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
예레미야 34:11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
시편 87:5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씀이 요즘 부쩍 마음에 와 닿는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그러려고 그러는 게 아니라 그리 되게 하시니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주 앞에 서면, 나만큼 내 원칙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그러지 말아야지, 했던 걸 또 하고 있을 때면 말이다. 나는 아이들과 수업할 때가 좋다. 조금은 버릇없이 막돼먹은 행동에도 불쾌하지가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다음 행동을 계산하지 않는다. 순수한 것이다. 그래놓고는 바로 용서를 구한다. 그리곤 또 그런다. 악의적이지 않다.
나만 안다. 겉으로 보이는 인상과 실제의 나는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이렇듯 글로 표현되는 나와 실제의 내가 같을 수 없음을. 아무리 정직하게 글을 쓴다 해도 보이는 단면으로 내 속까지 죄다 까발려서 보여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지면이 모자라다. 그래서 더욱 주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바라고 구하는 수밖에. 거짓을 꾸며 말하지는 않겠으나, 은연중에 보이는 나의 모습을 의식하는 순간 ‘아이다움’은 사라진다. 정직은 묘연하다. 정직도 은사라. 주가 더하시지 않으면 끝내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또 거역이다.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렘 34:11).” 참 지겹다. 말씀을 읽다보면 어찌 이 모양일까? 싶어 신물이 난다. 한데 내 이야기로 가져오면 내가 더하다. 개처럼 거듭 또 한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잠 26:11).” 또 똑같은 근심에 심통에 화에 짜증에 불안에 염려에 갈등에… ‘뜻이 변하여’ 하루에도 쉼 없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내 안에 주를 경외하는 마음을 주소서. 경외는 무서움과 다르다. 같은 두려움이지만 뭐랄까, 오싹한 느낌 같은? C. S. 루이스는 이를 두 방에 각각 있는 맹수로 유령으로 비유하였던 적이 있다. 둘 다 무섭다. 우릴 두렵게 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두려움이다. 영적인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누미노제’ 곧 ‘어떤 의미’에 대한 경외다. 오싹함.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계 1:17).”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 발 앞에 엎드리게 되는.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나 혼자 지레 겁먹고 이실직고하는. 또는 뉘우쳐 용서를 구하는. 삭개오처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저절로 그리 되는. 이건 단지 살 궁리를 위한 게 아니다. 죽어도 좋사오니, 그리하는 게 옳다고 여기는 신비다. 이상한 순종이다. 싫은데 하게 된다. 애가 싫은데 그런 애를 보듬는다. 버릇없고 되바라졌는데 따뜻한 시선으로 대하게 되는.
어쩌면 종교란 그런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본래 자신의 주인 되시는 이를 알아보는 유전인자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 그 실체에 대하여 경외감을 갖는 것. 이를 무시하고 또는 무디게 하는 것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게 TV나 게임이겠다. 게임 산업이 통제 불능이 되었다. 미디어시장이 방대하다. 사람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의 존재는 약화되고 영적인 소재까지 자본시장에 잠식되었다. 도깨비와 사랑에 빠지고, 다시 태어나 다른 종의 생명체로 살아갈 궁리를 하게 만든다. 하나님이 우스워진 것이다.
경외감의 상실이 변형되고 기이한 영적인 세계를 확장하였다. 이런 데 무슨 카페가 되겠나? 싶었는데 며칠 전부터 ‘사주카페’를 표방 ‘신점’을 봐준다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사주궁합 만원, 운세 이만 원. 친절한 요금표를 내걸고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 걸으면서 나는 생각하였다. 저런 게 되겠나? 싶다가도 나도 저런 신통력이 있으면 좋겠다,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한 것이다. 미련하기는. 우린 얼마나 경외감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지. 심지어 부모와 선생의 권위도 땅에 떨어진지 오래다.
