 돈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세상에서 우리 또한 돈을 필요로 하는 이 땅에서 스렙 땅 과부의 남은 한 종지 기름과 옥수수 가루처럼 부쳐지고 튀겨져서 교회를 이루자.

 

어려움은 이겨낼 수 있게만 주신다. “종은 저녁 그늘을 몹시 바라고 품꾼은 그의 삯을 기다리나니(욥 7:2).” 산다는 일은 “이 땅에 사는 인생에게 힘든 노동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그의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겠느냐(1).” 그 또한 주를 바라는 데 소용되기를. 가진 게 아무 것도 없다고는 하나 그것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게 아닌가. 행여 돈 때문에 낙오하는 자라에 들지 않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돈보다 더 큰 유혹이 또 있겠나.

 

주일에 누가 올지 또 얼마큼의 음식을 준비해야 할지, 아내는 쾌활하게 수선스러웠고 하나님이 주신 천성이 유쾌한 사람이었다.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오후께 시름을 더하며 나누었던 말들이 무색할 정도로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어보였다. 파아란 8월의 가을하늘처럼 청명하여서 새들이 지나는 길을 따라 바람이 불고 낙엽이 흔들리는 자국까지 다 보이는 것 같았다. 나의 사랑하는 고물자전거는 거뜬하여서 몇 십만 원짜리 으리으리한 자전거보다 건재하였다.

 

그리하여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말씀밖에 달리 믿을 게 어디 있나. 됐다 그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