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36:23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
시편 142:5
반드시 주가 회복하신다. 여러 날이 걸려 너무 더디다, 드물다, 희귀하다 한들 우리가 아는 분명한 것은 이 땅의 어느 것도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이에 감사와 영광을.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하나 꼽으라면 끝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혹은 그 즐거움으로 모든 천하를 얻은 듯 행복하다 해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의 감사함이여. 그 마땅한 진리 앞에 아멘. 징계하심도, 외면하여 영구히 떠도는 민족이 되게 하셨다 해도.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4-27).”
때론 너무 고달프고 힘에 겹다 해도 그것이 끝이 있다는 데 감사하다. 이 또한 너무 좋고 황홀하다 해도 반드시 끝이 있다는 데서 더욱 소중하고 귀하여 영광되다. ‘아직도 우리는 조율중이다.’ 어느 유명한 연주자가 성황리에 공연을 마치고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곧 우리의 리허설은 끝난다. 연주가 시작될 것이다. 맑은 물을 뿌려 정결하게 하실 것이다. 새 영을 두어 새 마음으로 굳은 마음을 제거하실 것이다. 주의 영을 내 속에 두어 말씀을 행하게 하고 이를 지키게 하심이다.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28).” 앞서 간 믿음의 조상들을 묵상한다. 일찍이 노아보다 외로웠던 사람이 또 있을까? 긴긴 시간 저 혼자 무모할 정도로 방주를 짓던 시절, 사람들은 저를 어찌 여겼을까? 저는 이를 어찌 견뎌냈을까? 그의 아내와 자식들과 자부들은 또한 어떻게 순종을 이루어냈을까? 바로 그 땅에서 거주하며 나는 주의 백성이 되고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
을씨년스런 토요일 하루였다. 하필 필리핀 동생네가 돌아가는 날이었다. 하필 또 나의 생일날이기도 하였다. 쉰 살이 넘어가면서, 아니 어쩌면 주의 길을 걸어가면서부터 나는 나의 나이에서 자유로워진 듯 늙거나 쇠하여지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게 되었다. 머리는 하얗게 새고 성겨 가끔은 거울 속의 내가 나인가? 한참씩 눈을 마주치며 놀라워하곤 하지만,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4).” 곧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10).”
이 얼마나 감사하고 소중한 말씀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 감사한 일이지 않나. 일찍 글방에 올라와 십자가를 바라보고 앉았으려니까, 쉰둘? 쉰하나? 내가 산 날이 생소하도록 감사하였다. 조금은 그렇듯 우울한 것인지, 적적한 것인지 마음이 센티해져 있을 때 사장이 웬일로 토요일에 나왔다가 건너와 커피를 한 잔 하게 되었다. 저의 아버님이 오시기로 했고 같이 무얼 하려는 모양이었다. 저는 뜬금없이 살아온 날을 털어놓기 시작하였다.
신불자로 시작하여 결혼을 하고 아내와 자식을 얻으면서, 마흔다섯 그 시절을 지나오는 동안 어떠했는가를. 저는 왜 목사님 앞에만 오면 이런 얘길 하는 걸까요? 하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한 시간 남짓 말 그대로 별 얘길 다하다 갔다. 저가 주례를 어느 교회 목사에게서 받았다는 걸 처음 들었다. 이모님 쪽 자제들이 모두 목회를 하고 있다는 말도. 저의 처가가 어떠한지, 자신은 또 얼마나 고달팠는지. 그러게, 왜 그런 말을 내게 들려주는 것일까? 겅중거리듯 한 사람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다는 일은 경이롭다.
누군들 우여곡절이 없었겠으며 산전수전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 않겠는가만. 나는 가만히 저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다. 그랬군요. 아, 그러셨어요. 어쩐지. 하면서, 저는 마치 말이 고픈 사람이라 실컷 말을 하게 두는 것이 낫겠다고 여겼다. 저가 내 앞에서 자기 인생을 들려주는 건 여기가 교회라, 주의 처소라, 저는 주의 백성이라. 나는 그리 짐작하였다. 지금은 제가 이렇게 술 담배 다 하고 살지만 그래도 소싯적에는 교회도 다니고 믿음도 좋았습니다. 허허. 저의 너스레에 나 또한 피식, 웃어주면서.
새삼 살아온 날을 들여다보며 혼자 꿀꿀해지려니까 주가 저를 데려오셨나 보다. 봐라, 산다는 일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한 일일 것이나 지나가는 것. 끝내 잡은 걸 놓지 않으려 또는 기어이 잡아보겠다고 중년이 지나 노년에 이르러서도 안간힘을 쓰는 인생들에 대하여. 영생을 품고 사는 이와 단회적인 삶으로 그치는 줄 알고 기를 쓰는 인생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묵묵히 받아들이는 게 지혜였다.
