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2-3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시편 86:12-13
누굴 의식하고 무얼 염두에 두고 묵상 글을 쓸 수는 없겠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나 하나로 벅찬 생이다. 면구스런 표현이지만 살기 위해 쓴다. 전날의 일을 돌아보고, 말씀에 비춰 나는 부끄럽다. 염치없고 송구하고, 또 환멸이 수치가 밀려든다. 어떤 기대도 가질 수가 없다. 아내는 돈 되는 글을 썼으면 하고, 나는 종종 어디에 기웃거리다 그만둔다. 나 하나로도 힘에 겨운 것이다. 내가 제일 어렵다. 한데 누구더러 뭐라 한들.
의기소침한 하루였다. 왜 그런지, 일일이 그 이유를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아프고 갑자기 어깨가 결리고 허리가 아픈 것처럼 ‘왜?’ 하는 질문 앞에 어떤 이유를 유추할 수 없다. 이래서 저런가? 싶다가도 그게 어디 한둘인가. 그럼 얘 때문인가? 싶다가도, 그게 또 어제오늘 일인가 말이다. 공연히 아무도 나오지 않는 빈사무실들이 야속할 정도였다.
그렇구나. 내 안에 성령을 모시지 않으면 오히려 깨끗이 비우고 청소한 마음이 더 위험한 것이다.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눅 11:25-26).” 말씀 앞에서 잘못을 뉘우칠 수 있다. 묵상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그릇된 삶을 들어낼 수도 있다. 모처럼 먼지를 탈탈 털어내듯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을 말씀 앞에 내어놓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으로 안도한다면 마음은 더욱 완악하고 악랄한 자기합리로 채워질 수 있는 것이다.
무엇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주 앞에 설 수 있다. 공허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좌정할 수도 있다. 누구와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며 위로를 삼을 수도 있고, 좋은 말씀과 찬양을 들으며 어떤 위안을 얻을 수도 있다. 한데 본질은 성령이시다. 내 안에 모셔야 하는데 그게 별로 내키지가 않는 것이다. 생각보다 제약이 많이 따르기 때문이다. 전폭적으로 주를 의지하기에는 미심쩍다. 그러니 성령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보다 동조하는 편을 택한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나의 주인이어야 하지 않겠나! 내 삶이고 내 자식이고 내 돈인데….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마 11:26).” 저마다 자기 확신에 겨운 사람들이 무섭다. 목사라서 저는 오랫동안 관성에 젖었다. 모태신앙이라 누구는 평생을 교회에서 살아서 잘 안다. 배운 학식과 덕망이 남달라서 저의 귀는 닫혔다. 완고함이란 더러운 게 아니다. 누구보다 고결한 것이다. 누구 말도 들리지 않는다. 뭐라 하는 소리는 모두 사탄의 세력이다. 내 판단과 나의 기준은 전적으로 말씀에 붙들린 것이다. 나의 기도가 옳다.
성령과 동조하고 심지어 동업하는 보조를 맞추려 하는 이의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다. 성경을 봐도 모든 말씀이 자신의 논거가 된다. 근거로 삼을 구절이 너무 많다. 그러니 자신은 틀리지 않는다. 저들이 이상한 것이다. 모두가 미쳤어도 나는 정상이다. 이런,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 나는 환멸 한다. 내가 더 그런 것 같아 두렵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롬 2:4).”
회개는 내가 한 게 아니다. 선물이다. 그리 하게 하신 이의 선하심으로 나를 뉘우쳐 주 앞에 세울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얻은 값없는 은혜다. 한데 이를 자격시험에 합격한 것으로 여겨 내 판단과 내 의지로 무엇을 후회하고 돌아보아 아뢴다. 인식하고 뉘우쳐 잘못을 고하는 것을 마치 대단한 업적인 것처럼 군다. 그래놓고는 안주하는 것이다. 늘 안다. 깨닫는다. 후회하고 반성한다. 그리고 만다. 이는 회개를 멸시하는 것이다. 깨끗이 소제된 마음으로 자기만족을 삼는 것이다. 홀가분하면 되었다고 여긴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눅 19:8).” 저는 아무도 모르는데 저 혼자 저리 행한 것이다. 누가 뭐라 한 사람이 없는데 자기 안에서 그리 할 수밖에 없는 힘에 이끌리는 것이다. 결국 회개란 다음에 이어지는 행함으로 알 수 있다. 그저 실컷 울고 부르짖고 속이 후련한 것으로 치우고 만다면 도로 형편이 나빠질 뿐이다.
