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
예레미야 40:6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
시편 93:3-4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레미야를 선대하였다. 저를 좇아 바벨론으로 갔으면 후히 대접 받고 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민족에게 받은 설움을 씻을 수도 있을 거였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으로 갔다. 반바벨론파나 저의 백성들은 그를 매국노로 여겼을 것이다. 주의 일은 항상 아이러니하다. 이를 보는 통찰이 필요하다. 주께서 분별력을 주시는 데는 더 나은 쪽을 택하라는 게 아니라 주의 뜻을 붙들라는 것이다.
어떤 서러움이 또는 고달픔이 말씀을 읽기 전에는 나를 쥐고 있었다. 모처럼 동해 쪽에 와서 좋은 시간과 좋은 음식을 먹고 즐길 수도 있는 것인데, 주문진수산시장은 분비고 부산스러웠다. 밀려든 차량에 섞여 주차타워에까지 올라가게 되자 심한 공포감은 극에 달했다. 어쩌다 아내와 딸애만 데리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산한 곳에 이르러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낙산해수욕장에서 홍게 대신 해물칼국수를 먹었다. 다른 식구들에게 민망하고 송구했다.
종일 나의 긴장감은 극에 달해 있었다. 평소보다 안정제를 여러 번 먹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궂은 날씨에 뼈마디도 성치 않았다. 숙소에 들어오자 피로감에 젖어 눕기 무섭게 잠이 들었다. 조금은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다. 새벽녘에 눈을 떴다. 창을 조금 열자 소슬한 바람이 들어오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정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던 사람이라, 벗어난 거리만큼 나는 불안하다. 책을 읽는 이유가 또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까닭이 그러므로 안도하기 때문이다. 이게 맞는 것이라 여기지는 않는다. 하나 내게 두신 나다.
오늘은 또 어디 어디를 간다고 하는데 나는 미안한 마음에 아내와 딸애만 보내기로 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 좋은 경치와 맛난 걸 못 먹고 나 때문에 덩달아 빌빌하는 것 같아 말이다. 슬프거나 노엽지는 않다. 그것 때문에 우울하거나 답답하지도 않다. 우리의 만족함이란 무얼 하고 못 하고, 상대적인 게 아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 나는 생각했다. 여섯 살. 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의사표현이 안 되고,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아이의 시선에도 세상은 담긴다. 어떤 안쓰러움으로 아이를 보지만 아이의 세계는 이미 충만하다. 부모의 헌신은 그것 자체로 또 저들에게 감사다. 어떤 대가나 보상을 바라는 게 아니다.
오늘 예레미야의 선택은 그러한 게 아닐까? 더 나은 무얼, 최선이 아니면 차선을 택해야 한다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흔든다. 미스바로 가기로 했다. 구국의 회개가 깃든 곳. 주의 성산인 예루살렘이 있는 곳. 변절과 죄악이 난무하지만 그럼에도 주의 백성인 사람들 속으로. 마치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데 있어 최선을 도모하다 어려우면 차선을 선택하는 것으로 지혜를 도모한다. 주를 바라는 마음도 그렇듯 이게 아니라면 저거라도 행해야 할 것 같고, 삶을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는 더더욱 선택에 의해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글쎄. 우리의 최선은 언제나 최선이다.
하나님이 내게 두신 오늘의 나는 최선이다. 이를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거 없다. 누구와 견주어 안타까울 것도 없다. ‘아이’의 지긋한 시선은 내게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안쓰러움으로 아이를 보지 않는다. 저 아이에게 두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다. 그 부모의 고달픔도 혹은 당사자인 아이의 처절한 삶의 몸부림도 아니다. 그것으로 선을 이루시는 주의 최선을 본다. 나는 혼잡한 주문진수산시장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우울하였다가 낙산해수욕장 어느 카페에서 아이와 눈을 마주치며 생각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누림을 두고 행복을 저울질하지만 참된 행복은 즐김에 있는 게 아니라 존재에 있다. 그리 두신 이의 참뜻 안에 있다. 물론 나는 내가 안 됐다. 아이가 불쌍하다. 그 부모의 수고가 나의 부모의 안쓰러움으로 중첩되면 서글프다. 우울하고 괴롭다. 사는 게 고달프다. 결코 나는 이와 같은 감정에 무관하지 않다. 마음은 나를 쥐고 흔든다. 눈물이 핑, 돌고 어디 숨어서 엉엉 울고 싶어진다. 숨고 싶고 얼른 집에 가고만 싶다. 이불 밖은 위험하다. 무덤을 사모한다. 한데 아이의 시선에서 나는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의 의미를 되새겼다.
