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예레미야 51:10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편 103:8
바람이 차가운 하루였다. 창에 듣는 햇살은 곱고 따뜻했다. 그늘과 양지는 현격하였다. 가뜩이나 토요일 오후라 느껴지는 한기는 고요했다. 딸애는 신입생들 면접일이라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다. 과중한 일에 치여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아내는 아이 둘 때문에 토요일에도 수업을 했다. 하긴 그게 쉬는 거라며 아내는 달리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나야말로 한량이라, 어슬렁거리듯 천천히 걸어서 점심을 먹으러 집에 다녀온 게 전부였다. 그리고 오후께 아내와 주일 날 먹을 장을 보러 동네를 휘적거렸다. 이래저래 고단한 삶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곧 참된 안식은 죽어서야 유지되는 것이겠으나, 성경적으로의 쉼은 어떤 것일까? 환경적인 요인으로 쉼을 얻을 수 없다는 건 너무 자명한 것이겠으나, 성경은 그렇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풍랑이 거칠 게 일 때 예수님은 배 안에서 주무셨다(막 4:35-41).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서 잠들었고, 바울은 찬송을 했다. 요셉은 노예로 끌려가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었든 그 마음은 평온함으로 성실하였다. 다시 말해 성경은 우리의 쉼이 환경적인 이유로 핍절되거나 손상되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다 내게 오라.’ 주의 말씀 안에 답이 있겠구나. 예수님은 철저하게 아버지 하나님께 의존하셨다. 그 뜻을 바라고 취하셨다. 다윗의 노래처럼,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시 131:2).” 얼마나 주를 의지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고단하고 힘든 형편이 나아진다는 게 아니라, 그렇다 해도 그것과 상관없이 얻고 누리는 쉼이었다. 흔들림 없이 주만 바라고 주만 의지하는 게 쉼이었다.
“내가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가 살아나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국 땅에 두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7:14).” 쉼이란 하나님이 주신 어떤 것에 의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었다. 주를 바라고 의지하면 얻는 무엇이 아니라 주님 그 자체이었다. 그럴 수 있는 게 결국 내 의지로는 되는 게 아니었으니, 이것이 은혜로구나. 설핏, 낮잠에 취했다가 깨어서 생각했다.
바벨론의 멸망. 그 자명한 일에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상기시킨다. “여호와께서 우리 공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렘 51:10).” 주의 사랑은 주의 공의와 정비례한다. 이를 삶 가운데서 체험하고 느낄 수 있는 게 은총이었다. 내가 주를 사랑한다는 건, 주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하는 문제의 관건이었다. 고단하고 힘에 겨워 당장 쓰러질 것처럼 고통스러운데도,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하는 고백 앞에 ‘아멘’할 수 있는 삶이 복이겠다.
‘아멘’이란 내게 두신 최고의 선물을 최고로 여겨 다시 주께 올려드리는 일이다. 바울의 멋진 서술이 떠오른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사랑을 덜 받겠느냐(고후 12:15).” 나를 내어주기까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 사랑의 원리가 예배였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나를 주께 드리는 삶. 이것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진정한 쉼의 길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게 내 안의 평안이 그 출처를 알겠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길 수 있다. 힘들어 투덜거리는 딸애의 카톡에 잘 견디고 잘 이겨내라고 말한 후에, 그럴 수 있는 힘을 주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생각했다. 이는 그 어려운 일을 잘 이겨내란 것도 아니고 자신을 잘 다독여서 견뎌내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주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상하지만, 고통이 있어야 기도도 한다. 한가하고 여유로울 땐 찬송이 안 나온다. 신기하지? 어렵고 힘든 게 도움이 큰 것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19-20).” 뭐랄까. 우쭐하여 안정제 없이도 이젠 좀 거뜬한 것 같을 때와 도로 안정제를 찾으며, 어떤 불안과 두려움에 허덕거릴 때 주를 바라는 마음이 달랐다.
요즘 내게 드는 평안은 결코 환경에 의한 평안이 아니다. 몸은 어디가 자꾸 아프고, 고립무원으로 고독은 목구멍을 꽉 막고 있는데, 그래서 더욱 주를 바라는 마음이 단순하여진다. 여러 단서를 달던 요구조건도 없어졌다. 아내와 같이 동네를 산책하고 주일 날 먹을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삼천오백 원짜리 멸치국수 한 그릇씩이면 충분한 것이다.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하라. 늘 보면 내가 나를 의지할 때 자신감은 넘치는 듯하나 감사는 결을 달리했다. 뭔 요구가 그리 많아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후 1:9).” 그렇구나. 내가 죽어야 내가 사는 일이구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사는 데 따른 사는 날 동안 염려와 근심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그것이 죽어져야 비로소 싹이 돋고 열매를 맺는 이치였다.
하나님이 그런 나를 그리워하셨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렘 2:2).” 척박하고 모진 상황에서도 주를 바라고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사랑이었구나. 쉼이란 온전한 의지였고, 의지함이란 두신 데서의 묵묵함이었다. 자꾸 무얼 모색하고 누구와 견주어 어떤 일을 도모하면서 이를 바라고 구하느라 정작 하나님의 그리움은 외면한 채 저를 외롭게 하는 일이었다.
참 자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어떻게 하지? 하고 턱을 괼 때 벌써 쉼은 묘연하여진다. 고단한 일과 복잡한 경우의 수만 잔뜩 밀려든다. 종의 멍에다.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7).” 염려와 근심이었구나. 그 주범이 내 안에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고, 이러다간 쪽박이나 차겠다 싶은 걱정이 나를 휘감을 때, 하나님을 잠시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안 되겠다. 하나님만 믿고 기다릴 수는 없다. 내가 좀 나서야겠다. 이를 또한 주를 향한 열정이라 여기면서.
그런 나를 주님이 더 잘 아신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14).” 그러니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9).” 이는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15).” 이를 알 때 평안의 출처는 간단해진다. 주를 바라는 마음은 단순한 것이다. 두신 이가 하나님이시면 이루시는 이도 하나님이실 테고, 이루신 이가 세우시고 거두시는 거야 자명한 이치이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를 바라는 것 뿐.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까닭 없이 속이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리이다(시 25:3).” 곧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21).” 주가 아니시면 내가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뭘 잘 한들 나음을 얻을 수 있겠나. 전날에 같은 층 젊은 목사가 왔을 때 내가 한 소리였다. 주 앞에 서는 건 나입니다. 가족 단위도 교회 단위도 아닌, 오롯이 나입니다. 그렇지. 하나님은 온통 내 생각뿐이시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담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쫓긴 자가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삼하 14:14).” 주가 하셔야지, 돌아가는 세상을 보고도 나름 내 의지나 노력을 신뢰할 수 있겠나? 미성년인 딸아이 친구를 겁탈하고 살해하여 암매장하는, 아내가 남편을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죽는, 서로의 확신과 기준으로 설왕설래 연일 싸움은 그치지 않고, 멀쩡했던 게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나는 세상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시 103:1).” 저는 누구이신가?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5).” 나의 날들이 주의 것이었음을.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4).” 내가 누구인지, 어떠한지 주가 더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0-11).”
주의 인자하심이 아니었다면, 아니라면 과연 나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그러므로 내 영혼아! 송축하라.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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