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내가 기뻐하였도다

전봉석 2017. 11. 6. 07:17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네가 모든 악을 행한 후에 너를 위하여 누각을 건축하며 모든 거리에 높은 대를 쌓았도다

에스겔 16:23-24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악을 악이라 알지 못하는 것보다 두려운 게 또 있을까? 그 이유는 “네 화려함으로 말미암아 네 명성이 이방인 중에 퍼졌음은 내가 네게 입힌 영화로 네 화려함이 온전함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 16:14).”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자기 몫으로 알고 이를 누리려고만 들 때, “그러나 네가 네 화려함을 믿고 네 명성을 가지고 행음하되 지나가는 모든 자와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도다(15).” 아닌 척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속담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44).” 무서운 일이다. 아이엄마는 위로 얻은 두 아들을 건사하느라 딸애에겐 늘 미안하였다. 두 아이 다 운동을 하는 바람에 일일이 거길 쫓아다니느라 그런다. 아이는 예배가 끝나고 집에 전화했다가 엄마가 또 오빠들과 나갔다는 소리에 울먹거렸다. 그와 같이 배고픈 모성 때문에 아이가 짊어질 구애의 삶이 눈에 선하였다.

 

그렇듯 자기를 내어주듯 사는 아이를 생각하였다. 그 애도 어릴 때 늘 엄마의 사랑을 목말라했었는데. 가장 좋지만 가장 싫은 사람이 엄마가 되어 지금은 늘 남의 품에 있으니. 나는 그 아이를 생각하며, 이 아이를 또 어쩌면 좋은가 마음이 어려웠다. 매일 오후 다섯 시, 아이는 혼자 귀가해서 텅 빈 집에서 엄마를 기다린다. 여덟 시 아이아빠의 귀가. 아이는 맹숭맹숭하다. 밤 열한 시를 훌쩍 넘겨, 훈련을 끝낸 두 오빠와 함께 엄마는 귀가하고, 그런 뒤에도 오빠들 뒤치다꺼리에 기다리다 지친 아이에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오후께 아이엄마는 아내에게 전화를 넣어 그런 사정을 알렸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일요일에는 집에 있을 줄 알았는데 엄마가 또 나갔다는 소리에 실망하던 아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속담을 말하는 자마다 네게 대하여 속담을 말하기를 어머니가 그러하면 딸도 그러하다 하리라(44).” 악은 되풀이한다. 죄는 순환을 거듭하며 우리를 더욱 병들게 한다. 아프지 않은 척, 아이가 그처럼 드세게 굴던 이유를 알겠다.

 

아,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네가 모든 악을 행한 후에 너를 위하여 누각을 건축하며 모든 거리에 높은 대를 쌓았도다(23-24).” 누각을 쌓고 거리에 대를 높여 스스로들 잘해보려고 하는 것인데, 이에 화있을진저. 결핍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 들 아이를 생각하며 주님을 생각하였다. 주께서 우리에게 저 아이를 보내신 까닭이었다. 아이는 그저 삐딱하다. 다음 주일엔 안 와요. 말이 너무 길어요. 졸려서요. 투덜거리듯 불만을 말하면서도, 아이들은 집에 엄마가 있는지 돌아가면서 하나 같이 전화를 걸어댔다.

 

이를 어찌 감당해야 할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고전 15:34).” 내가 그러했음을. 그러했던 아이가 사람 품을 찾아 떠돌 듯 이 사람 저 사람 구걸하듯 사랑을 찾아다니는 것을 생각하면서. 다시 또 이와 같은 아이들이라니. 내 안에 이는 어떤 부끄러움, 그 정당함에 대하여 묵상한다. 어른으로서 그러하고, 주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러하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인해 그러하다.

 

“사람들은 모든 창기에게 선물을 주거늘 오직 너는 네 모든 정든 자에게 선물을 주며 값을 주어서 사방에서 와서 너와 행음하게 하니(겔 16:33).” 그 수고가 남다르지 않은가. 저들이야 피차 하나님과 상관없으니 그것으로 값을 매겨가며 먹고 산다 해도, 주를 안다고 하면서 어찌 우리가 그처럼 구차한 것인지. 들어보면 젊어서 처녀 때 다들 교회를 다녔던 엄마들이다. 그랬던 이들이 누군 수시로 남자를 바꾸어 살고, 누구는 늘 돈에 허덕이느라 일에 치이고, 누구는 두 아들 때문에 몸살을 앓는다.

