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전봉석 2017. 10. 2. 07:32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예레미야 38: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시편 91:7

 

 

 

구스인 내시 에벳멜렉을 동원해 예레미야를 돌보시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막강한 반바벨론파에 의해 왕은 어쩌지 못하고, 이에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뜻을 직언하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고충도 알만하다. 복잡 미묘한 현실 한복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로 알고 이를 준행하며 사는 일이 복되다. 모든 시대마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있었던 것처럼 오늘의 역사는 또 오늘에 족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우리를 위협한다. 나름의 논리와 판단으로 정세를 살피고, ‘너는 어느 쪽이냐’는 시대의 물음에 그 처신을 바르게 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저들이 처한 상황과 나름의 어쩔 수 없음을 두고 기도한다. 젊을 때, 그 무모함을 사랑하였던 혼란의 때에 부디 주의 말씀이 저들 곁에 함께 하시기를. 믿는 자들을 곁에 두시고 항상 신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환경과 여건을 조성하여 주시기를. 한참 연애를 하는 아이에겐 그 사랑 너머의 참 사랑을 사모하게 하시고, 처한 형편 가운데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직접 목격할 수 있게 하시기를.

 

다들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멀리하고 예배를 등한시하며 말씀을 소홀히 하고 있는 이때에 하나님은 적당한 시기에 이방 사람 구스인을 동원해서라도 도우시고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며.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마음은 저 혼자 우울하였다. 마냥 답보상태인 것만 같아 불안하기도 하였다. 나는 점점 의기소침하여서 누가 왔으면 하고 바라면서도 누가 올까봐 두려워하였다. 누구도 저를 대신할 수 없을 것임을.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7-8).”

 

오로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을. 이는 곧 엄청난 값을 지불하신 것이어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아이들과 함께 글방에서 교회로, 우리로 주 앞에 나오게 하신 이의 그 어마어마한 값의 지불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결코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을 붙든다.

 

성령이 주도하지 않으시면 누구도 말씀을 받지 못하는 것을. 나오고 안 나오고, 주도면밀하게 주께서 살피시고 붙들어주실 것을. 혼자 끙, 하고 돌아누우며 생각하였다. 갑자기 추워진 하루였다. 창을 모두 닫고 심지어 난로를 꺼내다 피웠다. 가을 비 한 번에 겉옷이 한 벌이라. 세월은 정직하기만 한데 아이들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그리스도인이 돼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의 알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거였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다른 길을 모색하는 아이들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뿐이라, 가만히 말씀을 붙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9).” 살면서 사는 날 동안에 주가 나와 함께 하셨음을. 지난 날 엉망진창으로 살던 때에도 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셨던 것을.

 

그 뒤에 숨은 기도가 있었음을 나는 잘 안다. 저들의 기도응답으로 오늘의 내가 주를 온전히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물며 오늘 나의 기도가 헛되지 않을 것을. 아이를 생각하고, 애간장을 태우며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심으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 우리의 죄 됨이 복될 리 없으나 소망인 것은 주의 부르심이 여전하였다.

 

딸애는 일주일간 밀린 방송을 들으며 수업을 따라가고 아내는 곁에 앉아 아이들 수학 문제를 예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조용한 주일 오후였다. 교회에 남아 누구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님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시다. “왕궁 내시 구스인 에벳멜렉이 그들이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저로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름 무슨 판단으로 어떤 생각을 하다, “그 때에 왕이 베냐민 문에 앉았더니” 기회를 틈타 일간의 상황을 고하게 하셨다(렘 38:7).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범주의 연결고리다. 어째서 이방인 내시가 그와 같은 상황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이를 말할 수 있는 틈을 타서 왕께 고할 수 있었는지.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시 91:7).” 그렇구나, 성경의 원리는 간단하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진리로 인도하신다.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 2:20).”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저로 인하여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소리다. 성령의 내주하심이란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7).” 누가 누굴 지도하고 붙들어 주 앞에 나오게 할 수 없다. 어떤 매력이 또는 호기심으로 교회에까지 나올 수는 있었다 해도 그 안에 주를 영접하는 일은 다르다.

 

모두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주를 사모하며 그 이름을 의지하는 일은 차원이 다른 얘기다. 개개인을 하나님은 마주하신다. 목사가 선생이 교회가 어떤 프로그램이 매개가 되는 게 아니라, 성령이시다. 주께 받은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한다. 누가 알려주고 일깨워서 그리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구스인도 동원하신다. 예레미야의 처지를 하나님이 더 잘 아신다. 누구도 성령을 대신할 수는 없다. 어떤 서운함이 서러움으로 변하여 주일 오후, 나의 마음을 어렵게 하였지만, 이 아침 주께서 말씀으로 일깨우신다. 나의 사소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괜히 우울하고 힘들고 어려워서, 주님! 하고 부를 때 주가 응답하신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엡 4:3-4).” 내가 저 아이로 마음 쓰이고 속이 상해 쩔쩔맬 수 있는 게 복이었다. 그런 마음조차 잃어버리게 될 날이 오나니, 더는 누굴 떠올려도 저를 생각하면서 어떤 안타까움도 감흥도 없으니 그게 무서운 거였다. 심지어 이름조차 얼굴조차 잊어버린 후에 아무 감흥도 없이 도식적으로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저를 생각하게 되는.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지금 이 때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힘써 지키라.’ 이 또한 잃을 날이 오나니 더는 나와 상관없는 아이가, 사람이, 어떤 일이 되었을 때의 서늘함에 대하여. 한 소망 안에서 같이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7-8).” 주가 사로잡히심으로 내가 주께 사로잡힌바 된 이 비밀한 은혜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곧 내가 아이로 몸부림 칠 수 있을 때가 좋은 거다. 내가 저 아이로 인해 힘겨워할 수 있는 것이 축복인 것이다. 더는 그러지도 못할 또는 감각조차 없는 날도 오나니, 하나님 나라에 가서는 우리가 어떤 자로 만날지 알 수 없으나 이 땅에서는 그것으로 거기까지인 사이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5:17).” 혼자 끙, 하고 돌아누우며 아이를 생각하다 서러워 마음이 어려울 때,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이 말씀이 나를 붙드셨다.

 

아이로 인해 마음 쓰이고 신경 쓰는 일을 소중히 하자. 그것으로 기도하게 하시는 바 내게 두신 일의 출처를 분명히 알자. 내가 저 아이들을 생각하며 안타까워할 수 있는 것이 은혜의 특권이라.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저로 인해 드러나고 표현되어 나를 기도하게 하시는 거였다. 내 안에 소원을 두사 주를 바라게 하시는 것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그렇지. 교회로 이 곳에 세우시고 나로 하여금 이 자리를 지키게 하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감옥 뜰에 머물렀더라(렘 38:38).” 예레미야가 그러했던 것처럼 주의 사람들은 동일하였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가. 이러고 있는 게 과연 맞나. 이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어떻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나. 여러 생각이 꼬리를 물고 나를 짓이기지만 주님은 말씀하신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1-3).”

 

아, 이곳이 나에게 안전한 처소였다. 지존하신 이의 은밀한 곳으로 나의 피난처요 요새였다. 결국은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셨구나.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4-6).” 내가 누구를 생각하며 저로 인해 몸서리 쳐 주의 이름을 부르던 것이 실은 나를 향하신 주의 보호하심이었다.

 

그리하여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7).” 그 무엇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려고.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8).”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 안에 주를 더욱 바라고 주의 이름을 알고 주께 간구하게 하시려고, 이로써 나를 건지시고 높이시고 응답하심으로 영화롭게 하시려고 말이다(14-15). 아!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16).”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