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전봉석 2017. 10. 7. 07:24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 곧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를 보내사 그들에게 이르신 이 모든 말씀을 말하기를 마치니 호사야의 아들 아사랴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예레미야 43:1-2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시편 95:10-11

 

 

 

어디서나 주의 말씀에 반기를 드는 이가 있다. 저들 무리는 마치 청개구리 같아서 뭐라 해도 어떻게든 거꾸로 해석하고 이를 자기식대로 풀이한다. 뭐라 한들 들을 리 없는 이들에 대하여는,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마 10:26).” 기껏 전열을 가다듬고 주 앞에 바로서려 하는데, “모든 오만한 자가 예레미야에게 말하기를 네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는 애굽에서 살려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너를 보내어 말하게 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는 것이다.

 

난감한 일이다. 만일 거꾸로 말했으면 저런 자는 또 반대에 서서 반대를 위한 반대만을 일삼을 것이다. 보니까 뭐라 한들 소용이 없는 것이 죄 된 사람의 특징이었다. 화합하기 싫은 것이고 그냥 제멋대로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과만 어울리기를 좋아한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정치판이 딱 그러하고, 누구랄 거 없이 죄는 성향이다. 본래 태생이 그리 되어 있다. 그것을 바로 할 수 있는 게 주를 경외하는 현숙한 사람이겠다.

 

정해진 시간에 따라 글방에 올라가 설교 원고를 작성하였다. 어느덧 잠언을 31장에까지 다 이르렀다. 전날에 초안을 잡아둔 게 있어 일찍 끝날 줄 알았는데 느슨한 마음 때문인지 오후까지 지체되었다. 오후께 김훈 원작의 <남한산성>을 보러 갔다가 사람이 너무 많아 그냥 돌아왔다. 아내의 기지로 다음 날 오후 시간으로 다시 예약을 하고 문가 쪽 자리를 잡았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날은 흐리고 하늘은 무거웠다.

 

나는 현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현숙한 사람은 주를 경외할 줄 아는 사람이다. 경외감이란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라, 도저히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떤 ‘미지의 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바로 알고 느끼고 두려워할 줄 알며 이를 경탄하는 것이다. 모든 만사가 주의 섬세하심으로 이뤄진다. 어디서 현숙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저는 진주 같이 귀하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잠 31:10).” 모든 게 주의 손길이다. 어려우면 그 어려운 것이, 수월하면 그 수월한 일이 다 그만한 이유와 목적을 갖는 것이다. 공연한 게 없다. 괜한 일이란 없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말씀 가운데로 이끄시는 주의 손길을 느껴본 사람은 안다. 미처 그런 생각으로 그리 짐작도 못했던 의미로 다가오신다.

 

주어진 직분에 충실한 사람이다. 결코 저는 사람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을 얻고자 너무 애쓸 거 없다. 스스로 위로하려 들지 말자. 나를 만족시키는 덴 세상을 다주어도 만족함이 없는 법이다. 나보다 못한 이에게 늘 마음을 두자. 감사는 위를 향해 두 팔을 벌리는 일이지만 땅을 반듯이 딛고 설 때에 온전하다.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는 감사는 없다. 목사의 직분을 수행함이란 누가 듣든 안 듣든 나는 말씀을 준비하는 사람이다. 새로운 식재료가 늘 필요하다. 책을 읽고 말씀에 씨름했던 사람들의 삶을 유심히 봐야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데는 오직 한 곳이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을 아침으로 바꾸시고 낮을 어두운 밤으로 바꾸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이를 찾으라 그의 이름은 여호와시니라(암 5:8).” 이를 알 때 누가, 어떻게 사람에게 공들일까. 그럴 거 없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건 이제 식상하다. 좋을 땐 간 쓸개 다 빼줄 것처럼 굴다 돌아서면 냉랭하기 이를 데 없는 게 사람 사이다. 그렇다고 스스로 위로하려 들면 것도 꼴불견이라.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사람은 역겹다.

 

나는 예외인가? 누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위인임을 나는 잘 안다. 고로 너무 내가 날 위해 애쓸 것도 없다.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다는 걸 주 앞에 내어놓는 일, 나에 대한 주권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게 될까? 싶지만 그러지 않고는 어찌 답이 안 나오는 처지에 놓였다. 몸도 마음도 내가 어찌 건사가 안 되는 상황에서 주님이 행하심을 여실히 느끼게도 하신다. 그래서 결국 주만 보게 하신다. 그럴 때,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 4:7).”

