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를 송축하라

전봉석 2017. 11. 18. 06:55

 

 

 

네 무역이 많으므로 네 가운데에 강포가 가득하여 네가 범죄하였도다 너 지키는 그룹아 그러므로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냈고 불타는 돌들 사이에서 멸하였도다

에스겔 28:16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시편 134:1

 

 

 

무턱대고 잘 되는 게 좋은 게 아니다. 그럼 더 겸손하여 주를 바라면 좋을 텐데, 사람이 어디 그런가. ‘무역이 많으므로 강포하여 범죄 한다.’ 아름다움으로 교만하고 영화로움으로 지혜를 더럽힌다. 그래서 결국 버려져 구경거리가 되게 하신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며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럽혔음이여 내가 너를 땅에 던져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였도다(겔 28:17).” 그러니 가장 두려운 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시는 것이다.

 

우리의 절규는 단 하나다.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 그렇지 않으면 어찌 살까?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삼상 4:21-22).” 우리는 저녁에 기도회를 통해 그리 구하였다. 주의 임재가 이웃하고 있는 이들에게도 권능이 되게 하옵소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 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겔 43:2).” 우리 교회가 저들에게 함부로 여겨짐을 당하지 않게 하시고,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 60:1).” 비록 별 볼 일 없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그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22).” 주께 항상 구하고 바라는 기도였다.

 

정말이지 하루가 금세 지나갔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느라 오전이 뚝딱 갔다. 점심을 먹고 정신과에 들러 약을 새로 받아왔다. 잠깐 몸을 뒤틀고 누웠다가 오후께 아이들 수업을 하고 청소를 끝냈더니 딸애가 퇴근하였다. 아내는 만두를 삶아왔다. 우린 같이 말씀을 읽고 교회를 위해, 우리에게 두시는 아이들과 그 가정을 놓고 기도했다. 아이엄마가 아이 편에 감사헌금을 보내왔다. 점점 어둡기만 한 세상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1).”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분명하였다. 교회 위에 주의 영이 임하실 것이다.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2-3).” 그러므로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4).” 전혀 미동도 없는 사람들을 품고 저 아이 한둘 건사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를 뿐이지만,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5).”

 

참 멋진 말씀이다. 묵상할수록 소망이 인다. 주의 영광이 임하시면 나타날 증거들이다. 빛을 발할 것이고(1-3), 자녀들이 회복되며(4), 오직 주의 영광만이 드러나실 것이다(5).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저들 보기엔 한심할 지경이나 언제부턴가 우린 개의치 않는다. 한 명이면 어떤가? 생각할수록 참 두렵고 떨리는 일이, 어떤 목회자가 되겠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나는 목사고시 면접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사랑하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의 대화 절반은 아이들이다. 나의 관심 전부가 그리 되었다. 나도 이럴 줄 알았나? 참 신기하게도 싫은 애들만 골라서 곁에 두시는 것 같다. 수업을 하면서 열불이 난다. 한데 녀석이 감사헌금이라고 삐쭉 봉투를 내어놓기에 기도 제목을 써라, 했더니 그 내용이 순진하고 간결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우리가 모여 공부를 배울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해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아이가 적은 기도 내용을 보다 얄밉고 성가셨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았다.

 

어떻게 하시려는가? 사장은 정말 아이에게 약속을 했던 모양이다. 갈 마음만 있으면 이번 겨울방학에 필리핀 단기연수를 보내주겠다. 아이는 약간 두렵고 들뜬 마음에 어떻게, 어떤 곳인지 물었다. 큰 애 둘이 같이 가겠다고 하는데, 글쎄. 나는 아이들의 되바라진 성품이 행여 동생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천방지축이라 공연히 서로 마음을 두었나, 싶기도 하고. 그러다 아이 기도문을 읽고 회개했다. 예수 이름으로 하는 일이다. 아이들을 마주하고 대하는 일이 말이다. 내 실력과 나의 성품으로 이루어가는 일이 아닌 것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그렇지. 우리는 숨겨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고로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15).” 싫든 좋든 비춰야 한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 돌이켜 주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우리가 주를 바라고 의지하면서 드러나는 ‘착한 행실’에서 나타나는 것이겠다.