나 하나 건사하는 게 벅찬 사람이라, 나는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릴 수 있는 여력이 없다. 초딩 4학년 아이들 방에서 채팅을 하고 저 애들을 어르는 일로 쩔쩔매고, 한강의 소설 두 권을 읽고 사람에 대해 헉헉거리며 힘에 겨워하는 위인이다. 공연히 아내에게 심통을 부리고 혼자 뚱해 말도 않고 토라지는 사람이라, 누구를 향해 무어라 권하며 나와 같이 가자 말할 수 없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주가 나를 어찌 대하시든 주는 선하시다. 내가 아는 나는 몰염치에 몰지각하여 늘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위인이라 신뢰할 수 없다. 그 마음이 오합지졸이라 배가 산으로 갔다 들로 갔다 한다. 그러는 내 마음의 흡족함으로 주의 은혜를 가늠할 수 없다. 뭐라 하시든 주의 말씀이 의로우시다. 주의 심판이 순전하시다. 나는 늘 주께 범죄한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6-7).”
그런 나를 주가 회복시키시고 이끄셔야 할 것이다. 오늘 말씀을 그런 가운데 읽는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내가 누굴 위해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지요. 무엇을 바라며 구하는 게 얼마나 허풍스러운지요. 정작 내가 바라는 것은 나의 안녕이라. 나는 내가 배부르고 등따시고 평안하면 그만이라. 나보다 사악한 이가 또 있을까.
내가 부르짖기를 나를 용서하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긍휼을 더하시고 주의 은총을 부으소서. 나는 나밖에 모른다. 남을 위하는 마음이 또 저를 생각하는 안타까움으로 돌아서면 그만이라. 한 줌 무게도 되지 않을 동정을 사랑이라 덧대고 산다. 복도에서 누굴 만나면 친절하게 인사하지만 돌아서면 그가 나랑 무슨 상관인가. 아이들을 생각하다 또 어느 아픈 아이를 마음에 두고 안타까워하다, 내가 얼마나 위선자인지. 모두가 헛것임을 깨달았다.
늘 보면 아내는 실질적이어서, 있으니까 위해주는 거야. 돈이니까 돌보는 거고, 당장 내 앞에 왔으니까 잘해주는 거야. 난 그런 거 몰라. 아내의 말이 어디까지 허풍인지는 모르겠으나,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봐주던 한 아이가 고3이 되었다. 이번에 자소서를 같이 쓴 그 아이다. 당연히 아내를 잘 따르고 친분이 깊다. 한데 아내의 마음은 냉정하였다. 그래서 뭐? 오면 난 사랑하지만 안 오는 데 어쩌라고? 아내의 퉁명한 말이 오히려 정직하였다. 공연히 끙끙 앓고 지난 주일에도 좀 왔으면 싶었는데 오지 않아 뭐라 염려하였더니 그리 선을 그었다. 자기는 생각이 너무 많아! 아내의 단호함이 부러웠다.
그런들. 내가 아이를 생각하고, 생각이 많아 또 마음에 흘러넘친들. 그래서? 과연 나는 저 아이들을 전심으로 주의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가? 어쩌면 나는 더 교활하여서 마치 저 아이들로 인해 몸살이 날 것처럼 굴지만 정작 나 하나 건사하는 일에 더 쩔쩔매는 거 아닌가.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 3:7).” 달리 방도가 없다. 개조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찌 고쳐서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완전히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에는 어림도 없겠다.
나는 그렇게 원론적인 물음 앞에 멍하였다. 과연 나는 주를 영접하기는 한 것일까? 약간 강박적인 데가 있어서 나는 청소하는 걸 좋아한다. 이번 주간엔 특히 중딩 애들이 시험기간이라 출입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혼자 있으면 쓸고 닦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정돈을 한다.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한다는 일은 그런 게 아닌가. 쓸고 닦아 내 안의 먼지를 떨어내듯 주 앞에 아뢰며 나의 잘못을 고한다. 염치없고 부끄러워 속상하기 그지없다. 자, 그럼. 그리고? 도로 어제와 다를 게 없고 또 같은 일에 같은 마음을 두고 어지럽히는 것이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 성령으로 산다는 건 뭔가 대단하여 뿅뿅 날아다니고 권능을 행하며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는 그런 요란함이 아니다. 그저 아무런 변화도 없는 듯 매일 똑같은 일상에 젖어 사는 것 같지만,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언제부턴가 내 안에 의연함이 또는 죄를 싫어하는 반응이 남달라진 것이다. 주를 사모하는 마음이 또 나를 못 견뎌하는 마음이 전엔 대수롭지 않던 일에도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성령과의 동조가 아니다. 동업이 아니다. 내 걸 모두 내어맡김이다. 나를 포기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다. 고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엡 4:13).” 내 의지로는 단 한 시도 살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오늘 다윗의 기도도 그래서다.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시 86:12-13).” 나보다 더 깊은 스올이 또 있을까? 나 자신보다 무거운 짐이 또 있겠나? 나는 나를 책임지고는 견딜 수가 없다.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1).”
그러므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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