그래서 축복이 상대적인 것이라면 이보다 불공평한 하나님이 또 어디 있나. ‘남들처럼’이 복의 척도일 수 없다.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이다. 최선 외에 모든 차선은 악하다. 물론 나는 나의 신앙고백과 삶의 현실에서 심한 괴리감을 느낀다. 부당함을 떠안고 평생을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기 이를 데 없다. 곧 나의 시선이 세상을 보고 하나님을 볼 땐 말이다. 남들처럼 살아야, 여기까지 왔는데, 이 좋은 걸, 하는 식의 논리 앞에서 하나님은 결코 공정하실 수 없다.
“예레미야가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나아가서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서 그와 함께 사니라(렘 40:6).” 그러게. 어떠하든, 사니라. 이는 그와 같은 삶을 주신 이에 대한 최선이다. 충성이다. 이 땅에 남은 백성 가운데 사는 일이다. 저들이 나를 어찌 대하든 또 어떤 형편이든 그게 우선일 수 없다. 미스바로 가자.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자. 하나님이 지키시는 경계선이다. ‘그다랴’는 여호와의 위대함이란 뜻을 가졌다.
그럼에도 주의 사람이 있는 곳. 주의 백성들 가운데, 주가 정하신 경계 안에서 주의 위대하심만을 붙들고.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시 93:3-4).”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결단이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능력’을 찬양할 것인가. 나의 판단과 기준으로 서러움에 또는 원망으로 세상을 관조할 것인가.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6-7).” 참 신기한 건, 당연히 슬프고 서럽고 또는 원망스럽기도 한데 그게 나를 주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그래서 휘둘려 주를 멀리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놀라운 건 그러한 나의 옛 사람이 그래서 더 주를 바라게 한다는 반작용이다. 신기하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의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그와 같은 의지가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어떤 슬픔이 나를 옥죌 때 그것으로 더욱 주의 긍휼하심을 바라게 되는 이와 같은 아이러니를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행여 나의 호들갑이 아이 부모에게 또는 아이에게 엉뚱하게 비춰질까봐 조심하며 나는 아이의 시선을 따랐다. 그 가는 손을 잡고 악수를 할 때 나의 힘없는 아픈 다리를 연상했다. 어떤 동질감이 단순한 상련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를 그리 두시는 하나님의 최선을 묵상하게 하였다. 그런 것임을.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이 일깨우시는 의미를 이제는 의지적으로 바라고 도모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나를 이상하게 이상하게 여기면서 그리 생각하였다. 슬프고 우울해야 하는데 그러다말고 오히려 감사만이 남는 게 말이다.
내 안에 이는 죄를 억누르고 통제하고 다스리려는 힘이다. 슬픔과 노여움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단이다. 이는 결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관여였다. 나를 그냥 나로 내버려두지 않으면서 나는 더 이상 옛 사람의 내가 아닌 것을 스스로 입증하는 일이다. 절대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이젠 확실히 무슨 말씀인지 알겠다. 내가 ‘나’이면서 내가 아닌 ‘나’인 것이다.
주님은 결국 성향을 바꾸어주지는 않으신다. 한데 기어이 성품을 바꾸어놓으신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4).”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결단코 나를 세상과 함께 멸망하지 않게 하시려고.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들이 그들의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왕상 2:4).”
말씀 앞에 앉아 이렇듯 나를 이끄시는 주의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신비다. 축복이다. 잠들 땐 우울하였다가 새벽에 깨우시고 말씀으로 위로하시며 새 힘을 더하시는 주의 사랑은 어찌 은총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그 무엇으로 이보다 더 큰 보상을 바랄까.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거 없다. 것도 다 지나가나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행 2:2).” 나는 나의 주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아이는 이를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으나 그 시선은 알고 있었다.
멋쩍은. 계면쩍어 씨익, 웃는. 나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 같이 웃었다. 어느 훗날 우리가 모여 주 앞에서 같이 웃음 짓게 될, “여호와여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큰 물이 그 소리를 높였으니 큰 물이 그 물결을 높이나이다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많은 물 소리와 바다의 큰 파도보다 크니이다(시 93:3-4).” 나는 소슬한 가을 바다의 넘실대는 위압감에도 알 것 같았다. 그보다 더 큰 물이 소리를 높였고 소리를 높였으니 그 물결이 말하더이다.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기꺼이 노래 부르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그의 종의 평안함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하는 말을 그들이 항상 말하게 하소서(시 35:27).”
그리하여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69:30).” 곧 “주를 찾는 모든 자들이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들이 항상 말하기를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게 하소서(70: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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