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전봉석 2017. 11. 16. 05:00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

에스겔 26:2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시편 132:4-5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하여는 멸망뿐이다. 두로가 하나님의 진노 앞에 놓인 것은 유다의 멸망을 보고도 스스로 돌이킬 줄 모르고 오히려 자신은 충만하다, 여긴 것이다. “인자야 두로가 예루살렘에 관하여 이르기를 아하 만민의 문이 깨져서 내게로 돌아왔도다 그가 황폐하였으니 내가 충만함을 얻으리라 하였도다(겔 26:2).” 이에 저의 해상무역을 막으시고 그로 인해 황폐하게 하신다. 저가 의지하였던 것으로 저를 치시는 것이다.

 

삶은 모든 게 계시다. 말씀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시는 계시라면 곁에서 누가 또 어떤 일이 터지거나 당하는 걸 보여주심으로 돌이켜 깨달을 기회를 제공하신다. 이어서 시편의 말씀은 적절한 대응과 기도를 알려준다.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하지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시 132:4-5).” 주의 뜻이 무엇인가 알고자 하여 마음을 다해 또 뜻을 다해 주를 찾고 그 뜻을 헤아려 알려고 하는 것이 성도의 기본자세이겠다.

 

손 털 듯 이웃하던 사무실이 비어졌다. 저가 쓰던 컵이나 일용잡품을 쓰라고 주었다. 마음이 안 됐다. 남한에서의 삶이 더 고단한 것이다. 역으로 이를 겨냥하며 얕잡아보는 이녁의 품도 옹졸하기만 하였고. 그러니 그 고달픈 생을 어디서 어떻게 다하다 갈 것인지. 차라도 한 잔 대접하며 시름을 달래주고 싶었는데, 아이들 수업이 이어졌고 뒤미처는 엉뚱하게도 주인 내외가 건너와 커피를 대접해야 했다.

 

보여주시고 들려주실 때 주를 바라고 의지할 수 있는 게 지혜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멸망도 주저하지 않으셨는데 하물며 우리일까.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었던 나의 지난 모든 여정이 은총이었다. 새삼 이와 같은 말씀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주가 나를 얼마나 귀히 여기시는지. 돌아보면 또한 그러는 동안 내 곁에는 항상 날 위해 기도하시던 이들이 계시다. 곧 오늘 내게 저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려고. 때가 되면 돌이키실 겁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였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 땐 그처럼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했는데 중학교 올라가면서 신앙을 버렸다고, 아이엄마는 곁에 앉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이이가 돌아오면 모든 게 순탄할 텐데요. 하고 넌지시 자신의 기도 제목을 말해주었다. 딸애와 수요예배를 다녀온 뒤였다. 사장은 뻘쭘하여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자신도 아는데 아직은 아니라는 눈치였다. 내게 익숙한 자세였다. 다 알겠지만 굳이 서둘 건 없다는 그런. 그러니 내가 뭐라 한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다 돌아오게 하십니다. 자녀를 포기하지는 않으시니까요. 나는 확신하였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말씀하시는 이가 또한 들려주신 대로 풀어주실 것이다. 나는 가끔 돌이켜보면 나의 아버지는 어떻게 나를 기다리셨을까? 의아하다. 일찍부터 담배를 피우는 것도 알고 계셨는데 한 번도 나를 추궁하신 적이 없다. 교회와 멀어지는 나의 생활을 애태워하면서도 늘 또 똑같이 믿어주었다. 이제와 보면 나를 믿으신 게 아니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신뢰하신 거였다.

 

주일에 교회는 잘 갔는지. 말씀은 잘 읽고 있는지. 기도 생활은 어떤지. 가까이 어울리는 친구들은 어떠한지. 나는 항상 아들 녀석이 필리핀에 떨어져 있어 그런 게 마음에 쓰인다. 그걸 일일이 확인하고 채근하여 보챈다고 될 일은 아닐 것이다. 매일 기도하면서 채근하듯 주께 간구하는 것이다. 그렇구나. 말씀을 하신 이가 또 말씀을 열어 들을 귀도 주시는 것이겠다. 특히 초등학교 아이들을 수업하면서는 아이들보다 아이들을 사랑하시는 주님을 신뢰하려고 노력한다. 보면 늘 똑같은 말이지만 가장 다루기 어려운 아이가 교회에 온다.

 

주가 하신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고전 6:2).” 주의 이름으로 세상을 온전하게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열어주시기를. 하여 주만을 바라고 의지하면서 무던히 또 묵묵히 나의 가는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하시기를. 교회가 세상 법정에서 판가름 내야 할 일이 큰 교회를 중심으로 왕왕 벌어지고 있으니, 이 시대는 참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게 만든다. 너무 많아서 그런다. 보고도 깨닫지 못하는 두로와 같아서이다. 어쩌다 주객이 전도 된 것일까?

 

말씀 앞에 앉기 위해 다른 날 보다 일찍 일어났다. 필리핀 동생네가 다섯 시면 귀국을 할 거여서 아무래도 평소대로 하면 시간이 겹칠 것 같아서 말이다. 이 시간을 먼저 지키고 싶었다. 죽는 날까지 내 기력이 남아 주 앞에 앉을 수 있는 때까지, 한 손을 휘저으면서도 묵상 글을 쓸 수 있다면. 이처럼 말씀으로 하루를 열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게 하시기를. 딸애가 종종 그렇게 표현하며 기도한다. 하루의 마무리를 예배로 올려드릴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아이의 기도에 놀라고는 한다.

 

올려드리는 시간이다. 나의 남은 생이 모두 그럴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상과 꿈을 이루며 성공적인 인생을 살라고 원하지 않으신다. 어느 큰 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으면서도 세습을 하였고, 또 누군 교회 돈을 횡령하여 법정에 섰고, 누군 학위논문 표절로, 누군 간음함으로, 하여간 요지경인 교회들을 보면서 나는 어쩔 것인가? 두로와 같이 그저 나는 충만하다 하고 돌이켜 주 앞에 서기를 외면할 것인가. 오늘 말씀은 그리 내게 묻는다. 그래서 넌? 마치 남 얘기하듯 구는데 너도 다를 것 없다.

 

사장은 이모부 목사가 교회 안에서 있었던 스캔들로 마음이 굳어 있었다. 평소에 자기밖에 모르는 저이의 성품 때문에도 교회를 목사를 신뢰하지 않았다. 저도 한때는 열심히 믿었습니다. 종종 저는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너스레를 떨 듯 그리 말해주었다. 주님의 주권 가운데 주의 뜻에 따라. 이제 나의 남은 생애는,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고전 7:32).”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까?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시 132:7).” 이보다 더 값지고 소중한 일은 없게. 나의 빈궁한 살림이 또는 어눌하기 짝이 없는 말씨와 한심할 정도로 처량한 신세에 대해서도 굴할 게 없음은 나의 마음이 항상 주를 바람이었다. 그러하기를. 그러해서 우리 교회가 교회다운 역할로 하나님을 나타내기를. 위로하고 다스려 저들의 본이 되게 하시기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 세상을 보며, 벌어지는 일들 앞에서 주를 바라는 마음으로 온전히 또 온전하여서 주의 발등상에 엎드려 예배하리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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