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전봉석 2017. 10. 9. 07:05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 45:4-5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시편 97:1


 

또 한 해가 갔구나. 불쑥 생일 축하 문자가 오면, 매 해 음력을 쇤다고 그렇다 알려줘도 ‘카톡’이나 ‘페북’ 알림을 보고 그리 인사를 건네는 것이다. 그렇듯 일 년에 한 번 아는 체를 하다 어느새 하나둘 그마저도 끊기는 걸 보고, 나이가 들어간다는 건 점점 혼자가 되어 가는 일이구나 생각하였다. 그마저도 안 하는 사람이 이런 소릴 하는 게 민망한 일이지만, 불현듯 벌써 또 한 해가 갔어? 하고 놀라는 강도가 세지기도 한다.

 

지난 주일은 명절 들물이라 못 지키나 했고, 이번 주일은 명절 날물이라 못 왔나 여겨 나는 문자도 해보지 않았다. 오후께 아이가, 서울에 있다는 것이다. 다음 주일에 뵙겠습니다, 하고 깍듯이 마무리를 한 문장에 대고 뭐라 덧댈 말이 없어 멍했다. 그럼에도 오라 오라해야 하는지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지, 나는 뭐라 적을까 하다 할 말을 삼켰다.

 

예배를 마치고 아내와 딸애는 남아 각각 공부를 했다. 그러기에 참 좋은 분위기였다. 찬송을 부르다, 기도를 하다, 나는 먹먹한 마음에 울먹거렸더니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해야 아이들을 교회로 오게 할 수 있을까? 아무리 궁리를 해도 마땅한 게 없어서 말이다. 속상하고 답답한데 그런들 누구에게 할 말은 아니어서 나는 속으로 주의 이름을 불렀다. 꽁한 아이처럼. 이렇게 우리 식구끼리만 예배드리는 날이 늘어갈 거면, 계속 여기서 있을 게 뭐 있나? 하는. 토라진 마음으로 돌아누워 책을 읽었다.

 

그런 내게 오늘 말씀은 일갈 한다. “너는 그에게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보라 내가 모든 육체에 재난을 내리리라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45:4-5).” 어쩜 내가 날 위해 큰일을 찾나? 날 위해 아이들을 기다리나?

 

주가 세우셨으니 주가 이루셔야 한다. 주가 이루이시면서 헐기도 하고 새로 심기도 뽑기도 하신다. 곧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다행이라는 생각이 가당키나 한가. 나는 말씀 앞에서 홀가분해지기도 한다. 내 책임이 아닌 것이다. 주가 세우셨고 주가 이루시면, 주가 뽑으시거나 주가 심으시거나. 한데 내가 나를 위해 큰일을 찾는가? 찾지 마라. 모든 육체엔 재난이 있는 법. 아무도 안 오면 안 와서, 오면 또 와서. 그런 내게 주님은 내게 내 생명을 노략물이 넘쳐나듯 주신다.

 

이김은 주께 있기 때문이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21:31).” 취한 노략물이 흔한 것처럼 염려할 것 없다. 주가 더하신다. 한 생명 한 생명을 주가 덧붙이신다. 곧 여호와가 다스리신다. 땅은 즐겁고 허다한 섬은 기뻐한다. 말씀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게 이런 것이겠다. 땅이 즐거울 때 섬들도 기뻐한다. 영적인 성숙이란 모든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응하는 것이다. 혼자여도 거기가 교회다. 식구끼리여도 교회는 교회다. 내가 세운 게 아니다. 우리가 이루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다. 주가 다스리실 때 땅이 즐겁고 섬들이 기뻐한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 16:8).” 그래, 마음 흔들릴 거 없다. 안 되는 걸, 안 되게 하시는 걸 어쩌겠나. 것도 다 주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묵묵히 그저 무던히 거기에 있는 것이 순응일 테지. 난 아내랑 딸애가 다른 교횔 다녔으면 좋겠어. 내가 부끄러워서 했던 고백이 내 마음을 찌르는 가시가 되었다. 내가 나를 위하여 큰일을 찾는가. 오늘 말씀이 정곡을 찌르신다. 찾지 마라. 재난도 육신의 일이다. “그러나 네가 가는 모든 곳에서는 내가 너에게 네 생명을 노략물 주듯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붙들자. 말씀만 붙들고 가자. 내 앞에 주를 모심이여.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오직 공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 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그는 높은 곳에 거하리니 견고한 바위가 그의 요새가 되며 그의 양식은 공급되고 그의 물은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 33:15-16).” 그런 자로 살면 될 일. 말씀 앞에는 혼자만 서는 일이다. 가족 단위도 교회 단위도 아니다. 어쩌겠나. 나를 여기 세우신 걸.

 

공의롭게 행하자. 정직하게 말하자. 토색하지 말자. 뇌물을 받지 말자. 곁에 두시는 어려운 자의 말에 귀 기울이자. 악을 외면하자. 그리할 때 나는 견고한 바위 그 요새에서 양식을 공급받을 것이다. 나의 생수가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다. 보리라.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5).” 주가 나를 어찌 돌보시는가. 어떻게 다루시고 건사하시며 온전히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막 13:26).”

 

성경은 누누이 이를 보이신다. 곧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요일 2:5).” 그렇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도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시겠나. 저는 나를 이끌어 이와 같은 말씀 앞에 세우시는 것이다. 침울할 거 없다. 낙심할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온전하게 되는 일이다. 이로써 나는 그의 안에 있는 줄을 비로소 안다. 무엇으로 위로를 삼을 것인가.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4:12).” 그렇구나. 내가 누구를 생각하며 주의 이름으로 안타까워하고 또는 그리움을 주의 마음으로 되돌아볼 때,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사 30:21).” 아! 주가 인도하심이란, 내가 순응함으로 순하여져 순수하고 온유한 자가 되는 길이었다.

 

그러할 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이것도 나의 고백이 되기를 몸서리치게 사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런 것이어서 그것이어서 다행이었다.

 

다행이란, 내가 걱정할 게 아닌 게 되었다. ‘좋지 않던 일이 심하지 않거나 뜻밖에 잘 풀려 마음이 놓이고 흡족한’ 것이다. 늘 나는, 이래도 되나? 이게 맞나? 하는 염려에 시달리는데 그러다 말씀 앞에 앉으면 그 모든 게 ‘천만다행’으로 몹시 좋은 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 1:21).”

 

뭘 더 바랄까. 어떤 일을 도모할까. 내가 아일 어쩌나. 내가 나를 어쩌지도 못하는데, 하물며. 나는 다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를 지킬 뿐이다. 주의 긍휼하심을 기다릴 따름이다. 이와 같은 기다림 또한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사랑이 하실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 13:3).” 나는 다만 주를 바랄 뿐. 때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내가 죽어야 나도 산다. 나는 죽어야 비로소 내가 산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요일 4:17).” 아! 그래서 점점 의연하고 담대해지는 것이겠구나. 더는 나의 예전 모습이 심한 모멸과 부끄러움으로 다가오지 않고, 그 어떤 죄악도 주 앞에 스스럼없이 고하여 내어놓을 수 있게 된 것도, 그리하여 나는 하는 게 없는 사람이면서 이 평화는 고스란히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구나.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그렇지. 내가 나를 위해 큰일을 찾는 게 아니었다. 곧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시 97: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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