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
예레미야 44:28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시편 96:9
<남한산성>을 영화로 보았다. 최명길과 김상헌의 직언을 두고 나는 어려웠다. 인조도 그러했을 것이다. 백성들의 안위와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최명길이 말했다. “한 나라의 왕이 어찌 치욕스러운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김상헌이 말했다. 나는 두 사람의 말이 다 어려웠다. 단지 목숨이 목숨이면 그리 대수이겠나. 나는 인조의 심정을 헤아리려 애썼다. 그리고 두 신하의 간언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숱한 병(兵)들의 죽음과 사연을 생각하였다. 생각만으로 지치는 일이었다.
저마다 도리가 있고 이치가 있으며 나름의 방도가 있고 옳고 그름이 있었다. 오랑캐라 하나 저들 또한 마찬가지일 터.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일은 참으로 고단한 것이구나. 갑(甲)은 갑대로 을(乙)은 을대로 병(兵)은 병대로 정(丁)은 정대로, 살고 죽음은 우열을 가리지 않으며 고통과 역경은 순서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저마다 생사의 갈림은 냉혹한 것이었다. 왕의 것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런즉 칼을 피한 소수의 사람이 애굽 땅에서 나와 유다 땅으로 돌아오리니 애굽 땅에 들어가서 거기에 머물러 사는 유다의 모든 남은 자가 내 말과 그들의 말 가운데서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렘 44:28).” 하나님을 안다는 게 복이었고, 이를 바로 안다는 게 축복이었으며, 이를 삶으로 두고 그 길을 간다는 게 특권이었다. 사람으로서의 치욕도 견디기 힘든 것이어서, 김상헌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다. 살아서 궁으로 돌아온 최명길도 산 것이 산 것이 아니었다. ‘누구의 말이 진리인지 알리라.’
"가장 순수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일상의 평범함을 누리며, 중생을 증거 하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말했다. 달라진, 거듭난 삶을 사는 자의 전과 다른 평범함이 진리를 말하는 게 되어야 한다. 구원을 이룬다는 것. 이는 중생함으로 얻은 기본구원의 영역이 아니다. 저들은 저들에게 부여 된 삶을 살았고 나는 은혜 아래 주를 바라는 자로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뭔가 대단한 비전을 갖고 명분을 쌓으며 이치에 따라 가치를 추구하는 충정의 삶이란, 그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각자 주어진 길 위에서 묻는다. 다섯 달란트여서 다르고 두 달란트여서 다른 질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어찌 한 달란트여서 소홀히 여겨도 될 것이겠나.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 주가 세우신 일상이다. 일상이 왕상이다. 평범함보다 귀한 길은 없다. 돌아서며 나의 결론이 맹랑하여 실소하였다.
진리가 제 아무리 거룩한들 나의 일상과 상관이 없는 것이면 무슨 소용인가. 성경을 아무리 귀히 여긴다 하나 이를 읽고 듣고 삶 가운데서, 씹고 삼켜 소화시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상관이 없는 자에 대하여는 두말할 것 없다. 내가 어찌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들려지고 뿌려져 알만한 터에 싹이 돋지 않고 열매를 맺지 않는 삶이라면, 그 일상이 왕상의 자리인들 무슨 복이 있을 것인가. 완연한 가을 날씨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며 생각하였다.
그가 이루시리라.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4).” 내가 주를 믿는 게 아니라 주가 나의 영의 성령의 내주하심을 믿으시는 것이다. 내가 택한 것이 아니라 주가 나를 불러 택하셨다. 나는 늘 돌아보지만 왜 나 같은 자를 목사로 세우셨나. 왜 하필 나 같은, 하등에 쓸모도 없는 자를 주가 사랑하셨나. 내 안에 주가 계시지 않았다면 나를 휘둘러 몰아세울 열등감과 자기비하를 어찌 감당하며 살았을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전혀 그럴 가치도 없는 나를 주가 사랑하심이 아닌가. 그러할진대 주가 이루시리라.
