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전봉석 2017. 9. 26. 07:28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

예레미야 32:27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시편 85:8

 

 

 

선지자적인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목회는, 성도는 제 살 궁리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먹이시든 입히시든 주가 인도하심을 따르는 게 선지자의 삶이다. 말씀을 중심에 두고 그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며 선포하는 일이 말이다. 저들이 듣고 안 듣고, 따르고 안 따르고 하는 일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우리 몫이 아니다. 선지자는 나서서 응징하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이나 생각을 배제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께 받은 것으로 전하며 증거하고 이행하며 산다. 그런데 그러기가 쉽지 않다.

 

사는 데 따른 비용이 너무 과중하다. 돈이 있어야 뭘 해도 한다. 그러니 헌금을 내도, 시간을 들여도, 마음을 써도 실제 우리의 중심은 돈에 웃고 돈에 운다. 교회가 부흥하는 데도 돈이 있어야 하고 그러자면 사람이 모여야 한다. 주의 이름을 운운하지만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좇는다.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배 방식도 그에 쓰이는 여러 방편도, 실은 사람이 중심이 되었다. 이를 리드하는 목사를 영웅으로 만들어서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하시는 첫 번째 일은 그와 같은 탐욕을 알게 하신다. “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 119:36).” 이게 아닌데, 싶은. 그래서 말씀을 사모하게 하신다. 주를 경외함이란 진리를 행함에 있기 때문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86:11).” 일심으로, 이와 같은 마음으로 함께 모이는 것이 교회를 이루는 게 아니겠나? 두 마음을 품지 않게 말이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90:14).”

 

유난히 긴 하루였다. 명절을 앞두고 차량 점검을 들어갔다가 폭탄을 맞았다. 어디가 어떻고 하며, 무려 65만원의 수리비가 들었다. 우측 쇼바가 부식되어 부러지고, 네 바퀴의 제동장치인 브레이크 패드가 마모되었다고 하니 그걸 그냥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차 수리를 맡겨두고, 태워다 주겠다는 걸 좀 먼 거리를 슬슬 걸어볼 생각이었다. 반쯤 왔을까? 교회 열쇠가 자동차 열쇠고리에 꽂혀 있어서 다시 되돌아가야 했다. 남들은 2, 30분이면 당도할 거리인데 나는 무려 한 시간 반이나 걸려서 왔다 갔다 한 셈이다.

 

남들에게 수월한 일이 내겐 늘 버거운 일이다. 어릴 땐 그게 늘 속상했다. 특히 같이 뭘 해야 할 때, 일일이 사정을 말하고 양해를 구하는 일이 구차했다. 그러느니 자진해서 열외를 자원했고 그것은 언제나 외로움으로 가중됐다. 여전하여서 어쩌면 그 다툼은 내가 죽어서야 끝이 날 일인가 보다. 열쇠 때문에 다시 돌아갔다 오면서 투덜거리는 마음이 서글픔으로 다가오기도 하였다. 몇 번을 그늘에 멈춰 서서 마른 숨을 뱉어냈다. 땀이 흥건하게 등짝을 적셨다가 서늘한 기운이 한결 좋아졌다. 아! 감사란 고된 마음 뒤에 따르는 환희다.

 

한 발 한 발 땅을 디디며 내 발로 걸어서 저 먼 길을 오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가 새삼스러웠다. 느릿느릿 내딛으며 푸르른 가을날을 만끽할 수 있었던 것도, 오랜만에 고단한 즐거움이랄까 환희를 느꼈다고 하면 너무 낭만적인가? 오후에 차 수리가 다 됐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다시 한참을 걸어서 차를 찾으러 갔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내가 택시 타고 가라며 준 5천원을 쓰지 않고 그냥 돌려주었다. 산다는 게 사역이다. 주님이 내게 두신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 비록 느리고 더디고 불안정하여 고통이 따르더라도, 인내하는.

 

“주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3:5).” 돌아와 교회에서 남은 오후를 보낼 때, 선지자적인 사명이란 이와 같이 주어진 삶에서 주의 말씀을 붙드는 게 아닐까, 생각하였다. 좀 더 나은 삶으로 개선하는 일은 생활여건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이를 마주하는 마음의 일이고 감사의 무게였다. 그리하여 내 안에 소원을 두시는 것이겠구나.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처음에 읽을 땐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연상하였다. 두 번째 읽을 땐 달음질하는 경주자의 자세를 생각하였다. 세 번째 읽을 땐 우리에게 약속하신 상을 바라보았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25).” 우리의 결승점은 이 땅이 아닌 것이다.

