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사랑을 베풀지라

전봉석 2017. 11. 29. 07:14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

에스겔 39:25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시편 145:14

 

 

 

죽은 나무인 줄 알았는데 새싹이 돋고 마른 흙에서 새순이 나며, 다 잊힌 줄 알았던 아이에게서 돌아오는 주일 날 오겠다는 연락이 왔을 때,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이제 내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열심을 내어 야곱의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풀지라(겔 39:25).” 곧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살전 5:2).”

 

느닷없을 때, 전혀 예상치도 못한 날에,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시 145:14).”

 

아이가 글을 쓰다, 주일 날 오라는 나의 말을 농담으로나 듣지만 나는 또 한다. 풋, 하고 웃고 마는데도 기다릴게. 위해서 기도할게. 하는 말을, 그렇게 들려주었더랬다. 물론 수능이 끝나고 것도 혼자 오기 머쓱하니까 같이 공부하던 아이와 오겠다는 문자였는데도 한 날의 내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내가 자꾸 피식거리며 웃자 맞은편에 앉아 기행문을 쓰고 있던 녀석이 왜요? 하고 물었다. 그러게. 왜 그럴까?

 

시맨즈의 <기억의 치유>를 다 읽고 휴 미실다인의 <몸에 밴 어린시절>을 주문하였다. 한꺼번에 여러 권을 살 형편이 안 되니까 한 권씩 주문하는데, 것으로 정독을 하게 되니 빈궁함이 오히려 유익이라. 아껴먹듯 밑줄 긋고 메모하는 게 늘었다. 왜요? 하고 묻는 저 아이의 막연한 질문이 기억 어디에 저장되어 저의 영혼을 움직일 것이다. 데이비드 시맨즈의 이번 책을 읽으면서 나는 그리 정의하였다. 기억이 나지 않고 심지어 다 잊힌 일인데도, 그것은 우리의 성격으로 취향으로 몸짓과 대인관계로 나타난다는 주장은 일리가 있었다.

 

그러게. 상처 받은 기억이야말로 스스로의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기억을 상실하고 산다고 하지만 그것이 우리 몸을 지배하고 영혼에도 막대한 영향을 준다니,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놀라웠다. 그러니 아이에게 주일을 권하고 예배에 나올 것을 암시하는 일은 내가 드러내는 ‘향기’이면서 ‘편지’의 한 면이기도 하여야 한다. 그저 잘해주고, 좋은 곳으로 기억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기억 저편에서 우리가 바라는 주의 영광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킨다는 일. 아, 이 사람은 그리스도인이구나! 하고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기억.

 

강제할 수 없고 설득할 수 없지만 몸에 배게 할 수는 있겠다. 마치 음식 냄새가 옷에 배듯 같이 있다 돌아가면 나의 ‘그리스도의 향기’가 저에게 은은할 수 있도록.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 2:15-16).” 내가 저에게 사망의 냄새가 될지 생명의 냄새가 될지, 이를 확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겠으나.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17).” 그렇지. 그래서 내가 바로 알아야 하고 온전히 서야 하는 일이겠구나. 그리하여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3:3).” 살아서 삶으로 드러내어져 읽히는 삶이었다. ‘그런 사람’으로 각인되는 일. 부러 그리 궁리할 일은 아니어도.

 

기다릴게. 주일에 보자. 하는 나의 말에 이제 5학년짜리 녀석은 풋, 싱겁게 웃고 마는데도 나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하고 말하면 사장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듣지만, 그럼에도 나는 또 늘 말끝에 때가 되면 주가 부르실 것을 암시한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달라진 게 있었다. 언제부턴가 저이의 말끝마다 목사님, 목사님, 하는 호칭이 분명해졌다. 은연중에 저는 이제 나의 냄새를 구분하는 것이다.

 

아무리 문을 닫고 도대체가 두려워하여 열어주지 않는다 해도, 주님이 들어오셨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19-20).” 주의 긍휼하심이 아니고는 단 하루도 온전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의 닫혔던 마음을 열고 들어오신 주님을 확실히 기억한다. 그 주님이 내 곁에 함께 하신다.

 

아이는 그저 풋, 하고 웃고 말지만. 사장은 멀뚱하니 딴청을 굴지만. 또 그런다 싶게 나는 말끝마다 주일에 보자, 기다릴게, 기도할게, 돌아오실 것입니다, 하는 말이 빈말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돌아와 “그들이 그 땅에 평안히 거주하고 두렵게 할 자가 없게 될 때에 부끄러움을 품고 내게 범한 죄를 뉘우치리니 내가 그들을 만민 중에서 돌아오게 하고 적국 중에서 모아 내어 많은 민족이 보는 데에서 그들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낼 때라(겔 39:26-27).” 내가 나의 삶을 돌아보면 그 증거가 확실하였다.

 

곧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28).”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하시려고,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9).” 어찌 아니 그러한가. 가만히 한 곳을 응시할 수 있게 하시는 이에게 감사를.

 

그러는 동안 때론 외롭고 벅차 힘에 겨워할 때는 책으로 또는 한 아이로 나의 마음을 비추신다.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 주일에 누구랑 같이 갈게요. 하는 문자 앞에서 울렁거리는 것이다. 설렘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러니까 말이다. 내가 얘한테 왜? 얘 때문에 뭐가 기쁘고 좋을 게 있다고.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뭐 해놓을까? 하고 답 문자를 보내곤 우스웠다. 그리곤 이제 주초인데 설교본문을 어디로 해야 하나, 어떤 말씀을 준비해야 할까? 공연히 마음만 부산하였다. 그러고 있는 내가 신기할 정도로 말이다.

 

주가 하신다. 왜냐하면 주가 그리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이처럼 내가 담대하게도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잠시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먼저 그리 아셨음이다.

 

그러므로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2).” 그러고 있다. 그리 되게 하신다. 그럴 줄 알았나?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을, 느닷없을 때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던 가운데서 이루어 가신다. 그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크게 찬양할 것이라 그의 위대하심을 측량하지 못하리로다(3).” 더는 용 써 봐야 소용없겠다 싶을 때, 하나님은 나에게 나를 기억해보게 하신다. 내가 어떠했나?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나? 눈물로는 다 못 갚을 그 은혜에 대하여, 내가 어찌 저 아이들에게 인색하게 굴 수 있겠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8).” 그렇지 않으셨다면 오늘에 나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어림도 없는 거였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9).” 그러므로 내가 할 일은 마른 흙에도 물을 주고 다 죽은 듯한 나뭇가지에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14).” 더는 어쩔 수 없겠구나, 싶을 때 주님은 닫힌 문을 통과하여 들어오셨던 것이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사 61:1-3).”

 

그게 오늘의 내 이유였구나. 곧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5-1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17).” 내가 할 일은 기도라. 간구하는 일밖에는 달리 더 좋은 수도 없다. 아이를 생각하며 상대적으로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을 더욱 감격해하며.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18).”

 

이에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19).” 이를 이제 확실히 아니까,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20).”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의 사랑이 더 깊고 온유하고 무궁하시니까.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2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