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
예레미야 39:18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시편 92:5, 12
결국은 그리 되었다. “바벨론의 왕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눈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였고 왕이 또 유다의 모든 귀족을 죽였으며 왕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고 사슬로 결박하였더라(렘 39:6-7).” 그리 경고하여 항복할 것을 명하였으나 반바벨론파 방백들의 말을 듣고 ‘우물쭈물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주의 말씀에 귀 기울여 선지자 예레미야의 선포를 귀담아 들었던 시드기야 왕의 내시 구스 사람 에벳멜렉은 어찌 되었나. “너는 가서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이 성에 재난을 내리고 복을 내리지 아니하리라 한 나의 말이 그 날에 네 눈 앞에 이루리라(16).”
저를 향해 이어지는 주의 축복이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한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18).”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다. 화와 복이 우리 앞에 있다.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인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애 3:38).”
말씀 붙들자. 말씀으로만 붙들자. 이 아침, 다시금 일깨우신다. 잠자리가 낯설어서 그런지 몸은 피곤한데 일찍 깼다. 어떻게 왔나 싶게 모처럼 설악산까지 먼 길을 왔다. 추양하우스에서 이번 추석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 끝없이 이어지던 양양고속도로가 힘에 부쳤다. 떠나기 전, 친구의 조카아이가 경찰서에 잡혀 간 이야기, 마약을 한 줄 알았는데 정신과치료를 받고 있었다는 것, 저의 전과기록을 경찰은 믿어주지 않았고. 그래서 늦었지만 가족들이 달려가 정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하였다는. 그런데 왜 며칠 구치소에 있게 됐는지는 이해가 안 됐다.
오면서 휴게소에 들러 잠깐 그런 통화를 나누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벌 받는 거야. 하는 친구의 도식을 나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야. 하는 등식으로 바꾸었다. 벌의 개념으로 이해해서 어른들이 자책한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아이 일을 통해 개개인에게 ‘얘야!’ 하고 부르신다는 것. 말을 걸고 계신다는 것. 살아가는 방식을 태도를 되돌아보게 하신다는 것. 그리 말해주고 싶었다. 어떤 일 앞에 우린 애매한 자책으로 더 먼 길을 택한다.
아무튼. 불편한 잠자리에서 돌아누울 때마다 나는 아이를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소년원을 몇 번 들락거린 아이였다. 친구의 오빠인 아이아빠는 평소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면서도 이런 일만 터지면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일찍 이혼을 했고 아이들이 엄마와 살고 있다고 들었었는데. 이래저래 저의 늙으신 모친이 시름이 깊었다. 둘째 딸을 앞세울 때도 그게 본인들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였던 말이 귓가에 남았다.
그런 논리로 보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용지물이 된다. 죄값이 아니다. 저들이 선택한 결과다. 그리하여 벌을 받는 게 아니라 그리 여겨 우물쭈물한 결과다. 시드기야 왕은 반바벨론파의 눈을 피해 예레미야를 만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어찌 해야 하는지 그 뜻을 말이다. 늘 보면 현실은 녹록치 않아 차일피일 미룬다. 설마, 하는 것이다. 이 유혹은 참 무섭다. 죄는 아니다. 살면서 유혹을 당하지 않고 지내는 인생이 있을까?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다.
하나님이 그리 이끄시기도 한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막 1:12).” 그러할 때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하셨나. 머뭇거림이 없으셨다. 단호하셨고 확실하셨다. 주저하지 않으셨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출세와 성공을 위한 대로에서, 영광을 보장하는 바에도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13).” 우리에게도 다를 바 없으시다. 성령이 내주임재 하신다는 건 바른 길로 인도하심이다.
우물쭈물하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남의 인생을 두고 그리 깨달았다면 스스로는 자중해야 하는 것이다. 돌아보아 주의 뜻을 사모하며 그의 말씀을 붙들고 가야 하는 일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시 92:5, 12).” 나는 이제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 확신한다. 내게 행하신 주의 크신 일을 확신한다. 친구에게도 무슨 배짱으로 그리 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언제 괜찮으면 조카아이와 같이 오라고 일렀다. 내가 봐서 뭐하게? 그게 아니라 내가 아는 주의 크신 일을 알려주고 싶어서 말이다.
