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전봉석 2017. 9. 14. 07:23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예레미야 20:9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시편 73:24-25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공연히 나에 대한 불만족이 아이에 대한 불평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기껏 공들여 글을 다듬어주었더니, 여기저기 다른 이의 말을 덧대고 뭉쳐서 이건 뭐지? 싶게 만들기도 하였다. 아이는 불안한 것이다. 유사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문항을 만들어 놓고, 이어서 유사도 검사를 한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아이는 며칠째 날밤을 새워가며 시답잖은 글에 매달렸고 나는 덩달아 피곤하였다.

 

열한 시를 넘겨서까지 아이는 남아 글을 고쳤고, 그러면서도 여기저기 조언을 듣느라 더더욱 지체가 되었다. 아무래도 여자아이와 단둘이 있는 게 그래서, 아내는 핑계 삼아 주먹밥을 싸와서 같이 먹고 교육방송을 들었다. 애쓴다, 서로가 이 무슨 짓인가 싶었다. 아이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안타까웠다. 그런들. 식사 기도를 하는데 아이가 풋, 하고 웃었다. 순간 나는 조롱을 당한 듯 기분이 언짢았고 아이는 그러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워서 웃음이 나왔다고 하였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다. 이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여 더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을 때, 나는 아이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다. 상종을 말아야지, 하고 기도하기를 그만두면 좀 나을 줄 알았는데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내가 못 살겠어서 다시 문자를 하고 안부를 묻고 주를 바란다.

 

은근히 그 책임을 전가하고 싶어진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소문과 스캔들에 열광하는 심정은 다른 사람의 치부를 들춤으로 내 것이 가려지는 줄 알기 때문이다. 여느 프로그램이 죄다 그런 식으로 남의 말잔치를 벌이는 까닭도 그래서 시청률이 나오기 때문이다. 억압되고 숨기려는 자신의 죄책으로부터 놓여나는 길은 그것을 전가하는 것이다. 아이는 마음에 항상 부모 때문인 것이고, 나는 무슨 말 끝에 이게 다 아내 때문이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이러한 투사는 근원적으로 우리 마음의 바탕을 이룬다. 그리하여 끝내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아모리 사람의 손에 넘겨 멸망시키려 하셨나이까 우리가 요단 저쪽을 만족하게 여겨 거주하였더면 좋을 뻔하였나이다(수 7:7).” 안 그러면 내가 살 수가 없어서 ‘너’를 걸고넘어지는 것이다. 어떻게든 핑계를 삼으려 든다.

 

노력한다고 될 문제는 아닌 것 같고, (아이가 이제 글을 다 썼다며 문자와 함께 보내왔다. 홀딱 밤을 샌 모양이다.) 그저 안쓰럽고 답답하기만 하다. 이게 무슨 난센슨지 모르겠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다들 하니까 안 할 수도 없고 그러느라 우리의 영혼은 피폐하기만하다. 낮에 잠깐 한 아이엄마가 왔었다. 무슨 말 끝에 엄마의 통제가 지나쳐서 아이가 오히려 자주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해주었다. 엄마 입장에선 아이 때문이고 아이 입장에선 엄마 때문이다. 그런 것이다. 자기에 대한 불만족이 타인에 대한 불평으로 이어진다.

 

“어리석고 지혜 없는 백성아 여호와께 이같이 보답하느냐 그는 네 아버지시요 너를 지으신 이가 아니시냐 그가 너를 만드시고 너를 세우셨도다(신 32:6).” 성경은 일깨우고 우리는 외면한다. 쉬운 일은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게 아니라 너를 억압해서 통제하는 게 낫다. 한결 손쉬운 것이다. 내 안에 이는 숱한 마음도 다를 바 없다. 기도하는데 아이가 풋, 하고 웃을 때 순간 이는 불쾌감. 기껏 뭐라 문자를 했는데(해주었는데) 답이 오지 않을 때의 모멸감. 내 수고와 희생이 그만한 보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 같을 때의 자괴감.