 

목사가 제 살 궁리로 헌금을 운운하고 교회 운영을 앞세워 성도들을 끌어들이고, 그러자니 더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해 버젓이 세상 운영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는. 그래놓고는 한다는 소리가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로 나오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는 게 아니겠나? 몇 명을 모은들, 그래서 어떤 부흥을 꾀한들, 그것으로 과연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겠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하나님의 나라에서 공동수상은 없다. 교회마다 구역별로 모여 서지도 않는다. 하나님과 나다. 계급장 떼고 서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26-27).” 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일인가. 기껏 전파한 후에 저는 버림을 당할 수도 있다. 전파가 목적이면 하나님은 구르는 돌을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버려진 막대기로도 충분하다. 결국은 말씀이다. 말씀에 참여하지 못하면 모든 게 허사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23).”

 

나의 나 된 게 누구에게보다 내게 값진 이유는 그래서이겠다. 무엇에 발끈하면 그게 나의 약점이었다. 어떤 이의 무엇에 상처를 받는다는 건 내 안에 예민한 무엇, 세상에선 이를 콤플렉스라 하고 또는 트라우마라고 하여 고치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 매도한다. 한데 나는 이제 확신하기를 내게 족한 나의 은혜다. 은혜란 개별적이어서 내 은혜를 아내와 나눌 수 없다. 자식에게 물려줄 수도 없다. 내 것은 내 은혜다. 다만 나의 은혜로 저들도 주의 은혜를 바란다. 그러느라 깎이고 쓸려 연일 생채기를 덧내기도 하면서, 그 쓰라리고 아픔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은혜다.

 

이에 가장 주옥같은 고백이 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5:10).” 오직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는 툴툴거리다 발견한다. 모질게 휘감는 마음으로 사모한다. 원망이 변하여 감사가 나오는 일은, 끊어질 듯 아픈 허리를 펴고 그늘에 섰을 때 곤죽으로 흘러내린 땀방울의 무게만큼이나 시원하였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때론 고역이라 이를 감당하는 일에서조차 힘에 겨워 부질없이 낙담하기 일쑤지만, 그것으로 또한 주의 은혜를 만끽할 수 있다는 이 엄연한 아이러니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땀에 옷이 흠뻑 젖어서 들어오자 아내는 안 됐다는 표정으로 오후께 차를 찾으러 갈 때는 택시를 타라고 일렀다. 그럴 거였다. 한데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나는 나의 연약한 육신으로 감사를 배운다. 남들은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도 나는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나는 다시 걸어서 차를 찾으러 먼 길을 갔다.

 

별 것도 아닌, 대수로울 것도 없는, 하찮고 보잘것없는, 나는 나의 일상에서 성령의 내주임재하심을 목격한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내 수고와 애씀으로도 아니고 누구의 격려와 위로로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령은 오늘 내게, 이를 내게 알게 하시려고 때론 나의 약함을 내버려두신다. 상처에 손을 대신다. 꼭꼭 숨겨두고 있던 수치와 부끄러움을 들추신다. 그 밑에 쓸어두었던 온갖 더러움을 털어내게 하신다.

 

가정예배를 드리다, 나는 사는 게 사역이다. 살아 있는 게 주의 일이다. 주신 바 묵묵히 두신 이를 바라고 구하는 게 사명이라 말하였다. 아내는 그저 혀를 끌끌 찼지만, 저마다 은혜는 그와 같이 개별적인 것이다. 오늘 지금 이 순간, 매순간의 은혜로 사는 것이다. 이를 오늘 말씀은 일깨우신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터지고 깨져 쓰러지고 넘어지게 하셨다가 싸매시고 일으켜 세우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욥 5:18).” 그리하여 “주는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14:17).”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8).” 이런 상황에, 하필 또 이런 지경에, 왜 나를 들들 볶나 싶은 이때에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숨이 턱까지 몰아 차고 사는 데 겨운 일이 남에게 총구를 겨누며 화풀이 하듯 비난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때에,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 그러자고 어려움을 즐겨 사용하신다. 곤고함으로 놓아두시기도 하신다.

 

분명한 건, 이를 통하여 이 악한 세상에 휩쓸려가지 않게 하심이다.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 다시 정신 차리고 보면 말씀뿐이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남은 날 동안에 나의 구원을 온전히 이루게 하시려고,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13).”

 

그래서 오늘 말씀은 분명히 일깨우신다.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할 수 없는 일이 있겠느냐(렘 32:27).” 고로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8).”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