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예레미야 21:5-6, 8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시편 74:1, 12
때론 너무하시다 싶게 몰아치시고, 어려움과 고통을 거두지 않으실 때가 있다. “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사 17:13).” 하나님의 진노는 멸망을 위한 게 아니라 구원을 더하시기 위함이다. 구원을 위해 사람과 투쟁하신다. 살리기 위해 더욱 잔인하게 대하실 때도 있다.
나는 병원에서 이를 종종 느꼈다. 특히 어릴 때, 다리 수술을 하고 몇 개월간 깁스를 하고 있어서 물리치료를 통해 이를 꺾어주지 않으면 뻗정다리는 굳어질 위기가 있었다. 그래서 젊은 의사와 간호사가 매달려 나를 누르고 붙들면서 안간힘을 썼지만, 죽겠다고 나는 버텼다. 젊은 의사는 진땀을 빼다 기어이 보호자를 불러 요청했다. 아버지는 나를 설득하셨다. 나는 아파 죽겠다고 떼를 썼다. 다시 의사가 달라붙어 지금 꺾지 않으면 평생 뻗정다리로 굳어진다며 설명했다. 어린 나는 징징거리며 버텼다. 그때 아버지는 나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 인정사정없이 내 무릎을 잡아 꺾어버렸다.
하나님이 우리를 강하게 치시는 이유는 그만큼 우리의 저항이 격렬하기 때문이었다.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레 26:23-24).” 그때 나는 아버지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 다리를 꺾지 않은 채 굳어져 평생을 뻗정다리로 지내는 사람도 본 적이 있다. 진노하지 않으시면 동정하시지도 않으신다. 오늘 말씀은 이를 상기시킨다.
“내가 든 손과 강한 팔 곧 진노와 분노와 대노로 친히 너희를 칠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이나 짐승이나 이 성에 있는 것을 다 치리니 그들이 큰 전염병에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만일 그릇 행하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면 이는 더 큰 불행이다. 알미니안주의 신학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한다. 칼빈주의 신학은 선택된 자만을 구원하신다고 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너는 이 백성에게 전하라 하셨느니라.” 나는 기어이, 뺨을 후려쳐서라도 강제하셔야 했던 특별한 대상이었던 것이다(렘 21:5-6, 8).
이때 우리의 곡소리는 서럽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그 원망은 하늘을 찌를 듯하기도 하다. 하나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하는 고백을 동시에 주신다(시 74:1, 12). 나는 지금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도 있다. 사람이 참 그렇지 않나? 독일의 속담처럼 ‘사람은 달을 한쪽 면만 볼 수 있다.’ 우리의 잘못에 진노하지 않으시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나 때문에 괴로우시다.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하게 하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사 43:24).” 주님을 위하여, 하고 말하지만 실제 늘 보면 내 배 채우려는 데 급급할 뿐이다. 가만히 말씀 앞에 있다 보면 참으로 유구무언이라.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런 것 같다. 나에 대해 환멸이 또 비관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께 대한 그 도우심을 바라는 마음은 더욱 절박해진다. 다른 더 좋은 수가 없다.
고3 아이는 결국 밤을 새워 자소서를 완성하였다. 오전에 올라가 아이의 글을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수고했다고 애썼다고 답을 주었다. 글을 쓰는 일보다 그것을 다듬으며 수십 번을 다시 뒤집는 게 얼마나 고단한 일인가를 나는 잘 안다. 들어보니 아이아빠가 같이 밤을 새워가며 고쳤던가보다. 하다못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그처럼 기를 쓰고 수고를 아끼지 않는데 하물며 영생에 들어가는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 태평한 거 아닐까? 오후께 중2 아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주며 선배 글을 좀 읽어보게 하였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그저 시큰둥한 것이다. 3년 뒤에는 너희들 일이야! 하고 말해주어도 풋, 하고 웃었다.
그런 것이다. 다그치지 않고는 삶이 누수하다. 도중에 새는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나님의 진노는 사랑의 다른 면이다. 우린 당장 어렵고 힘든 점만 붙들고 씩씩거린다. 그 이면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9).” 답답한 노릇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
나의 어쩔 수 없음에 대하여 때론 어려움이 약이다. 안 그럼 금세 흐리멍덩해진다. 안이함이란 마치 초파리 떼 같다. 어디서 어떻게 생겨나는지, 탄생의 질서를 초월하여 초파리라고 한다. 단내가 돌면 영락없이 날아든다. 죽여도 끝이 없다. 내 안에 이는 안이함도 같다. 조금 힘들 때는 바짝 긴장했다가 조금만 풀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늘어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할 때 주의 도우심만을 절감하게 돼 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히 12:6).” 우리가 볼 수 있는 달의 한 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 그 이상의 것이다.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숙연해진다. 내가 이해한대로 읽으면, 죽여서라도 살리시겠다는 것이다. 세상과 함께 멸망하게 두느니 일찍 죽여서라도 데려가시는 게 낫다는 것이다. 오죽하니 그럴까.
그 사랑은 본인이 그 값을 다 지신 사랑이다. 사람이 되어 죽어주신 값이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히 12:5).” 구원이 허투루 이루어진 게 아니다. 영생이 결코 경히 여길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당장 목전에 놓인 문제가 커 보이겠으나, 이제와 보면 중2 사춘기 때의 고민이 얼마나 유치했었나. 고3 때의 그 절박함이 얼마나 가소로운가. 하물며 영생을 두고 여유를 부린다면, 할 말이 없겠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하는 이 고백이 참으로 값진 거였구나. 내 것이기를. 나 또한 이와 같은 고백으로 나의 남은 생을 모두 걸 수 있다면.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9).” 그 사랑을 알진대 오늘의 고통 또한 사랑이었음을. 그래 맞다. 누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순종에 의한 게 아니라 불순종에 의한 거였다.
그러므로 내 안에 이는 죄책감이 얼마나 소중한 양심인지. 사람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소리에 이처럼 귀 기울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누가 뭐라 하지 않는데도 주 앞에 엎드려 죄를 고할 수 있는 것이 특권이었다. 이것으로 예민하게 살아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어디 구름 한 점 없는데도 방주를 짓는 사람이 성도였고, 억울하게 옥에 갇혀서도 낙담하지 않고 찬송을 부르거나 성실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롬 11:12).” 참으로 어리석고 답답하고 한심한 위인인 것 같으나 온전히 주만 바라고 사는 일.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20).” 두고 사는 마음의 결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로버트 갓프리의 <칼빈:순례자와 목회자>(부흥과개혁사)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큰 수혜자인가를 새삼 느끼고 있다.
앞서 간 믿음의 사람들의 노고가 결코 헛되지 않듯이 오늘 나의 걸음은 어떠한가 생각하였다. 하나님은 나를 건져주시는데 나는 자꾸 또 빠진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히 6:4-6).” 나야말로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참으로 구제불능이다. 하루에도 수없이 타락한다.
그런데 또 이를 인정하고 고백할 때마다 하나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용서하시고 받아주신다.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12:15-16).” 나를 살펴 나를 더욱 주 앞에 복종하게 하시려고 오늘 내게 두시는 갈등도 서러움도 복되었다. 이내 더는 회개할 기회조차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상기시키신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17).” 두려운 일이다. 정작 두려워할 줄 아는 두려움이 값진 거였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 어쩔 것인가?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하는 오늘의 말씀이 나의 고백이 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시 16: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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