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에스겔 40: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시편 146:2
주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시고 주의 성전을 재건하는 데 따른 예언의 말씀이다. 이상 중에 이를 보이시고 느끼게 하시고 소망을 두게 하신다. 그럴 때 우린 더 이상 인생을 의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들도 그래봐야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갈 것을 알게 하신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하리로다(시 146:3-4).” 그리하여 나는 이제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2).”
1년생 화초가 추워지는 날씨에 맥을 못 추고 죽었다. 창가의 화초들은 겨울을 나면서, 겨울은 봄을 바라는 것 외에 다른 걸 바랄 겨를이 없었다. 누렇게 변한 잎들을 보며 난감하였다. 지나가는 것들의 찬란함을 생각하였다. 여름 내내 그처럼 풍성하여 줄기를 뚝뚝 잘라 물 컵에 담가두면 금세 또 뿌리를 내려 다른 화분에 옮겨 심곤 하였는데. 식물은 말이 없으나 더 귀한 언어로 속삭이는 듯하였다. 나무와 풀은 본래 주인이 따라 없다. 보는 이가 임자다. 가만히 눈길을 두고 서는 자의 것이다.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나니, 돌아가는 것들의 무상함에 대하여 겨울은 혹독한 추위로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서서히 늙어가는 내 초로의 삭신은 이를 다 알겠는지, 벌써부터 따뜻한 봄날을 기다린다. 보도블록 위에는 나뭇가지에서 떨구어진 낙엽들이 오가는 이의 발길에 밟혀 짓이겨지고 있었다. 천천히 걸으며 오가는 나의 짧은 동선에서도 겨울은 기세를 굽히지 않았고 사람들은 낙엽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한 여름 그늘이 되어주었고, 무성하였던 가지마다 새들이 깃들며 맹위의 햇살을 막아주던 것이기도 하였는데.
도울 힘이 없는 것을 의지한 데 따른 한 계절의 변화는 뚜렷하였다. 겨울나무들은 바람에 자지러지듯 남은 낙엽 하나까지도 다 떨구고 난 뒤에야 시치미를 뗀다. 저처럼 초라한 것이 그리울 때면 혹독한 시련이 닥쳐봐야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니. 야속하기는 사람의 마음이 더하지 않겠나 싶었다. 홀딱 뒤집곤 하는 좋고 나쁨의 간사함에 대하여, 양지바른 창가에 서서 겨울을 나는 화초들이 더 잘 아는 눈치였다. 다시 겨울이다.
몇 번의 겨울이 더 지나야 겨울도 없고 여름도 없는 주의 날에 들어갈 수 있을지, 겨울은 그러한 생각조차 사치인 것처럼 여겨지게 한다. 이 세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모든 생명에게 고난과 수치를 감내하는 길이지 않겠나. 죄란 결코 막연한 게 아니라는 것을 겨울이 닥쳐오면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백두산의 수려함보다 내 눈 앞의 이 보잘것없는 화초가 더 웅대하고 소중하였다. 소유는 그 아름다움을 내 품에 고스란히 간직하는 것이어서 더는 초라한 것이 중요하지가 않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1).” 이를 내게 알게 하시는 주께 감사를. 괜히 나는 조급한데 하나님은 느긋하심에 대하여,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 곁에 두시는 아이들을 사랑하되 내 의지나 노력으로 품을 수는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제법 진지하게, ‘이런 친구 꼭 있다.’ 하는 주제로 아이들이 글을 썼다. 잔망스러워서 나쁜 건 다 자신은 아니라 하고 좋은 건 다 자신인 줄 아는 어린 것들의 발칙함이라니.
아이들이 글을 다 쓰고 책상 밑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동안 나는 아이들의 글을 퇴고하며, 그 아이 하나하나마다 나름의 변명과 이유를 늘어놓는 것에 놀랐다. ‘그럼 나는 과연 어떤 친구일까?’ 하는 마지막 부분에서 한 녀석은 솔직하게, ‘그게 나였다.’ 하는 식의 토로에 피식, 웃음이 번졌다. 들여다보면 결국 다 자신을 보게 마련이다. 누가 어쩌고저쩌고할 거 없다. 그게 나였다, 하는 아이의 고백보다 단순명료한 자아성찰이 또 있을까?
아이들이 돌아가고 청소기를 돌려 지우개가루를 치우다, 겨울을 이겨내고 있는 풀들을 본 것이다. 아내는 중3 아이엄마와 한참을 길게 통화하였다. 인문계를 보낼 것인지 특성화고등학교를 보낼 것인지, 아이가 좋다면서 계속 다니겠다는 글방에 대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아내는 저이의 카톡사진을 보여주고 그 가족들 사진도 보여주었다. 아이의 순한 눈빛이 엄마를 닮았다. 나름 단란하게 연출된 가족사진을 한참 지켜보다 돌아누웠다. 사진은 여러 개의 말을 동시에 던져서 어쩔 땐 하나도 알아듣기가 어렵다.
