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전봉석 2017. 9. 29. 07:35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예레미야 35:16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시편 88:8

 

 

 

기분이 좋을 때는 내 스스로도 인자하고 온화하다고 여긴다. 건드리지만 않으면, 이만하면 나도 친절하고 자비하다고 생각한다. 짜증만 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인 줄 안다. 굳이 하나님을 바라고 구하지 않아도 되는 형편이면 주를 바라는 마음도 그저 소양을 쌓기 위한 덕목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격이다. 그러다 무슨 일이 터지면, 뜻하는 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으면, 누가 거슬리면 평소 가지고 있던 마음과는 소양지판이다. 좋을 때와 나쁠 때가 천양지판인 것이다.

 

안 믿는 이방 민족 레갑의 족속도,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렘 35:14).”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인데도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하며 사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하물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할 줄 알며 의지한다는 삶이 오히려 꾸미고 덧대 속임을 다하며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원, “레갑의 아들 요나답의 자손은 그의 선조가 그들에게 명령한 그 명령을 지켜 행하나 이 백성은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16).” 스스로 겸손하다 온전하다 생각하는 것만큼 만성적인 교만은 없는 것 같다. 이만하면 됐나 싶을 때, 하나님은 내 속을 뒤집어놓으신다. 가라앉았던 온갖 더러움이 부유물처럼 떠다닌다. 내 안엔 미움도 시기도, 누굴 비난하고 탓하는 마음도 여전한 것이다. 구원은 죄를 소멸해주시는 게 아니라 그 죄를 직면하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으로 전에는 숨겼다면 이제는 주 앞에 내어놓는 일이다.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고백은 거짓과 위선일 뿐이다. 내가 잘못한 것은 알지만, 하고 이어지는 자기 항변은 그래서 쓸모없다. 위선보다 달콤한 위선은 없는 것 같다. 그게 뭐지? 싶을 때 오늘 날 우리나라 정치판을 들여다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나도 그렇지만 당신은 더해, 하는 식의 반성은 가증하다. 그럴 때면 문득 드는 생각이 죄의식 없는 그리스도인은 가짜다. 누구와 견주어 나도 잘못했지만 저만큼 잘못한 누구보다 낫다, 는 식의 태도는 옳지 못하다.

 

이방 족속도 저 정도인데 하물며 주를 바라는 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할까. 오늘 말씀은 송구함을 더해 부끄러움을 두시는 것 같다. 설교원고 초안을 잡고 겅중거리듯 책을 읽었다. 아내 부탁으로 오후께 은행에 갔다 오다 옆 사무실 사람을 만났다. 선생님이 제일 부러워요. 저는 뜬금없이 말했지만 그 의미는 알 것 같았다. 지나가는 말이니까 애써 말을 이을 건 아니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다 저녁에 건물주인이 사과 한 박스를 가져왔다. 추석 명절을 잘 쇠라는 인사였다.

 

덧붙여 이런저런 자신의 근황을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일층 어디 공장형 사무실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집도 내놨는데 저쪽 김포 쪽으로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하는 일이 어떻고 길게 이어지는 말의 결론은 지금 자기 사무실로 우리 글방을 옮기면 어떨까, 하고. 늘 비워두는 형국이니 전체적으로 여길 좀 관리를 해주시면 어떻겠나, 하고. 잠깐씩 와서 봐주는 누굴 그만두게 하고, 우리 월세를 얼마쯤 낮춰드릴 테니 그리 하시겠냐, 하고….

 

저의 방은 정중앙에 위치하고 네모반듯하다. 들어오면서 정 위치라 몫이 좋다. 물론 그 안쪽에 전기단자며 인터넷, 각 방의 에어컨 실외기 등이 설치 돼 있어 관리가 필요하다. 또한 매월 도래하는 관리비를 총괄하여 네 사무실로 배분하는 걸 좀 맡아달라는 것인데, 그거야 뭐. 나는 매일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 같은 시간에 출근을 하듯 나와서 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듯 집에 간다. 종일 누가 오든 안 오든 점심 먹으러 집에 다녀오는 한 시간 남짓 외에 혼자서 사무실을 지킨다. 그러기를 벌써 두 해가 다 되었다.

 