걷기에 참 좋은 날씨다. 두서없는 생각이 밀렸다 스러지는 것을 그냥 두었다. 나는 누구보다 나의 가벼움을 통탄한다. ‘사주카페’를 보고 나도 저런 신통력이 있었으면, 하고 상상하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즐거웠다.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부흥하는 상상도 하였다. 신비한 목사가 신통력을 부려서 말이다. 이처럼 ‘신령한 힘: 누미노제 Numinous Power’를 이용하는 게 사이비종교다. 이단이다. 사이비도 이단도 아닌 획일적인 목사 중심의 부흥교회다. ‘비도덕적인 종교와 비종교적인 도덕’이 혼재된 세상이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시 11:7).” 나는 이와 같은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절망한다. 내가 어떤 수고와 애씀으로도 이를 이룰 수 없다는 데서 말이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13:3).”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보이는 나와 실제의 나는 다르다. 나만 안다. 아니, 나도 나를 속이려 든다. 금세 나를 부추겨 나는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게 만든다. 너 때문이다. 이게 다 너희들 때문이다.
두렵건대 내가 사망을 잠을 잘까 하나이다. 이게 뭐 어때서? 하고 나면 내 안의 ‘어떤 의미’가 나를 찌른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 저 혼자 송구하다. 부끄러운 것이다. 이를 경외감이라 한다. 다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는. 그렇다면 또 어떤 애씀과 노력으로도 나는 결코 선할 수 없다는 것에서 주께 엎드리는 수밖에.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16:1, 38:21).” 아니면 다른 더 좋은 수가 있겠나?
아이들이 돌아가고 C. 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를 읽었다. 들어오는 출구 쪽 사무실에서 역한 냄새가 흘러나와 방향제를 사다 여기저기 두었다. 딸애 퇴근 시간에 맞춰 내려가 멸치국수를 사먹었다. 새로 팀장이 구성되고 정규직 직원들은 회식을 하는데 계약직들은 빠졌단다. 현실은 냉혹하다. 그 팀에 꼴랑 두 명인데, 그 정도 마음 씀도 모자라는 세상이다. 서러워할 거 없다. 나는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것도 신학교란 데서 그 정도니 일반 직장은 오죽할까. 위로하는 차원에서 멸치국수를 사주는 애비의 신세도 처량했다.
사는 게 참 팍팍하다. 다들 겨워한다. 사느라 진이 빠진다. 저도 또한 어쩔 수 없던 것이겠지. 서러워할 거 없다.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멸치국수 곱빼기를 먹었는데도 허기졌다. 남의 사무실에서 냄새가 난다고 방향제까지 사다 놓아준 게 금세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한계다. 기껏 종들을 풀어주어 자유하게 하였다가 도로 잡아다 노예로 삼는, 저들의 불순종이 낯설지가 않다.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렘 34:11).” 사느라 사는 일은 팍팍할밖에.
내가 안간힘을 써야 하는 세상이란 게 신점이라도 봐줘야 몇 푼 안 되는 커피 한 잔 팔아서 먹고 살게 아니겠나. 사주궁합 만원, 운세 이만 원. 어느 교단이 귀신론을 운운하여 사람들을 자극하고 ‘어떤 두려움’을 역이용하며 교세를 넓히더니 요즘 대세인 연예인을 풀어 삐끼로 삼다 세간에 화제가 된 모양이다. 어제 종일 입방아 오르는 어린 배우아이나 교단 꼬락서니나, 한 몫에 싸잡혀 주의 이름이 막말의 논란에 서는 걸 보면서 개탄하였다. 거나 거나 뭐가 다른가. 온전히 주를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한 시절이다.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너희 조상들이 내게서 무슨 불의함을 보았기에 나를 멀리 하고 가서 헛된 것을 따라 헛되이 행하였느냐(렘 2:5).” 아, 하나님의 괴로움이 느껴지는 것 같다.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2).” 순전함으로 주를 바라며 살 수 있었으면.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의 도로 죄인들을 교훈하시리로다(시 25:8).”
마음은 요지경이라 하루에도 수십 번은 뒤집어지지만,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묵묵히 주만 바라기를. “시온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 저 사람이 거기서 났다고 말하리니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하는도다(시 87:5).” 오늘 시인은 노래하는 것이다. 지존자가 세우리라.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존자가 친히 시온을 세우리라.’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편 전문.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 (0) | 2017.09.30 |
---|---|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0) | 2017.09.29 |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0) | 2017.09.27 |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0) | 2017.09.26 |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0) | 2017.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