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
예레미야 23:23-24, 28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시편 76:10
어떤 결과, 특히 일에 대한 성공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증거로 삼는 것은 위험하다. 기도응답에 있어 단순하게 적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든다. 자칫 하나님의 변덕을 알다가도 모르겠으니까 말이다. 어떨 땐 되고 어떨 땐 안 된다. 하나님은 바람의 길처럼 임의로 움직이신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그래서 기도는 기도하고 까먹는 게 가장 옳다. 했으면 된 거다. 결과는 하나님의 것이다. 나는 자꾸 기도만 하는 것이지 그 결과는 주님이 알아서.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29:26).” 그런 걸 자신의 체험으로 짐작해서는 안 된다. 오랜 경륜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경험과 나이가 무슨 소용이 있나. 저번엔 되고 이번엔 안 된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나 그 모든 게 하나님의 경륜을 따른다.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잘못될 리 없다고 철석 같이 믿는 사람처럼 단순하다. 단순화시킨 하나님의 일은 전적으로 자기 판단과 기준에 따른 것이다.
오전 내내 기다렸다. 오후께 오려나? 부리나케 점심을 먹고 다시 기다렸다. 안 오려나? 하고 있는데, 그제야 왔다. 나는 주일에 나와 같이 예배드릴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하지만 아이는 정오에 과외가 있어서, 3시께나 오겠다고 하였다. 왜들 나한테만 이러는가? 싶었다. 본래 사람 사이의 관계란 게 이런 것이었나? 다른 데서도 그러한가? 아니면 여기에서만 이런가? 나한테만 이러나? 원래 모두가 그러나? 아이엄마는 고마웠다며 돈과 빵과 과일을 주고 갔다.
아내와 주일에 먹을 장을 보러 갔다. 내내 마음이 우울하였다. 생각보다 큰 금액의 돈이었다. 일부러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선물까지 주고 갔다. 아내는 내가 왜 기분이 우울한가 알지 못했다. 나도 실은 잘 모르겠다. 그렇게 연결이 되어 아이가 예배에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가보다. 그리 기도하였고 그처럼 응답하실 줄 알았다. 사실 우리를 힘들 게 하는 건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사탄은 내 마음을 편하게 한다. 속 끓일 일도 없다.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꿈을 꾸었다 꿈을 꾸었다고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렘 23:25).” 내 임의로, 내 느낌과 바람을 곁들여 하나님의 의중을 단순화하는 일은 사탄의 특기다.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를 하나님께 지운다. 마치 내 뒤를 따르는 짐꾼인 듯 요구하는 것을, 바라고 구하는 것을 기도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해달라는 건 많고, 그 변덕은 실제 내 것이었다. 이럴 땐 좋고 저럴 땐 싫다. 이래서 옳은데 저래서 부당하다.
이런 내게 오늘 말씀은 울림이 크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23)” 물으신다. 당장에 원하는 것에만 마음을 기울이지 더 먼 데서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하여는 상상이나 해보았냐? 물으시는 것 같다. 내 눈에 안 보인다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게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24)?” 실은 내 안에 감추고 있는 것이 나의 만족이지 않았던가!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24)” 성공에 뿐 아니라 실패에도 하나님의 뜻은 실현되지 않았나? 요셉의 형들은 탐욕에 일그러져 동생을 팔았으나,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 45:7-8).” 이 안에 답이 있다.
나는 꿈을 꿀 것인가 말씀을 받을 것인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렘 23:28)” 어떤 계산으로 선을 이루는 것은 훗날에 낭패다. 의도를 감추고 주의 이름으로 향한다고 하나 어리석을 뿐이다. 그래서 성경은 가르치신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꿈을 꾸고 그 꿈을 실현하는 일은 하나님 없이도 가능하다. 그때의 기도는 결과를 놓고 바라게 한다. 무엇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동원하고 싶은 오만함에서다. 이때의 낭패감은,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얼마나 황당할까?
처음부터 거역하고 나 몰라라 하고 살았으면 모를까, 나름 주의 뜻을 구하며 산다고 산 게 저러는 거 아닌가? 애썼다. 수고하고 헌신했다. 심지어 보람도 있었겠다. 선지자 노릇을 했다. 꿈을 꾸고 그 꿈을 증거 했다. 말씀으로 권한다며 나름 또 그 학식이 얼마나 출중했겠나? 이미 사어(死語)가 된 문자를 연구하고 주석을 찾아서 열심히 또 탐구했을 텐데.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다. 권능이 대단했겠다. 그런데 주님은 ‘도무지 알지 못하니’ 이런 낭패가 어디 있나?
어제의 내 모습 같다. 내 마음이 딱 그러했다. 나름 애썼고, 선한 의도로 마음을 기울였으며, 기도하여 응답을 구하기도 하였다. 한데 아이엄마는 과분할 정도로 사례를 하고 선을 그었다. 아이는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은 듯 과외를 핑계로 거절하였다. 나는 내 마음이 왜 우울한지 알고 있다. 아이의 영혼을 안타까워하는 내 안의 마음이시다. 우울하니 몸을 뒤채다 이른 시간에 잠이 들었다. “그들이 서로 꿈 꾼 것을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조상들이 바알로 말미암아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 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렘 23:27).”
사탄은 나를 안심시킨다. 안 와도 그만이지 뭐, 싶다.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나는 할 만큼 했다. 그럼 됐지 뭐. 관둬라, 하고 마음을 편히 갖게 한다. 얼른 채널을 돌려 한 번 히히거리며 웃으면 그만일 정도로 마음을 가벼운 데 둔다. 항상 보면 나를 못살게 구는 건 하나님이시다. 나더러 어쩌라는 것일까? 끙, 하고 돌아누우며 우울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28).”
아, 그 차이가 한 끝이구나. 겨와 알곡은 한데 붙어 있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9).” 말씀 앞에 나는 고개를 숙인다. 나는 할 수 없어서 주를 바란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헤아려 알기를 바란다. 결과는 그렇게 아이는 오지 않았다. 유야무야 없는 게 될 것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힐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도 못할 어느 지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길어 올리신다. 반드시 그러신다.
그때에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그러므로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사람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지로다(11).” 다만 나는 오늘에 두시는 이 상황으로 주를 바란다. 아이는 오지 않을 것이고 아이엄마는 선을 그었으며 나는 시무룩하여 누구를 생각하다 지친 마음에 주의 이름을 부르며. 그러는 동안 해는 지고 바람은 불고 날은 기울었다 새 날이 오며, 저 어디쯤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그러므로 나에게 필요한 것은 투철한 신앙도, 확고한 믿음도, 흔들리지 않는 다짐도 아니라 말씀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꿈을 꾼 선지자는 꿈을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가 어찌 알곡과 같겠느냐(렘 23:23-24, 28).” 그리하여 나는 변모할 것이다. “진실로 사람의 노여움은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여움은 주께서 금하시리이다(시 76: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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