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예레미야 1:8-9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
시편 54:4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 씨는 2010년 영국 유스턴 기차역에서 21억에 임대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도난당했다. 수사당국은 이에 다각도로 범인을 찾았으나 실패했다. 2013년 7월 어느 한 경매장에서 그때 김민진 씨가 도난당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이 24억 원에 경매에 붙여졌다. 가져간 사람은 그 값을 몰라 우리 돈 약 17만 원, 100파운드에 그 물건을 팔아넘겼다고 한다.
내용을 읽으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구속의 의미에 대하여는 잃어버린 것을 그 배나 값을 주고서 도로 찾는 것임을 알았고, 그 값어치에 대하여는 이를 모를 때 한낱 ‘물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그러니 우리는 누구보다 하나님께 꼭 필요한, 그 어떤 값어치보다 값진 존재이었다.
그리하여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사 44:22).” 이에 “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23).” 영광을 나타내실 것이라는, 곧 우리를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데 방점이 찍힌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영화롭다는 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것이다. 곧 선을 이루심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28).”
아! 이처럼 말씀을 좇으며 묵상하는 일이 나에게 즐거움이 되었다. 모처럼 아이들이 연달아 오고 일일이 거들어주며 글쓰기를 지도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러는 사람들’의 책을 읽고 같이 동의하며 묵상하는 일은 즐거웠다. 가령,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브니엘)를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다. 존웨슬리를 포함해 유진 피터슨에 이르기까지 칭송이 끊이지 않는 초절정 묵상도서였다. 왜 이걸 이제야 만날 수 있었나, 싶게 설레는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리고 환희, 어떤 알 수 없는 만족감이 전해져왔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는 일에 있어 저의 깊은 묵상에 참여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어수선한 아이들 틈에서 틈틈이 책장을 넘기며 읽다 밑줄을 긋고 메모를 하는 일에 대하여, 나도 내 자신이 이와 같은 즐거움을 누릴 것이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이 지루하고 고리타분한, 그리고 늘 빤한 소리에 어디서 다 들었던 것 같은 말들인데,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그의 말을 또 듣고 또 듣고 싶은 것이다. 물론 거의 평생을 수도원 생활을 하며 속세의 찌든 삶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는 데 가산점이 붙긴 하겠으나, 것도 돌이켜보면 저가 감당했을 외로움과 고독은 가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는 너무 맛있어서 아껴 먹는 아이처럼 천천히 더 느리게 책을 읽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31).” 하는 말씀 앞에서 오래 머무는 것처럼 말이다. 나에게 믿음이란 오래 기다리고 그 기다림을 무던히 받아내는 일이다. 결국 믿음이란 믿을 수 없는 것이 믿어지는 일이어서 사랑만큼 무모한 것이고, 소망처럼 맹랑한 것이다.
나에게 믿음이란 내 생각과 판단으로 닿을 수 없는 지점이고, 내 의지와 노력으로 품을 수 없는 가치이며, 나의 결연함으로는 도저히 행동으로 거둘 수 없는 실천이고, 그저 맨 정신으로는 불러지지 않는 이름이어서 도무지 꺼려지고 납득이 안 되는 모든 바랄 수 없는 것들의 실상이기만 하다. 마지막 팀 수업 때 한 아이가 봉투를 꺼내주며 감사헌금이라고 내어놓았다. 앞서 한 아이는 지난 번 주일 때 와서 헌금으로 낸 자기 돈 250원을 어디에 썼는가 하고 물었다. 아이여서 맹랑함마저 사랑스러운 까닭인데 그 물음은 내게 큰 울림으로 남게 되었다.
아이엄마에게 아이 편에 보낸 헌금에 대해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자 늘 내게 고맙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머쓱해진 나는 할 말을 찾다, 나는 그저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일 뿐 우리 주님이 다 하십니다. 하고 재전송을 하였다. 보내놓고 나니 그 말이 또 내 마음을 울렸다. 믿음이란 이처럼 실제적이면서 분명한 실상을 가진다. 허무맹랑하여 이걸 어디에 쓸까, 싶지만 주께서 그리 두시고 거기에 소용되도록 사용하실 수 있게 내어드리는 일. 이때 하나님은 나에게 삼인칭일까 이인칭일까?