 

“네 음란함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함은 행음하려고 너를 따르는 자가 없음이며 또 네가 값을 받지 아니하고 도리어 값을 줌이라 그런즉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34).” 차라리 세상에서도 세상 사람처럼 살지 못하고 헐떡이는 모습이 서로를 부끄럽게 한다. 어떻게 마침 오후께 걸려온 아이엄마의 통화와 아내가 전해주는 구구한 사연을 들으며 아이의 얼굴이 중첩되고, 그와 같은 상황이 나는 심란하였다. 순간 버려진 소금을 생각하였다.

 

그렇듯 아이는 또 자라서 엄마가 그러했듯 아이도 그러할 것인지.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전 6:5).” 깨달아 주 앞에 다시 세워줄 이가 그처럼 없는가. 주가 내게 보내신 이유이겠다. 더욱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자. 품을 수 있을 때 한껏 주님의 마음으로 품자. 또 그러다 후드득 둥지를 날아간 새가 된다 해도, 최소한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실 때 우리가 더욱 주의 사랑으로 대하자. 아내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아이를 안타까워하긴 마찬가지였다.

 

큰 아이는 이번 주일에도 오지 않았다. 어디 여행을 갔다며 다음 주일에는 꼭 오겠다고 하는, 아이의 문자만으로도 다행이다 감사하다, 마음을 쓸어내리며 안도하였다. 연락이라도 주었다는 것에 아내와 둘이 안도하는 우리 마음도 우스웠다. 우리가 살면서 사는 동안에 주를 영화롭게 하는 일에 다하지 못할 때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 이를 안타까워 속상해할 수 있는 것. 대신하여 주 앞에 고하며 긍휼하심을 바랄 수 있는 것. 그러게, 언제부턴가 우리가 그게 된다. 그러고 있는 우리 스스로가 희한하게 여겨질 정도로 말이다.

 

무력함에 대하여, 원통함에 대하여,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 어려운 상황을 그저 안 됐다고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리 두신 데 따른 위의 역할을 생각하였다. 다음 주일엔 추수감사주일로 과일 하나씩 가져와서 같이 샐러드를 만들어먹자. 끝나고 물감놀이를 할 테니까 각자 좋아하는 색깔 아무 거나 하나씩 들고 오고. 아내는 오랫동안 미술학원 선생을 했던 게, 본능적으로 써먹게 되더란다.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받는 고난이다. 할 수 있을 때 하고 해야 하는 걸 하며 할 수 있는 걸 하자. 세상눈으로는 이게 참 어이가 없는 거라. 고작 아이 셋을 놓고 지금 뭐하는 건가, 싶은.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그런 상황을 두신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말씀으로 우린 듣고 배웠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과 사건과 사건 사이의 벽을 굳이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다. 이를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고, 그는 분명히 선하시다는 것. 전날에 읽었던 우화에서처럼 저가 왜 저러는지, 나는 왜 이러는지 누가 알겠나. 우리가 몰라도 된다.

 

다만 확실한 건, 나는 나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 행여 누가 있었다면, 어른 성도라도 같이 했더라면 이처럼 저 아이 하나에게 집중할 수 있었겠나. 내가 어릴 적, 또는 같이 곁을 나란히 했던 어느 아이가 중첩되면서 오늘 이 아이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겠으니.

 

내 은혜가 족하였다. 나의 약함이 온전함을 바라였다. 크게 기뻐할 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와 같이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이제 알겠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의 약함에 머무시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10).”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 더욱 주를 바랄 수 있는 힘이 거기에서 나왔다. 아내와 딸애가 머리를 하러 미장원에 가고 나는 오후 내내 교회에 혼자 남아서 노곤하니 여러 생각에 젖었다. 나의 자랑이 약함에서였구나.

 

그것으로 저 아이들을 안타까워할 수도, 이 상황을 부끄러워할 수도, 그래서 애통함으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었구나. 그러한 게 내 눈에 들어오게 하시려고, 저 마음에 아우성이 우리들 귀에 들리게 하시려고, 주의 귀와 눈을 갖게 하시려고.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런 것이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너를 사랑하시는 거다. 어릴 때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말씀이 그런 의미였구나. ‘이는 주의 능력이 나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아,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것으로 나는 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가난이 또는 여러 마음의 곤고함이 도리어 주의 은혜를 사모함으로 저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또는 아이의 허기지는 사랑의 결핍을 눈여겨보게 하시는 거였구나. 그래서 이제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 그러니까 난 단순하여서 ‘다음 주일엔 갈게요.’ 하는 아이의 문자에도 크게 안도하는 것이었다.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8-9).” 나로 하여금 마음을 쓸 줄 알게 하시려고, 그것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며 주께 아뢰어 기도하게 하시려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7).” 평안을 빌어주며.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109:4).”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