나야 뭐. 나는 저의 말을 들으며 하나님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대체 뭘 하시려는 것일까? 300에 30. 우리 형편에 그 정도 가격이 제시되어서 이곳으로 왔다. 다 좋은데 창이 없어 뚱했더니 오늘 우리 자리를 이상하게(?) 주셨다. 계약 기간도 끝나지 않은 이가 다른 호실로 옮기겠다고 하여 이 자리가 난 것인데. 그리고 이젠 주인이 쓰던 가장 좋은 자리에 것도 월세를 줄여줄 테니 모든 관리를 해주는 차원에서 옮기실 수 있겠냐고? 나야 뭐, 하고 나는 싫지 않았다. 흔쾌히 내 안에 만족함이 더해졌다.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주인 입장에서는 것도 사는 집까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 사업을 운영할 생각이다 보니 현재 이곳이 난감했던 것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을 자꾸 운운하며 나를 들먹거리는데, 나야 뭐.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교회 아닌가! 터무니없게도 나는 언제부턴가 그런 확신이 있었다. 아무도 예배에 나오지 않아 아내와 딸애만 같이 예배를 드리면서도, 아이들이 좀 오려나? 하고 잔뜩 기대했다가 번번이 여의치 않을 때도, 누가 같이 와서 교회를 함께 이뤄가려나? 하고 바라고 구하다가도….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나는 이 말씀에 기초한다. 아무도 안 오면, 그래서 교회가 아닌가? 내가 빌빌하면 그래서 목사 아닌가? 그러니까 교회도 주님이 세우시는 것이고 나도 주님이 세우신 것 아닌가 말이다. 망하게 하셔도 주가 하실 것이고 흥하게 하셔도 주가 하실 것이다. 내가 빌빌거려도 주가 두시는 것이고 뭐에 쓸모가 있어도 주가 쓰시는 것이다. 이런 배짱? 만약에 그게 아니면, 나는 더 이상 물러설 때가 없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말씀은 나의 항변이기도 하다.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시 88:8).” 내가 뭐 대단하고 숭고해서가 아니라, 솔직히 할 게 없어서 성경을 본다. 이나마 묵상을 글로 쓰는 것도 안 하면 죽을 것 같아서 한다. 혼자 너무 심심해서 질질 끌 듯 며칠씩 설교원고를 더듬거린다.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기도한다. 여러 일을 생각하다 지겨워 주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게 주만 바라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말씀 묵상이, 처절한 삶이 위로가 되어 오스왈드 챔버를 읽고 또 읽는다. 폴 투르니에가 씨름한 말씀과 C. S. 루이스가 붙들려고 했던 그리스도를 바란다. 말씀만으로 꽉 차는 존 파이퍼의 책을 곳곳에 메모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평생이 내 것이기를 바란다. 허튼소리 없는 말씀만으로 씨름하는 이들을 찾아, 저들 설교를 생애를 말씀을 읽고 또 바라며 꿈꾸는 것이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말이다.

 

그렇지 않나? “주께서 내가 아는 자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내가 떠나온 것인지 저들이 떠나간 것인지 나는 모른다. 중요한 건, “나를 그들에게 가증한 것이 되게 하셨사오니” 언제부턴가 서로의 공통점이 잃었다. 같이 놀게 없어졌다. 서로 바라는 곳이 다르다. 사는 방식이 세계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젊은 날을 그처럼 희희낙락거렸는데 더는 아닌 게 되게 하셨다. 나는 저들에게 가증하게 되었다. 왜 그러고 있냐? 한심하게들 여긴다. 곧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딱 내 심정이지 않나.

 

의아해하는 저들에게 설명이 되고 싶지는 않다. 일일이 이해를 구할 자신도 없다.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때론 모른다. 지금 뭐하고 있나, 싶다.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닌가, 싶다. 그런데 좀 그러려고 하면 하나님이 막으신다. 그게 정확히 느껴진다. 왜지? 하는 설명 따위를 더할 수 없다. 언제부턴가 도로 안정제를 먹어야 하고,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도모하는 게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 내가 하는 일은 갇힘을 당하는 것밖에. 갇혀서 나갈 수가 없나이다.

 

“여호와여 오직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이르리이다(시 88:13).” 할 게 없어서 기도한다. 면구스럽지만 사실이다. 심심해서 성경을 보고, 뭐라도 할 게 없나? 싶어서 누굴 위해 간구한다. 그런 나를 보고 주의 마음은 어떠실까?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20).” 내가 주께 측은한 것이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호 11:8).” 아, 좋지 않나? 그럼 됐지 않나? 더 무얼 바랄까? 주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여 나를 돌아보심인데 더 무얼 견주어 바랄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나는 가만히 말씀만 붙들 뿐이다.

 

목사님이 좋다고 하시면 제가 일을 그리 추진할까 하고요. 장황한 설명 끝에 사장의 말은 나를 웃게 하였다. 아니 왜 자기 사업을 운운하며 이런저런 사정을 들어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내 뜻이 중요하게 되었나? 이래도 저래도 나는 그저 여기에 있는 사람일 뿐인데. 그리 하시라, 나는 말하였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었다. 저녁께 아내에게 그와 같은 내용을 설명해주며, 우린 그저 신기하였다. 300에 30이 아니었다면 재작년 3월, 우리가 이곳으로 옮겨올 엄두를 냈었겠나? 가만 있자. 주가 하신다. 우린 그저, 맡기신 날을 사는 것이다.

 

보내시는 아이들마다 어쩜 그럴까 싶게 문제가 있고, 성적은 바닥을 치고, 부모와의 갈등은 극에 달해 한심하기 짝이 없는데. 어쩌겠나? 저 애가 잘났고 그 가정이 튼실하면 우리에게까지 맡기시겠는가 말이다. 참 감사한 건 애들이 시험을 다 잘 봤다. 처음 올 땐 30, 40이 가장 좋은 점수였던 애들이 이젠 다들 80, 90을 넘긴다. 한 애는 수학을 하나 틀렸다! 기적이지 않나? 학원을 전전긍긍하며 그 애 엄마에게는 애물단지였는데. 아내는 으쓱하며 웃었다. 특히 시험 때면 라면을 끓여주고, 샌드위치를 해주고, 더러는 속엣 얘길 들어주는 것뿐이었는데. 아, 정말이지 하나님이 하신다.

 

우린 다만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4).” 다른 거 없다. 때론 투덜거리고 실의에 빠져 허우적거리듯 회의가 밀려오고 갈등이 쌓여 징징거리기 일쑤지만,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나는 주 안에 갇혔다. 돌아갈 곳이 없다. 되몰릴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하며 날마다 드려지는 우리의 고백 위에 주의 교회를 세우리니, 세우시는 것도 이루어 가시는 것도 주께서 하시라. 주가 하실 수 있도록 나는 그저 묵묵히 주만 바라보는 수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 그렇지! 아버지, 나의 하나님이시지!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시 13: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