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전봉석 2017. 11. 28. 06:58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에스겔 38:33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

시편 144:2

 

 

 

우리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고 주께 묻는다. 그럼 주님은, 아무 것도! 하신다. 왜? 뭘? 어떻게? 하고 이는 내 안의 조바심이 자꾸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다. 아무 것도 안 해도 된다는 말씀에 어리둥절할 뿐이다. 이미 이루신 구원에 예비 된 천국이 있으니 뭘 더 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를 누려야 하고, 누릴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벽돌을 나르고 등짐을 지고 뭔가 거들어야 할 것 같고, 구원 받지 못한 자 같이 종노릇하는 데 익숙해한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 4:7).” 바동거려서 더 빠져드는 형국인데도 멈출 수가 없다. 생존수영의 기본자세는 힘을 빼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이던데.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시 46:10).” 그러기엔 왠지 불안하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은 하나님이 요구하시지 않았는데도 마땅히 여겨 애쓰다 혼자 지친다.

 

하나님이 이미 다 이루어놓으셨다는 말씀 앞에 어리둥절한 것이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십자가를 지으시고 죽으시고, 살아나시고, 승천하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까지.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 이를 자꾸 노역으로 바꾸어 놓는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겠다. 세상이 그러니까 말이다. 죽어라 하고 산다. 우리와는 반대다. 우리는 살아라 하고 죽는다. ‘날마다 죽는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동기 전도사 내외가 모처럼 놀러왔다. 첫 아이는 어린이집에 가고, 이제 막 돌을 지난 둘째 아이가 같이 왔다. 저들은 그동안 몸담고 있던 사임지를 그만 두고 새로운 사역지를 두고 기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온전히 주의 일에만 몰두할 수 없는 건 당장에 그게 수입과 연결이 되어 ‘처자식을 건사해야 하는 일’에 맞물리기 때문에 어려웠다. 것도 주의 일임을 말해주고 싶었다. 돈에 연연해하는 게 어찌 부정하다고만 하겠나. 마침 오늘 본문 말씀의 ‘곡’은 오늘 날 우리 길에서 돈 같다.

 

곡은 번번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대적하지만 이내 물리치고 승리할 것을 오늘 말씀은 예언하신다. 곡의 침략이 실은 주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올 것임을 말씀하신다. 돈에 구애 받지 않는 생이 어디 있겠나만, 돈의 지배가 없는 삶은 가능하다. 곡은 주의 백성으로 사는 데 있어 번번이 발목을 잡는 돈 같다. 남자가 돈을 벌지 못하면 제 구실을 못한다는 통념은 틀리지 않다. 누가 뭐라 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못 견뎌하는 부분이 크다.

 

그러니 전임이냐 파트냐, 다른 일을 병행하느냐 이 길에만 전념하느냐. 곡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재차 확인시키는 것이다. “인자야 너는 또 예언하여 곡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 이스라엘이 평안히 거주하는 날에 네가 어찌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겔 38:14).” 그러니 어쩐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저의 말에 나의 경우를 빗대어 말해주었다. 한동안 시달렸던 ‘어떻게?’는 그보다 앞서 ‘왜?’가 먼저였다. 왜 이러고 있지? 왜 아프지? 왜 안 풀리지? 왜 저 사람은 저렇지? 하는 식으로.

 

나를 그처럼 시달리게 했던 ‘왜’는 결국 그 물음에 답을 필요치 않다는 데 이르렀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 9:2).” 우리는 왜 그런지 궁금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그게 뭐? 하고 되물으시는 듯하다. 왜냐하면 어찌됐든 그건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이와 같은 마땅한 진리 앞에 ‘왜’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다음으로 시달렸던 게 ‘어떻게’였다. 난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럴 땐 어떻게 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는 따위의 질문들이 실은 정당한 것 같으나 미뤄둠으로 나의 안일함을 조장하곤 하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뭔가 수고하며 애써 나름의 노력으로 비춰졌을지 모르지만, 실은 그게 아무 것도 안 하는, 게으른 자의 습관적인 의구심이었다. 어떻게 해야 해? 하는 질문에는 마땅히 염려를 끌어들여 미루는 것을 정당화시킨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잠 26:13).”

 

그런 뒤 요즘 난 ‘그냥’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왜’든 ‘어떻게’든 자꾸 물어봐야 마음만 어수선하고 실제 해야 할 일을 미루게만 하였다. 잘 모르겠어도 ‘그냥’ 하자 이건데, 나의 ‘그냥’에는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싶은 마음을 원해서다. 이리 두시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그럼 나는 그냥 하는 정도로써도 순종일 수 있겠다 싶은 것이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자꾸 어떤 자구책을 찾지 말고, 그냥! ‘기, 승, 전, 하나님의 영광’이다. 주를 영화롭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출발한다고 해서 기승전이 순탄할까? 곡의 해코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절박함이 간절함으로 드러나 주를 바랄 수 있었을까? 우리 가정이 돈에 여유가 좀 있고, 그래서 아이 하나를 덜 받고 더 받고, 애가 오고 안 오고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면 사역이 더 순탄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배에 기름이 차면 눕고 싶은 법이다. 가끔 아내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물론 우리는 주의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하고자 한다. 주의 사랑으로 말이다.