 

그럴 수 있는 근거가 아무 것도 없는데 이미 충분한 마음. 그래서 그런 자는 어떻게 다른가? 변함이 없다. 묵묵히 무던한 것이다. 이는 참으로 귀한 덕목이나 실제 본인에게는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런 거 같다. 규칙적인 생활이 가장 편하다. 뭐하지? 어딜 가지? 싶은 갈등이 없다. 늘 그 시간에 거기 있고, 그런 마음으로 항상 변함이 없는 사람. 저는 매사를 허투루 삼지 않는다. 모든 게 헛되다고 역설하였던 솔로몬은 결국 허투루 여겼던 일상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현숙함은 매사에 신중하다.

 

반듯한 것이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주 앞에서 말이다. 결코 불로소득을 좋아하지 않는다. 뿌린 만큼 거둠의 원리는 거둔 만큼 또한 나누어야 할 몫이지 괜한 게 없다. 공짜가 없다. 주님의 은혜도 결코 공짜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 죄인으로 죽으시는 어마어마한 값을 지불하신 것이다. 이를 내가 받는다는 일은 그러므로 결코 공짜가 아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 주의 살과 피를 나누는 것처럼, 내 삶으로 성찬이 되는 것이란 내 살과 피를 나누어야 하는 생활이었다. 찢어주고 부어주는 삶이다.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나는 자꾸 ‘예레미야’로 살아야 하는 선지자적인 삶에 대하여 어렵기만 하다. 억울하고 분하고, 속이 타고 답답하고, 몸과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하면서도 온전히 주의 말씀만을 붙들고 전해야 하는 일. 빵처럼 제 몸을 찢어내야 하는 일이다. 포도주처럼 자신의 모든 진액을 부어내야 하는 일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51).” 그런 자로 나를 오늘 여기에 두셨다!

 

이렇듯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이를 기록하며 설교원고를 작성하든 묵상 글을 쓰고 있든, 이럴 땐 잘 알겠는데. 그게 그러니까 항상 나는 일관되지 못한 나를 마주한다. 금세 돌아서면 또 근심이라. 낙심이라. 나에게 우울감은 항상 걸치는 외투 같다. 어떻게 벗고 나설 수가 없다. 기껏 설교원고를 작성하고는 누가 온다고? 하는 서글픔을 느끼며 주보를 만들어 출력하였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어떤 막연함이 항상 나를 짓누른다. 힘에 겨운 외투인데 오래돼서 익숙하다. 아이들을 생각하다 치웠다. 누굴 위해 기도하다 말았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싶은 마음은, 어쩌면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점이 아니었을까? 두말할 것 없이 노아와 그 아들들은 어떠했겠나? 미디안에 처박혔던 모세는 또 어떻고? 기껏 출애굽을 하고도 광야 40년을 빙빙 돌아야 했던 그 날들은 또 어땠을까? 그러고 보면 믿음의 사람으로 사는 일은 누구라도 그렇겠구나! 나는 아내와 딸애 뒤를 따라 걸으면서 생각하였다. 그러느니 애굽으로 가자, 하고 외치는 편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겠다.

 

아,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시 95:10-11).” 하나님의 심정이 느껴진다. 죄란 참 모진 것이구나. 끈질기고 끈덕진 것이구나. 도저히 내 힘으로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일이구나. 그러니 현숙함이란 무엇인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1).”

 

곧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2).” 나는 나를 알면 알수록 다른 더 좋은 수를 모르겠다. 하나님께 돌아가자. 주를 노래하며 구원의 반석을 향해 즐거워하자. 감사함으로 나아가자.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3).” 너무 애태울 거 없다. 사람에게 연연할 거 없고 심지어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걸 것도 없다.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4).” 다 주의 손 안에 있다.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5).” 그가 다 지으셨다.

 

그러므로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 가장 현명하고 현숙한 자의 자세일 거였다. 나는 주 앞에서 현숙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면서도 돌아서 금세 또 민망할 뿐인 나를 마주할 때면 난감하다. 실의가 또 낙심이 나를 억누르면서 익숙한 우울의 외투를 걸친다. 어깨가 축 쳐져 시무룩해진다. 나는 동역자를 보내주세요, 하고 기도하였다. 그러다 번뜩 생각이 든 것은 내가 또 그럼 얼마나 그 사람을 의지할까, 싶은 것이다. 내가 아는 나는 충분히 또 그러고도 남는다. 그러니 참, 주만 바라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62:5).”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2).”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