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새롭게 하시나이다

전봉석 2017. 10. 16. 06:54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예레미야 52:16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

시편 104:30-31

 

 

 

 

“바벨론의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국에서 떠났더라(렘 52:27).” 결국은 그리 됐다. 그리 될 결국은 언제나 막연하여서 결국이 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결국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느라 여념이 없다. 그래서 ‘구덩이에 들어간 자는 주의 신실하심을 바라지 못한다.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사 38:18).” 그러게. 구덩이에서 나오기가 어디 쉬운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럴 수 있을까? 나도 그와 같을 수 있을까? 저녁을 먹고 아내와 멀리 산책을 하며 생각하였다. 생각은 많고 말은 적으니까 우울증이 오는 거야. 아내는 나 들으라고 말하였다. 늘 화난 사람 같아. 나는 아니라고 해도 그렇다는 데 난감하였다. 모처럼 주일 날 삐쭉 왔다가 무심히 돌아가는 아이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이번 주일에는 오겠다고 했던 두 꼬마 아이를 생각하다 입을 삐쭉거렸다. 어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도,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지 않나. 늘 화난 사람 같다는 아내의 지적이 뜨끔하였다.

 

나도 저희를 위한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는 일, 교회를 위하여서 말이다. 나는 화가 난 게 아니라, 중력 때문에 아랫입술이 자꾸 쳐지는 것을 꾹, 다물 수밖에 없듯이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어찌 가누지 못해 그런가보다. 괴로움을 기뻐할 수 있기란 그 괴로움의 출처가 주를 향한 것일 때 가능하겠다. 그런 마음은 내 임의로 추구하여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주셔야 다룰 수 있는 마음일 텐데. 생각이 많아 우울하다는 아내의 지적이 옳았다.

 

생각은 염려를 낳는다.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노라(잠 24:32).” 그러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이 또한 맡김의 원리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다. 그러고 싶은데 그게 어려워서 나는 쩔쩔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설교하신다. 그 말씀은 늘 새롭고 변화무쌍하다. 들었던 것 같은데 그 의미가 새로워진다. 성령이시구나. 나는 물끄러미 아버지를 바라보며 생각하였다. 여느 주일보다 아버지가 오시는 주일 날이 긴장되는 이유였다.

 

주께서 나를 돌보신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전하는 자로 그 열정을 다하는 게 값이다. 열정은 주를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적극적인 것이라면 주어진 삶의 고난과 어려움도 인내하는 소극적인 의미이다. 그리스도는 약하심으로 못 박히셨다. 저의 약하심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다. 우리의 약함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쓰인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고후 13:4).”

 

곧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우리의 약함이 주를 모시는 처소였구나. 저 아이에게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데서 무력감을 느꼈다. 뭐라 한들. 그 무표정한 얼굴이 되레 고맙기만 하다. 주가 하시기를. 나는 다만 권하고 기다리며 응원하는 것밖에. 천천히 걸으며 생각하였다.

 

결국, 유다는 멸망하였다. 왕은 눈이 뽑혀 끌려갔고 고관대작의 자녀들은 포로로 잡혀 갔다. 그 와중에도 남은 자들이 있었다. “가난한 백성은 남겨 두어 포도원을 관리하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렘 52:16).” 주의 섭리를 어찌 분별할 수 있을까? 말씀 앞에 가만히 턱을 괴로 앉았다. 그리고 기도한다.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시 104:30-31).”

 

결국은 결국이 이르기 전까지는 모른다. 결국이 아직 결국이 아닌 것이다.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끝에 이르러서야 알 수 있는, 모든 결국은 냉혹하다. “바벨론의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국에서 떠났더라(렘 52:27).” 그 허망함에 대하여 먹먹하였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삶에서 대체 우린 무슨 객기를 부리는 것일까? 공연한 호기는 그때뿐이라. 지나고 나면 허망할 따름인데.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쉼이 오는 길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 그런 걸 한사코 자기 멍에로 고집을 부리는 형국이니 가관이다. 마치 내 시간, 내 돈, 내 마음을 주께 드리는 것처럼 호기를 부린다. 결국 그 모든 게 내 것이 아니었음을, 결국에서야 알게 될 일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있을 때야 뭐라 한들 그 말이 귀에 들어오겠나.