염치없게도 나는 그리 생각하였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서운함이 일었다가 결국 저녁에 아내와 딸애 앞에서 짜증을 부렸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혼자 안고 씨름하던 열등함이었는지, 서러움이었는지. 낮에 아내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서 무시당한 것 같아 마음이 틀어졌다가 돌아오면서 우동 집에서 메뉴를 선택하는 것에서 또 마음이 상했던 것이다. 먼저 휑하니 돌아와 씻고 입을 댓 발 빼물고 있다 기어이 주절거리며 말을 쏟아냈던 것이다. 이처럼 일상은 가벼우면서 무겁다. 나는 나의 일상이 별 볼일 없음을 고백한다. 고상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일상은 채워진다. 대수로울 거 없다. 평범함을 너머 지독스럽게 구차하고 비루한 게 나의 일상이다.
아마도 나의 생각을 다 토해내면 또 평소 느끼는 감정을 다 기워내면 그 역겨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 일상. 지극히 평범함에 대하여, 그 가운데서 나는 말을 하다 놀랐다. 내일이 주일이다. 나는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러다 어찌 설교를 할 수 있겠나. 어떻게 예배에 나아갈 수 있겠나. 내 안에 드는 생각이 그러하였다. 더 나갈 수 없게 막는 그 무엇이 있었다. 솔직한 고백이지만 가끔은 아내와 딸애가 다른 교회에 다녔으면 좋겠다. 곁을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도무지 감출 수 없는 나의 일상은 얼마나 거룩하신가.
거룩을 드러내지 못해 민망하고 초조한 것이 곧 중생의 근거가 아니겠는가.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그럼 안 돼! 하는 어느 제동이 걸리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4-27).”
그리하지 않으시면 나는 가망이 없다. 어중간하게 하던 말을 끊고 들어가서 잤다. 나의 일상은 하찮다. 보잘것없으며 돼먹잖아 어디에 둘 것도 못 된다. 나는 말하다, 왜 나 같은 이를 목사로 세우셨는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였다. 알겠는 건 그러므로 그나마 이 정도라도 되게 하신 것이겠고, 모르겠는 건 도대체 나 같은 위인으로 뭘 어따 쓰시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나의 걸림돌은 가족들이겠구나. 저들에게 나의 변화된 모습도 보이지 못하면서 중생의 삶을 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일 테고, 저들에게만 바로 보인다면 다 이루는 것이겠구나. 곁을 같이 하는 이에게 ‘그리스도의 향기’로든 ‘그리스도의 편지’로든 정확할 테니까.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높다. 나는 늘 아내와 딸애 앞에 민망하다. 이로써 하나님은 나를 괴롭게 하시는가. 언제부턴가 주일날이 가장 어렵다. 여간 부담이 되고 난처한 게 아니다. 평소의 나와 설교자의 나는 어떠할까. 일상의 나와 목사로서의 나는 어떠한가.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고후 10:6).” 두렵고 떨리는 마음뿐이다. 나는 주 앞에 내세울 게 없다. 감출 수만 있으면 감추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그런데 숨을 데가 없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 죽음으로 어찌 살 길을 열 것이며, 살 길을 열어 어찌하여 죽음을 자초하려 하는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언제쯤 돼야 이 말씀이 나의 일상이 될 것인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9-10).”
그렇구나. 내 안에 이는 열등의식이 실은 저들을 비난함으로 나를 두둔하려는 것이었다. 내 신세한탄이 저를 깎아내리려는 비판이었구나. 남을 업신여김이 둔갑하여 나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주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말씀 앞에서는 숨길 데가 없구나. 부디 살아서 내가 사는 동안에 언제쯤에 이르러서야, 나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다.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다.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나는 가당치가 않다. 나의 일상은 덧없다. 덧없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시 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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