메모가 많은 날은 생각이 많았던 것이고, 나의 생각은 부지런함과 비례한다. 친절하였다는 건 금세 잊힐 수 있는 무게의 정도라면 친밀함은 도무지 잊히지 않는 무게의 정도다. 잠결에도 누구를 떠올리고 누구 생각을 하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일. 기도는 나에게 그리 생각되어지는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위하여 주께 향하는 간절함이다. 그런데 메모해두어야 하고 적어 붙인 것을 보아야 떠오르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더는 기억되지 않는 이름도 있다. 내 기도의 영역에서 사라진다는 일, 잊힌다는 일은 아득하여 슬프다. 너는 나에게 이인칭이었다가 삼인칭이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이인칭에서 일인칭으로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일, 더는 너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친밀함이다. 내가 아픈 것, 내가 슬프고 내가 기쁜 너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묵상이란 나에게 이제 그런 것이다. 성경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게 내 이야기로 읽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그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이 나의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다가 나는 이 끝도 없는 생각에 사로잡혀 마냥 즐거웠다. 이 이야기가 대체 뭔데 나 또한 동질감을 느끼게 한단 말인가.
이 사람이 뭔데 나에게 감사헌금을 보낸단 말인가. 이 아이가 어째서 그 조막만한 손으로 250원을 헌금으로 바친단 말인가. ‘그저 나는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일 뿐이고, 우리 주님이 하십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맹랑한 것들을 향하여 주를 바라는 일이다. 세상이 아무리 어떻다 해도, 그 실제가 너무나도 실제여서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해도, 묵묵히 의연할 수 있는 자세가 신앙이었다. 오늘 말씀이 나에게 들려주시는 것이다.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렘 1:8-9).” 달리 어찌 설명할 길이 없다. 종일 들어앉아 매일 그 타령이 그 타령인 사람인 주제에 나는 무얼 믿고 그런 소릴 한 것일까? 얼마냐? 하는 액수가 아니라 그 안에서 누리는 넉넉함의 농도가 다른 거였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4년 가까이 다녔던 직장에서 들어온 퇴직금을 두고 딸애와 잠깐 말이 오갔다. 여느 웬만한 직장인 한 달 치 월급 정도밖에 안 되는 금액을 두고 아이는 만족함으로 충만해할 수 있었다. JTBC 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의 작가 백미경은 종방영을 한 뒤 인터뷰에서 밝혔다. 실제 작품을 쓰기 위해 내로라하는 부자들의 삶을 취재했는데, 정말이지 드라마보다 더한 믿기 어려운 사실 앞에 놀랐다고 한다. 현금다발을 몇 개의 금고에 나누어 쌓아두고 사는 이 중에 밑에 쌓인 돈이 썩는데도 모를 정도라고 한다. 거의 대부분이 가정 외에 따로 살림을 차리고 있거나 공공연하게 물론 서로의 묵인 하에 애인을 두고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행복하지 않다고 답했다는 이 아이러니한 현실을 놀라워했다.
자신이 주일에 낸 250원 헌금을 어쨌냐고 묻는 아이의 질문이 나에게 영적인 각성제 같았다고 하면 너무 이상하게 들릴까? 발칙하고 맹랑한 아이의 질문이 어느 훗날 하나님이 내게 던지실 질문이 아닐지, 하고 말이다. 너에게 준 몸과 마음과 지식과 아울러 그 눈과 코와 입으로 너는 뭐하다 왔냐? 그걸로 어쨌냐? 하고 물으실 것만 같은, 아이의 허무맹랑한 질문이 청량하였다. 얼마 안 되는 적은 금액을 아이 편에 봉투에 담아 감사헌금으로 보내온 아이엄마의 고마움의 표시에 ‘그저 나는 여기 있을 뿐, 우리 주님이 하시지요.’ 했던 나의 말에까지….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하시는 이 벅찬 환희의 순간을 나는 사랑한다. 도무지 내가 닿을 수 없는 그 은혜의 아득함에 대하여 또는 죽었다 깨어나도 미칠 수 없는 저 까마득한 어떤 맹랑함에 대하여도, 비로소 “하나님은 나를 돕는 이시며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들어 주시는 이시니이다(시 54:4).” 아멘이다. 감사다. 영광이다. 주를 앙모함이란 어떤 기다림이고 기다림으로 받아내는 간절함이었다. 내가 아이를 한 번 더 생각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수고로움 앞에 나는 맹목적이다. 정말로 도와주실지 아니면 그냥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마음일는지, 나는 이 알 수 없음에도 주를 바라는 마음을 믿음이라, 묵상이라 여긴다.
“어리석고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렘 5:21).” 것도 ‘우리 주님이 하십니다.’ 나는 무던히 주를 바랄 뿐.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가 네게 명령한 바를 다 그들에게 말하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그들 앞에서 두려움을 당하지 않게 하리라(1:17).” 그러므로 내 일은 ‘그저 그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리하여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나와 같이 있는 자들에게 주가 함께 하심을 말하는 것.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시 54: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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