 

그래. 그렇지. 예수 이름으로 소진되는 삶이 가장 환하고 빛난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싫은 아이를 통해 우린 좋으신 하나님을 마주한다. 가장 어렵고 되바라진 아이를 다루면서 나에게 향하신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을 되새길 수 있는 것이다. 싫다고 다시 보면 그게 항상 나였다. 그렇구나. 나의 의무이면서 특권이 곁에 두시는 한 영혼을 주의 마음으로 대하는 일이었다. 떠나고 외면하면이야 별 수 없겠으나 곁에 두시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 1:6).” 견딤이 곧 순종이라. 때론 그저 가만히 나를 복종시키는 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4:12).” 날마다 나는 죽고 날마다 너는 산다. 내가 죽어야 너를 살린다. 고작 아이 셋을 두고 수업을 하면서 이런 말씀을 붙든다는 게 민망하기까지 하지만.

 

때론 아이보다 다루기 힘든 영혼도 없다. 아,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이와 같이 순순히 나의 고백이 되길 주의 이름으로 바란다. 사역이란 게 몸으로 써가는 일이라, 가령 아내는 가끔 아이를 건사하는 일이 보모 같다며 어려움을 토로한다. 공부를 시키는 게 아니라 배고파해서 밥을 차려주고, 쓸데없는 푸념이나 들어주면서 다독이고 어르느라 기진할 지경이다. 내가 대체 이런 애한테 뭐하고 있나, 싶은.

 

환멸이 또 초라함이 우릴 옥죌 때, 삶으로 기록하는 우리의 수고가 곧 사역이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밀린 교육비만 다 회수해도 천만 원은 족히 될 판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적게는 서너 달씩 또는 일 년 반이 넘게 그냥 보내는 아이들에 대하여, 아내의 마음은 때론 좀이 쑤시다가도 때론 아이가 안쓰러워 꾹 눌러 참다가. 그럼에도 아이엄마들의 사치와 겉멋에 눈이 돌아갈 지경이니까, 누굴 보고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나.

 

‘예수 이름으로’밖에는 달리 길이 없다. 아이가 쓴 기도문에서 나는 새삼,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고 또박또박 쓴 글자에 놀랐다. 그렇지? ‘예수 이름으로’였었지? 하고 새삼스럽게 나를 일깨우는 어떤 감동이었다. 내가 수고하고 애쓰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참고 견딘다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안 믿는 부모들 밑에서 그 가정에서, 둘러싸고 있는 안 믿는 친구들과 사회와 문화 가운데서, 그럼에도 아이가 ‘예수 이름으로’ 아뢰고 구할 수 있는 것이 기적이지 않겠나!

 

그러게 말이다. 내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데 사용되는 더러운 대야일지, 혹은 주의 피를 담은 포도주 잔이 될지, 내가 선택하는 일이 아니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라. 그러할 때 대야면 대야로 쓰이면 되고 잔이면 잔으로 쓰이면 된다. 잔이 대야가 될 수 없고 대야에 포도주를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것도 내 일이 아니다. 주의 영광을 위한 것.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 오늘 나에게 두신 이 날이 족하다. 정신과에 들러 한 달 치 안정제를 타서 돌아오는데 바람이 몹시 불었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쓸려 다녔다. 발치께 흩어지는 낙엽 같았다. 부서지고 흩어지는 우리의 시간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바짝 마른 노란 은행잎은 아무 대답도 없이 쓸려갔다. 어디서 무엇이 되던,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그렇지. 어느 것 하나 은혜 아닌 게 없었나니. 어둡고 힘들 때 오히려 주를 송축하라. “보라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시 134:1).” 오늘 시인은 역설적으로 노래한다. 그럴 수 있는 밤은 성전에서였다. 나는 주의 성전에 서서 주를 송축함이라.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2).” 아이의 또박또박하였던 글자, ‘예수 이름으로’ 말이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 아멘.

 

 

 

 

 

 

 

 



'[묵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0) 2017.11.20
다 행하셨도다  (0) 2017.11.19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0) 2017.11.17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0) 2017.11.16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0) 2017.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