유전된 것과 돌발적인 상황과 원죄에 이르는 비극적인 사태에 대해서는 말이다. 그러나 우린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어쩔 것인가? 내 안에 이는 두려움과 죄의식과 분노와 갈망을 점점 더 강화하며 늙어갈 것인가, 주 앞에 내려놓을 것인가? 나는 저에게 아직(!) 내가 아는 주님을 말하지 않고 있다. 지금 나의 하나님에 대해서도 굳이 설명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는 여전히 나름 안다고 여기는 그 하나님, 소싯적 철없던 시절의 위안쯤으로 여기는 주의 영광에 대하여. 때가 되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말하게 하실 것을 안다.
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할 때도 있는 것이다. 한참을 와서 그리 있다가 가는 바람에 나의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날은 어둑하였고 비바람은 갈피를 못 잡는 듯 거세게 흩뿌렸다 멈추기를 반복하면서, 동생네는 공항에 잘 나갔는지. 어찌 그 마음은 쓸쓸하여 가족들은 모두 안녕하신지. 부모님께 전화라도 드려야지, 하고 있던 것이 유야무야 기회를 놓쳤다. 뒤미처 한 시께가 다 돼 아내와 딸애가 나와 공부를 하다 늦은 오후께에서야 이른 저녁 겸 늦은 점심 겸 딸애가 근사한 식당에서 저녁을 사주었다. 세월이 참….
‘내가 여호와인 줄 여러 나라가 알리라.’ 주의 말씀이 든든하다.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36:23).” 우리의 짧은 생을 돌아봐도 이 말씀의 의미가 귀하고 감사하지 않은가. 주가 주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나를 돌이켜 오늘의 나로 주를 찬송하게 하신 것이다. 주가 우리의 눈 앞에서 주의 거룩함을 나타내신다.
어느새 훌쩍 자라 어른이 다 된 딸애와 늘 명랑하여 씩씩한 아내를 곁에 두심으로 그 증거를 삼게 하신다. 내가 지나온 날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내가 양육한 게 아님을 알게 하신다. 허투루 굴며 살고 함부로 여겨 못 되게 굴었음에도 한결같이 나를 돌보게 하신 아내의 헌신 앞에서 부끄럽게 하신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신다. 내가 한 게 아님을 보여주신다. 그리하여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하였나이다(시 142:5).”
이 고백이 나의 것이로구나. 주는 나의 피난처시라. 패하여 멍들고 신음할 때 기어이 나의 모처가 되어주시는 분. 이 사람들의 땅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나는 사장의 푸념어린 고달픔에 대하여 말해주고 싶었다. 그 수고와 애씀의 끝도 없음이 어느새 마흔다섯, 저는 깜짝 놀라 뒤돌아보는 그 시점에서 주가 함께 하셨음을. 해이하여 함부로 구는 동안에도 주의 긍휼하심이 함께 하고 계셨음을. 저는 우리의 분깃이시라. 우리의 피난처가 되심을. 고단하고 힘에 겨운 생을 돌이켜 평안히 눕게 하시는 이이신 것을. “내 영이 내 속에서 상할 때에도 주께서 내 길을 아셨나이다(3).”
주일날 아침, 일찍 또 깨우시고 말씀 앞에 앉히시더니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 이를 내게 들려주신다. 돌아보면 감사뿐이라. 전에 뭐가 그리 원통했는지, 억울하여 더 열심히 더 억척스럽게 더 꿋꿋하게 더 수고함으로 더 얻고자 했던 모든 나의 행복으로부터 해방하셨다. 더 수고하고 더 애쓰는, 마흔다섯의 젊은 사장을 생각하며 주께 구한다. 기어이 주의 사랑을 알게 하시려고, 한사코 저의 외면을 참고 또 기다리심을.
말을 한다고 알게 될 일인가 어디. 다 위로부터,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래 맞다. 주는 변함도 없으시다. 나의 외면과 부인에도 묵묵하셨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결코 낯빛이 달라지시는 분이 아니시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11).” 그분은 나의 아버지시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 15:15).” 나의 친구가 되심이다.
그리하여 내가 들어갈 나라, 언제든 연주가 시작될 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오늘 내게 허락하시는 성령 안에서의 삶이 그 맛을 엿보게 하신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에 귀 기울이게도 하신다. 아직 끝나지 않은 길에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나라에 대하여!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엡 6:7).” 내 앞에 두신 저이를 위해 기도한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1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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