 

한데 그게 저절로 우러나나? 결코 그럴 수 없는 게 사람이라. 이 애의 교육비 한 푼이 간절하다보니 애가 오고, 마음을 열고 재미있어 하게 하는 게 중요한 일이 된다. 그러느라 참고 또 인내하며, 당장 때려 치고 싶은 것도 꾹 참고 견디는 것이다. 물론 이게 또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될 일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게 하시려고 시시때때로 곡을 일으켜 이스라엘을 치게 하시는 것처럼 돈에 쪼들려 시달림을 당하게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안 아프면, 돈을 잘 벌며 남자 구실을 잘하면, 오늘 내 안의 주를 바라는 간절함이 훨씬 수월했을까?

 

‘왜’와 ‘어떻게’를 지나 이제 나는 ‘그냥’ 한다. 때론 그게 망치는 일이 된다 해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그냥’이다. 어떤 도움을 청해야 하나요? 주를 찬양해야 하나요? 먼저 당신을 아는 게 중요한가요? 당신을 알아야 사랑할 수 있나요? 알기 위해 당신을 찾아야 하나요? … 나의 이 숱한 헛된 질문들을 한 번에 싸잡아 묶어두는 게 ‘그냥’이다. 아프면 아픈 대로, 돈이 쪼들리면 쪼들리는 대로, 누가 또 상처를 주었으면 상처를 끌어안고, 조급하면 조급한 대로, 난처하면 난처한 대로 [그냥, 주만 바라자.] 요즘 나의 그냥이다.

 

‘그냥’이라는 나의 부사는 다음 행동을 규정하지 않는다. 나의 상태를 변명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를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에게서 배웠다. 저의 그냥은 훗날에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얻었다. 왜, 그냥 있었을까? 어떻게라도 좀 해보지! 어쩌자고 저는 묵묵히 그 꼴을 당하고 있던 것일까? 저의 어쩔 수 없음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나사로라 이름 하는’ 그 안에 감추어진 비밀은 온전히 그냥,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거였다. 너무 무력한가? 한심하고 답답한가? 아니다. 저는 최선을 다했다.

 

거지의 신분을 다했고, 헌데를 앓고 있었고, 주린 배를 감내했으며, 부자의 외면을 감수했다. 개가 와서 핥는 처참함도 이겨냈다. 저의 생을 가만히 묵상하다 보면 죽는 게 더 나을 터인데, 저는 그냥 두신 바 그 자리에서 죽지 않고 살아, 살아서 맡기신 신분으로 묵묵하였다. 그럴 수 있었던 건, ‘나사로라 이름 하는’ 그와 같은 단서였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것. 돕기는커녕 그냥 버려두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저는 다만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로 ‘그냥’ 두신 이의 뜻을 따랐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남자의 신분과 주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목회자의 신분이 충돌할 건 없다. 어차피 어느 쪽도 주가 아니시면 감당이 안 되는 건 매일반이다. 주가 하시게 두는, 맡김의 원리가 필요할 거였다. 그게 쉽나? 하고 묻는다면 뭔들 쉽나? 어차피 어려운 세상에서 다들 죽기 살기로 기를 쓰는 마당에, 그런들. 저들은 죽지 못해 사는 꼴이면 우리는 살지 못해 죽는 꼴이다. 저들처럼 살 수 없어서 날마다 죽는 자의 삶이란.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 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시 144:3-4).” 헛것이고 그림자 같을 뿐인 나를 주가 알아주시지 않나. 모두가 외면하고, 버려져 헌데를 앓으며 개나 와서 핥는 처지에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나 연명하는 인생인 것 같으나, 주께서 알아주시지 않나!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해, 의지할 수 있게 하시는 게 아닌가! “이같이 내가 여러 나라의 눈에 내 위대함과 내 거룩함을 나타내어 나를 알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겔 38:23).”

 

주의 엄위하신 약속이다.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그러기 위해 오늘 나를 이 지경으로 만드시고, 여기에까지 놓아두시고, 이 모양으로까지 망가뜨리신 것 같으나,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온전히 주의 도우심을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이어서 충분하였다. 나의 모든 용언은 그 앞에 붙은 부사 ‘그냥’에 의해 규정된다. 나의 그냥은 온전히 주를 신뢰하는 무게가 되어줄 것을 믿는다. 그 중심추가 흔들리지 않음으로 나의 가난도 질병도 또는 마음의 상처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다.

 

곧 “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시 14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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