 

이런 것은 나의 잘못을 너에게 투사하려는 죄의 본질에서 비롯된다. 하나님만 바란다는 건 어설프게 다음 이야기를 속단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하든 그 결말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시편은 그에 따른 기도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시 73:24-25).” 다른 무엇을 바라는 모든 게 죄의 유형이다.

 

남을 볼 땐 소용이 없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도다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12-13).” 하나님은 상대적으로 나를 깨끗하게 하시려는 게 아니었다. 둘 중에 더 나은 걸 고르시는 게 아니다. 그런데 나는 누굴 보고 무엇과 견주어 내가 좀 낫다는 걸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

 

세상에 강한 아이로 키워봐야 무슨 소용이 있나. 강한 아이는 반항하고 대립함으로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자기 안의 상처를 안고 산다. 만족스러운 듯 보이나 실은 더 위태로운 강함이다. 그런 이가 수틀리면 자살에 이른다. 철저하게 바리새인이 되거나 교묘하게 가룟인 유다가 되거나. 약한 아이는 복종함으로 대립을 피하지만 억압된 반항을 감추는 것뿐이다. 후에 신경증을 안고 살거나, 원망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복원할 수 없다. 그러게. 어느 정신과 의사의 말처럼 정상인은 죄다 잠재적인 신경증 환자일 뿐이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눅 18:9-10).” 그런 거 보면 죄가 없는 이는 없고, 다만 그 죄를 자복하느냐 회피하고 전가하느냐의 문제다. 참 그렇다. 스스로 얼굴을 굳게 한다. “악인은 자기의 얼굴을 굳게 하나 정직한 자는 자기의 행위를 삼가느니라(잠 21:29).” 스스로 정직하다고 될 일이 아니다.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2).”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뭐하나?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30:20).” 참 사람이 그런 거 같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나는 벌써 남에게 불평하고 있는 것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 내 안에 이는 죄책이 잘못된 건 아니다. 죄에 대한 자각은 어느 정도 영적 불안을 전제로 한다.

 

내 안에 이는 이와 같은 숱한 마음이 기어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한다. 주가 아니시면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좀 어떻게 해보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마주하게 되는 것은 절망뿐이라.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27).” 나는 이제 이 사실을 확신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28).”

 

가끔은 나의 신경증이 주를 바라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말은 못해도 내 안에 이는 여러 생각과 마음이 다소 병적으로 나를 몰아붙일 때도 있지만, 그래서 나는 주님이 더욱 필요하다. 나보다도 말이다. 이걸 조건으로 아이를 교회로 나오게 한다는 생각은 옹졸하였다. 그리 마음이 쓰여,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고 여겨지던 마음이 내 스스로에게 버거웠다. 주님이 하실 일까지 내가 나서서 참견하는 꼴이다. 이래서 신경증은 건강한 죄책까지 비틀어서 병적으로 만든다.

 

나는 아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이렇게 수고한다고 얘가 주일에 나올까? 나의 이 유치한 셈법은 하나님 앞에서도 민망하였다. 결국은 내가 하는 수고에 대해 나름의 명분을 계산하고 있는 게 아니었나. 선한 의도로 주 앞에서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이 또한 나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든다.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에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욥 14:4).” 그러니 혼자서 길을 잃는 게 신경증이다. 나는 나의 신경증을 사랑한다. 주를 더욱 갈망하다 쇠약해진다.

 

그런 거 보면 내 안에 이런 마음을 두시는 게 은혜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마 15:18).” 온갖 생각이 다 섞여 있고 숱한 마음이 들락거리는데 그 속이 오죽할까.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가.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13-15).” 두렵고 떨릴 뿐이다. 누가 내 속을 들여다본다면 신물이 올라와 가까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의 하나님은 대단하시다. 어찌 이런 나를 끝까지 사랑하실 수 있을까? 내 안에 악독이 가득하다.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렘 20:12).”

 

그런즉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13).” 이어지는 나의 절망과 두려움을 주가 아시오니,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시 73:13).”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16-17).” 주 앞에 가만히.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21).”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22-23).”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