 

의연하였으면 좋겠는데 내가 아직 덕이 모자란 사람이라. 늘 화난 사람 같아. 아내의 말에 입을 삐쭉거릴 뿐이었다. 어쩌면 좋은가. 나만큼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을 주님은 어쩌자고 여기에 두시는 것일까? 그래서 화난 사람처럼 구나? 그게 아닌데, 하고 말해 무엇해. 딸애는 피곤에 절어 마음도 우울하였는가, 밀린 교육방송을 덮어두고 아내와 나갔다. 같이 가자는 걸 모녀가 호젓하게 나는 교회에 남았다. 늘 나의 오후는 한산하였다.

 

내 안에 두시는 평안이 주의 것과 일치했으면 좋겠다. 월요일에 낚시를 다녀오라고 딸애가 용돈을 얼마 주었는데, 그날이 무슨 결제일이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아내에게 슬그머니 그 돈을 도로 주었다. 사는 데 따른 고달픔이 경거망동을 막는다. 이 나이쯤 되니까 그 비결은 알겠다. 이 또한 나의 연약함이라면 이것으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거하시는 자리가 될 수 있으려나.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그러자. 그리하여 주의 도우심을 항상 바라자. 별 수 없다. 아이에 대하여도 그처럼, 그래도, 와 주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여긴다. 그 잘난 아이가 뭐가 아쉬워서 여기까지 오겠나. 주의 영이 아니고는 아이를 움직일 수 있는 게 또 무엇이겠나. 뭐라 어르고 달래도 나오지 않는 아이들에 대하여도 내가 뭘 어쩔 수 있겠나. 나는 같은 마음으로 같은 생각을 되풀이하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아내는 그런 나를 보며 늘 화가 난 사람 같다고 하였으니. 나의 영혼의 쉼은 아직도 묘연한 것인가.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눅 12:12).”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나는 잘 모르겠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아니고는 내 안의 근심이 사라질 줄 모른다. ‘성화는 각자의 몫이다.’ 아버지의 설교 내용이 귓가를 울리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러므로 생각하자. 내가 나를 어쩔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저를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물며 처자식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골난 사람처럼 굴 거 없다. 주가 이루신다. 성도의 견인에 대해 그리 이해하였다.

 

“내가 돌이켜 너희와 함께 하리니 사람이 너희를 갈고 심을 것이며 내가 또 사람을 너희 위에 많게 하리니 이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을 성읍들에 거주하게 하며 빈 땅에 건축하게 하리라(겔 36:9-10).” 아이들이 나를 갈고 심는구나. 나를 위해 그런 사람을 많게 하시었구나.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또 기도가, 그 빈 땅에 건축하는 일이었겠다. 아버지의 설교를 들으며, 이를 듣고 있는 아이의 무표정한 얼굴을 살피느라 나는 마음이 쓰였다. 점심만 먹고 무심히 돌아가는 아이에게 서운하였다. 아이는 나를 갈고 심는다.

 

이렇게 성화란 내 몸을 통해 나의 인격적인 영이 표현되어져 나오는 것. 삶에 드러나는 감출 수 없는 영혼이다. 그리하여 인내로 영혼을 얻으라는 주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온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세상이 아무리 어떠하다 해도, 아이로 인한 나의 마음이 어떻다고 해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18).” 주가 보장하신다. 그렇게 주가 나를 이끄심. 견인(堅忍). 그러므로 “너는 이것도 잡으며 저것에서도 네 손을 놓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날 것임이니라(전 7:18).”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약 5:13).” 고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럴 수 있다면. 그러는 게 맞는다면. 또한 그리 하실 수 있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시 104:1).”

 

그러므로 “주의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30).” 곧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신께서 행하시는 일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시리로다(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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