주를 의뢰하는 일은 종려나무 같다. 레바논의 백향목 같다. 튼실하다. 거침이 없고 곧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아니 믿음이란 항상 시험을 통과하면서 드러난다. 시험이 없는 믿음은 없다. 이는 우리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야말로 늘 어눌하여서 떠나기 전부터 오는 길에도 내내 어려움을 혼자 짊어진 듯 어려웠다. 아내와 딸애까지도 때론 어렵다. 같이 어딜 움직여야 한다는 게 여간 부담이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터널을 통과하면서는 어찌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공포심마저 느꼈다. 이러한 어려움은 누구도 다를 게 없다. 다 저마다의 사연과 고통과 어려움을 마주하고 산다. 한 아이엄마는 명절 인사는커녕 밀린 교육비도 못 내고 쩔쩔맸다. 아내가 아이 일로 아이엄마와의 통화했던 내용을 말해줄 때, 잘해줘! 하는 나의 입버릇 같은 말이 그래서였다. 주의 은혜를 아는 우리로서 먼저 친구의 고단함을, 아이엄마의 고달픔을, 저마다의 어려움을 헤아려 주의 마음으로 잘해줘야 한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눅 6:38).” 하나님이 내게 어려움을 그냥 두시는 데는 그런 숨은 뜻이 있으셨다. 나의 믿음의 성장을 바라신다. 늘 주를 바라는 마음이 온전하기를. 하여 우물쭈물하지 않기를. 그런다고 어려움이 없어진다는 게 아니라 그러므로 주를 더욱 확신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것. 이를 주도 아신다.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히 2:18).”
그렇듯 어려움을 또는 유혹을 통과할 때마다 주의 사랑을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일의 결과가 아니라 성장의 과정이다. 그러므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그렇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2).”
그렇구나. 내가 할 일은 고통을 이겨내고 현실을 극복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좀 더 나은 삶을 향하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결과는 주의 것이라는 것. 이김은 곧 주의 것. 우리가 백날 무얼 준비하고 예비하여 미연에 방지하고 해결하려 드나,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옳거니. 이 아침, 나를 깨워 주께서 들려주시고 싶은 말씀은 하나였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니이다(시 9:10).”
내가 주를 바로 알 때 내가 의지할 게 무언지를 잃지 않는다. 친구는 혼자 살면서 그래서 조카아이를 친 자식처럼 애면글면 속 끓이며 대하는데, 풀이 죽고 한숨이 깊은 친구에게 나는 말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힘내. 하나님이 하신다. 신경 쓰고 애쓴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31:14).” 그러니까 말이다. ‘그러하여도.’ 내 비록 신경안정제를 먹고도 어떤 불안에 또 공포감에 시달려야 하지만, 비가 내리는 아침 온 몸이 아파서 얼른 진통제를 먹고 싶은 마음뿐이어도.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이와 같은 고백이 내 것이 되었다는 데 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 오늘 가족들과 같이 어디를 가고 무얼 먹고 어떻게 지내자, 하는 즐거운 일정보다 내 안에 예기불안이 나를 옥죄며 뒤흔들고 있지만, 그러하여도 그것으로 나는 주를 의지한다. 그래서 주 없이는 살 수 없다. 나의 어려움이 내게는 복이라.
주가 나를 주장하시고 주관하심으로 새로운 한 날의 삶이 복되고 감사하기를. 내 마음에 두시는 이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틈틈이 매순간 아뢰며. 그러라고 헤아려 알게 하시려고 어려움도 고난도 두시는 것임을 신뢰하며.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고 아침마다 주의 인자하심을 알리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92:1-3).” 날마다 성일이라.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내가 높이 외치리이다(4).” 그랬더니 “여호와여 주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매우 깊으시니이다(5).” 그러므로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5, 12).”
내가 성장하리로다. 내가 누구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또 나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13).” 그러므로 “그는 늙어도 여전히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니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14-1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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