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예레미야 22:21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시편 75:6-7
어떤 서글픔이 밀려들 때 주체할 수 없이 마음은 저 혼자 까부라지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어디라도 다녀오고 싶은… 낮 동안에 마음은 저 혼자 술렁였다. 아이엄마가 고맙다고 직접 인사를 오겠다는 걸 보면, 주일 날 아이를 예배에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엄마는 원래 끊고 맺는 게 정확해서 절대 그럴 여자가 아니야, 하는 아내의 말에 나는 시무룩해졌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에 대하여 나는 입을 삐쭉거렸다. 그저 또 나 혼자 마음이 설레었던 것일까?
점심을 먹고 천천히 걸어서 갔다. 여름 내 강하였던 햇볕이 기운을 잃고 선선하니 바람에게 길을 내주었다. 부모님이 새로 이사하실 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떤 서글픔이 기분을 휘저었다. 벌써 이제 그늘에 들어서면 서늘하였다. 설교원고를 출력하고 주보를 만들었다. 텅텅 빈 곁의 사무실들 때문에 더 우울하였다. 하나님은 어느 쪽을 가리키고 계신 것일까? 내 안의 결핍을 들어 그 방향을 생각하였다. 바람의 길을 알 수 없어 나뭇가지들은 몸서리를 쳤다. 그럼에도 햇살은 눈이 부셨다.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것,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투덜거리듯 주님을 생각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와서 ‘양치기 소년’을 읽고 글을 썼다. 양심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서로가 무용담을 늘어놓듯 거짓말에 성공한 사례를 풀어냈다. 엄마를 속여 넘긴 일은 통쾌하다. 모든 원인은 게임이었다. 아이들에게 있어 그 나이 때의 고민이 부모였다. 눈을 피해 무얼 할 수 있을까?
온전히 하나님을 바라고 싶은 마음과 하나님의 눈을 피해 살고 싶은 마음이 충돌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다들 그러고 잘만 사니까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바울 사도의 간절한 설교가 가슴을 저민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빌 3:18-19).” 내 안에도 여전하여 땅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않나.
그래도 그곳으로 이사하면 더는 이제 이사할 일은 없잖아. 여러 말들 가운데 엄마의 말이 명치끝에 얹힌 듯이 남았다. 지긋지긋한 이사. 살아온 생이 헐겁도록 가벼워서 서글펐다. 그래 봐야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쩌자고 나는 문득 이 땅을 생각하는 것일까? 오늘 말씀은 나의 나 된 것을 들추신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나는 고질적인 불순종이 나의 습관이라. 순순히 감사할 줄을 모른다. 얼마나 감사한가. 여기까지 함께 하신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크고 귀한데, 어려서부터 나는 주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나의 습관이라. 공연히 마음은 우울하였고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롭게만 다가왔다. 왜 나는 이처럼 말씀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일까? 삐딱해서 저 혼자 골내고 토라져 서러워하기 일쑤다.
오늘에서 보면 하나님이 다 하시지 않던가.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알겠는데, 머리로도 가슴으로도 알겠는데, 아는 일과 사는 일이 전혀 별개의 것이겠나. 나는 초등학교 아이들의 수다를 들으며 저 나이 때의 나를 생각하다 너무도 까마득하여 어지러웠다. 참으로 멀리 오긴 왔구나. 어느새 부모의 연세가 그리 되었고 내 나이와 나의 형제들의 나이가 훌쩍 중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앞에 머리가 왜 없어요? 왜 머리가 하얘요? 아이들의 장난기어린 질문에 새삼 알게 된 대답이다.
나이가 든다는 일, 돌아갈 날이 다가온다는 것. 그러게. 언제부턴가 나는 돌아간다는 말이 참 정겹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내 안에 이는 서글픔이 온전치 못함을 일깨우신다. 허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스스로 이 땅에서 외국인임을 자신이 나그네인 것을 증언하였던 것인데, 이는 곧 본향을 찾는 자들임이었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16).” 내가 사는 동안에 돌아갈 집을 바라며 꿈꾸는 일이 얼마나 감사한가. 한 성을 예비하셨음이라. 여기가 전부가 아니었다. 종착지가 아닌데, 나는 자꾸 내리려고 들었던가. 그래도 이제 사는 날 동안 또 어디로 이사 갈 일은 없을 거 아냐. 엄마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던 것도 그래서였을까? 우리의 사모함이라니.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갈 4:26).” 영적으로 내가 꿈꾸는 나라는 저 하늘이었음을. 고단하여서 이 땅의 날들이란 게 나그네의 발걸음이 그렇지 아니한가. 정처 없음으로 가벼우나 머리 둘 곳이 없어 서럽기도 한 것이어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마 8:20).” 어쩌면 우리가 안고 사는 이 부재의 땅은 거쳐 가는 것이어서 충분하였다. 다시 살고 싶으세요? 아이의 질문이 맹랑하였다. 나도 너희들 나이 때가 있었는데, 하는 나의 말을 되받아 친 것이었다.
그렇구나. 이와 같은 결핍이 결국은 우리가 향하여야 할 것을 지시하여 주시는 것이구나. 평안할 때야 누가 그 말을 들을까? 오늘 말씀은 그래서 새삼스럽다.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어떻게든 이 땅에 등 비비고 좀 살아볼까 할 때는 이국땅에서의 서러움이 당연하였다. 나그네가 제 집을 구한다는 게 어불성설이지 않나.
그리하여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하시게 하는 게, 바람의 길을 따라 햇살의 결을 달리 하는 것과 같겠다. 내 힘으로 무얼 할 수 있겠나.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6-7).” 나는 오늘 말씀을 여러 번 되뇐다. 하나님이 낮추시고 또 높이신다.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는 게 아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사는 동안에야 이 말을 어찌 받을 수 있을까?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어서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2).” 헛힘 쓰다 하루가 다 갔다. 공연히 우울감에 젖어 혼났다. 그럴 거 없다. 양식 아닌 것에 값을 내어줄 수야.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해 수고한들. 말을 듣지 않는 게 어릴 때부터 습관이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나는 이 말씀 앞에서 안도한다. 휴우, 하고 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전 것은 지나갔다. 나는 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16).” 내 생각과 내 임의로 주를 바라고 구하였던 것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는 데 다행이라는 마음이 드는 까닭은 왜일까?
그럴 거 없다는, 더는 수고하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으로 들려서 감사하다. 내 나름 내가 정해놓은 구획을 가지고 멋지게 산다고 살았던 것들이, 바람의 결을 달리하는 계절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다. 참으로 감사하지 아니한가. 나는 나의 속수무책을 사랑한다. 아직도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래서 더 고단하여야 할 것들에 대하여 나는 감당이 안 된다. 아이들과 이야기하다 까마득하게 여겨지는 저 나이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고단하였구나, 생각되었다.
모두가 주님의 덕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나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게 참 좋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17).” 전에 내가 아니라는 게 얼마나 기쁜지.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6-17).”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29-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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