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전봉석 2017. 11. 17. 07:14

 

 

 

섬의 주민들이 너로 말미암아 놀라고 왕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도다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다 너를 비웃음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에스겔 27:35-36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편 133:1

 

 

 

가족이라는 말, 나의 형제라는 말, 그 관계의 무게는 상상 이상의 마음이다. 저절로 마음이 쓰이는 일이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한 생을 살아가면서 서로를 위하고 위로하며 의지하는 것은 각별한 하나님의 배려다. 그러함으로 얻는 유익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필리핀에서 생활하다 잠시 다니러 온 동생네와 길게 하루를 보냈다. 저 또한 짬을 내서 하루를 먼저 우리와 보낸 것이니 피차의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아내는 새벽부터 일어나 전을 붙이고 애들이 좋아할 걸 만드느라 수선을 떨었다.

 

다음날 일찍 서둘러야 하는 일들이 있어 저녁을 먹고 택시를 불러 처가로 들어갔다. 가령 이런 것이다. 같은 층에 사는 ‘택시아저씨’에게 주소를 주고 늦은 밤에 먼 길을 부탁하였다. 물론 돈벌이이긴 하지만 흔쾌히 그리 마음 써주는 이가 고마웠다. 하지만 이후 동생네가 잘 도착한 걸 확인하고 비로소 안도하며 잠자리에 드는 일과 값을 지불하고 그만큼의 고마움을 표현한 것 외에 우리가 다시 이이가 잘 들어왔는지 물어볼 일은 아닌 것이다. 어떤 구분, 더는 굳이 마음 쓰는 일이 오히려 적당하지 않은.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읽어보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함께 주를 바라고 의지하며 언제 어디서나 응원하고 합심함이 복되지 아니한가. 이에 “섬의 주민들이 너로 말미암아 놀라고 왕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도다 많은 민족의 상인들이 다 너를 비웃음이여 네가 공포의 대상이 되고 네가 영원히 다시 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겔 27:35-36).” 곧 두로의 멸망은 조소거리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섬처럼 구획되어 다만 저들의 멸망이 비웃음거리라.

 

누군 가슴을 찢는 한이 있어도 그리 마음이 함께 하는가 하면 누군 거기까지, 더는 내어줄 마음이 없는 처지도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인자야 너는 두로를 위하여 슬픈 노래를 지으라(2).” 하신다. “너는 두로를 향하여 이르기를 바다 어귀에 거주하면서 여러 섬 백성과 거래하는 자여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하였도다(3).” 그랬던 민족이 겸손하지 못할 때의 애가라. 슬픔의 노래가 아닌 조소거리가 되는 것이다. 함께 하시지 않는 민족의 헛됨에 대하여.

      

마음을 같이 하고 뜻을 같이 하고 생활을 같이 하는 형제로서의 주를 바람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한 일인가. 고작 꽉 찬 하루를 같이 보내면서 춥다는 말 한 마디에, 뭐가 먹고 싶다는 바람 한 마디에, 그리 신경 쓰이고 돌보고 기우는 마음인 것이야 어찌 주의 선물이 아니시겠나. 남이라는 말보다 차가운 건 없다. 한데 내 님이라는 말보다 정겨운 사람도 없다. 그리 여겨지는 마음에 대하여,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2-3).”

 

봉헌하다의 헐몬과 단비와 다를 바 없는 이슬 같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풀려나 성전으로 오르며 지은 노래라.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 우리가 함께 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름 마음이 그리 기우는 데는 주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말씀이 함께 하시는 삶.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건물 사장이 건너와 같이 한 시간 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새삼스러웠다. 동생에게 필리핀에서의 생활과 주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게 하시려는 걸 느꼈다. 물론 사장은 둘째 아이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에 현실적이었고, 우리의 관심은 그리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를 들려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더러는 저의 말에 공감하고 수긍하고 존중하나, 그 모든 게 궁극적으로는 주의 도우심인 것에 대하여. 문득문득 동생의 말투에서 아버지를 느꼈다.

 

사는 게 때론 거울의 방 같다. 어떤 날은 볼록 거울의 방에 들어온 듯 짜부 되고 뚱뚱하고 기형적으로 낮다. 어느 날은 오목 거울의 방 같은 하루여서 가운데가 얇고 가장자리가 두꺼워서 것도 또한 기형적이다. 본래보다 멋져 보이고 또는 거꾸로 서 있기도 하면서. 중심을 잡을 수 없는, 하나님이 없는 마음은 그날그날 다르다. 하나 우리에겐 중심이 분명하지 않은가. 좋은 일에서도 남들은 좋은 것만 보지만 우리는 그리 여겨주시는 하나님을 마주한다. 싫은 일에도 누군 자꾸 싫은 데만 신경 쓰며 괴로워하지만 우린 그리 다루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한다.

 

이 모두가 은혜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15:10).” 뭐라 한들 저는 그저 사는 현실을 말하는데 우리는 그 삶이 얼마나 큰 주의 은혜인가를 말한다. 이처럼 감사의 영으로 살 때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우리는 저들보다 가진 건 없으나 부요하고 넉넉하지는 않으나 풍성하였다.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게 하시는 주의 은혜가 컸다. 그렇지. 주의 영광을 위해 나의 삶을 소진하는 일. 정작 실패인 것 같고 빈궁한 삶인 듯 하나 저들이 어찌 알까.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힘을 다해, 그 힘으로 수고한다. 돌아보면 하나도 내가 한 게 아니었습니다. 하는 말을 이웃하고 있는 사장은 알아들었을까? 그저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렸을까? 명성을 떨치던 두로의 멸망처럼 훗날에 이르러 조소거리가 되어서야 알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다 없어도 되나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에 대하여.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리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 하시려고.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지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지금 누리는 게 다가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다. 나의 생이 다한다 해도, 남겨질 아이의 생이 다한다 해도, 우리가 다다를 곳은 하나였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돌아보니 어느 것도 모두 은혜였다. 새삼 내 아들을 필리핀에 떠맡기듯 떼어 보낼 때, 모든 걸 잃은 듯 산산이 조각난 마음이었는데.

 

그렇지. 이내 자신이 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아무도 될 수 없는 게 본질적으로 삶의 본분이었다. 마치 내 아이가 나의 전부인양, 너를 향한 마음이 우선인양 굴지만 나는 나다. 큰 대야였거나 작은 물 잔이었거나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것이 은혜였다. 때가 되면 물이 찰 것을 어부는 잘 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날, 비로소 참된 동거함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온갖 우상숭배도 불가지론도 무신론도 현대사상도 자기가치도 얼마나 쓸모가 없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저들에게 보여주게 하시려고, 두로를 위해 애가 함이 정말로 슬퍼서 또는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조소이다. 통쾌함이다. 애통하는 자는 심판을 기다린다. 곁에 앉아서 지난 십여 년 간 필리핀에서 어찌 살았는가, 하는 얘기를 이웃하고 있는 사장에게 들려주고 있을 때. 나는 동생의 말에서 주의 은혜를 묵상하였다. 듣는 저는 어떠한지 알 수 없으나 예상치도 못한 그와 같은 자리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중은 알 수 있었다.

 

축복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건 그 계시의 영역을 밝히 알 게 하시는 것이고, 그것으로 소망을 삼게 하심이며, 같이 그 길을 가는 것과 그 영광의 풍성하심 앞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일이었다. 살리시고 앉히시고 복종하게 하심으로 보존하게 하시려는.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

 

이에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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