이제 한 번 본 아이를 두고 나더러 자꾸 어떠냐고 물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하나? 그래서 나는 1년생 화초를 좋아하지 않는다. 한여름의 그 무성하였던 즐거움이 고스란히 버려져야 할 쓰레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다 싶을 때,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일은 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통째로 의지한다는 소리가 된다. 어떠해서가 아니라 어떠하든 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으심으로,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2).” 겨울이 와봐야 기어이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는 걸 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3).”
이에 나의 혹독함을 대신 지신 주의 사랑 앞에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가 오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아니라면 내 안의 묵은 허물과 죄악을 어찌 다 숨기고 살았을까? 그러느라 아이아빠는 무턱대고 엄하기만 한 것이고 아이엄마는 그 중간에서 쩔쩔매며 안간힘을 쓰는 것이겠으니. 자기 앞가림도 곤란한 처지다보니 그저 근심뿐이라.
근심 대신 찬송을, 슬픔 대신 기쁨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나는 화초들 앞에 서서 참 다행이다, 참 다행이다 말해주었다. 색이 누렇게 변한 1년생 화초를 어떻게 해야 하나 난감해하면서도, 그래도 좋지 않니? 하고 되묻듯이 쓰다듬어주었다. 이제는 더 미루지 말고 하나 둘 뽑아내야겠다. 내 안의 미련도 일찌감치 시들고 죽었을 것을. 그런 걸 나는 여태껏 손도 대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가끔씩 떠오르는 누구에 대하여, 또 무슨 일을 생각하며 미안하였다, 죄송하였다,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한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딸애의 스물일곱 번째 생일 날, 나는 아이에게 우리의 남은 생이 그러하기를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편지를 적어주었고, 그렇게 가정예배를 드리며 또 당부하였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기를 힘쓰자. 몸에 있든지 떠나든지. 한 생을 다하고 누렇게 색이 바랜 화초가 내게 알려주었다. 저는 나를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나는 비록 영생의 날을 더할 수는 없으나 식물 또한 어느 훗날 우리가 주 앞에서 함께 즐거워하지 않겠나. 모든 생명은 가감 없이 그 생을 다할 때까지 주의 기쁘심이라.
나야말로 아무 것도 변변히 해준 게 없는데, 아이는 훌쩍 자라 어엿한 숙녀가 되었고 같이 주를 바라며 의지하는 믿음의 동역자가 되어주었다. 우리가 한 게 뭐 있나? 아내와도 종종 얘기하다보면 의견의 일치가 그것이다. 고작 나는 아이가 좋아하는 칼국수를 사주면서 조촐한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11).” 고3 때 우리 부부는 아이의 아침상을 차려준 적이 없다. 다들 제멋대로여서 부모노릇에 변변하지 못하였다. 아이는 그럼에도 잘 자라준 것을 자랑으로 여겨 주께 감사한다.
주님이 키우셨다. 이제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12-13).” 잘 자라준 것이 순전히 주의 은혜였음을.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14).”
지나간 것들의 모든 아찔함에 대해서도 주 앞에서는 감사한 것들뿐이라. 두려운 건 세상이 아니라 주님이셨다. 주의 그와 같은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없었다면 어쨌을 뻔 했나. 이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돌아보면 그 많은 풍선을 물속에 담그려는 일이었다. 그 수고가 지긋지긋하였다. 미움, 시기, 질투, 분냄, 서러움, 간음, 살의, 악독… 온갖 추하고 더러운 것을 감추려고 때론 고상을 떨며, 때론 우아함을 가장하여 시치미 떼듯 아닌 척 굴면서. 밀어 넣어도 또 올라오고 밀어 넣어도 또 올라오고, 물속의 풍선 같아서 지겹기만 하였다.
나는 오늘이 좋다. 아내는 너무 일찍 기력이 쇠하는 노인 같다며 자꾸 뭐라 하지만 나는 나의 늙는다는 것을 사랑한다. 더는 욕정에 사로잡혀 몸부림치지 않아도 되고, 누구의 눈치에 또는 어떤 이의 말 한 마디에 안절부절 못하는 그런 가벼움이 아니어도 돼서 말이다. 이게 어찌 늙음이 주는 홀가분함이겠나만. 몇 번의 겨울을 더 지나야 진정한 봄날이 오려는지, 이 땅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일이겠으나. 우리 아이들이 모두 주를 바라며 주 앞에서 살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
고작 삼천오백 원짜리 멸치국수를 먹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돌아와 조그만 케이크를 자르고 딸애를 위하여 기도하며 축복을 빌면서, 문득 내가 또 우리 가족이 이러고 있을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은 것이었으니.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5).” 갇혀 살던 나에게 자유를, 눈 먼 나의 눈을 여시고, 주린 나의 영혼을 먹이시며. 비굴하였던 나를 일으키신, 나그네였던 나를 보호하시며.
“시온아 여호와는 영원히 다스리시고 네 하나님은 대대로 통치하시리로다 할렐루야(1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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