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전봉석 2017. 12. 29. 06:59

 

 

 

너희는 명절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

호세아 9:5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

시편 25:14

 

 

 

주를 바란다고 하면서도 어찌나 저들과 다를 바 없이 구는지 모르겠다. 자식이 우상인 거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 보람과 기대 그 성취의 값을 스스로의 위안으로 삼아 구하려는 데엔 거의 당해낼 재간이 없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에 대하여 주님은 경계하신다.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요 12:25).” 날이 흐렸고 해가 들지 않아 종일 추운 날이었다. 늘 좀 덤덤하였으면 좋겠는데 마음은 저 혼자 들썽거렸다.

 

무슨 일로 엄마가 화났다며, 중3 아이는 안절부절 글을 쓰다 말고 돌아갔다. 구구한 사연을 묻지 않았다. 또 다른 아이엄마는 아이들 의사를 고려한 듯하나 일방적으로 방학 동안에 글방을 쉬겠다고 통보하였다. 엄마들의 극성이 도를 넘었다. 내가 뭐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나와 아이의 관계는 보잘것없는 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아이를 통해 아이가 관계하고 있는 선생과 이야기하고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면 좋았을 걸.

 

뭐라 한들 새겨들을 게 아니어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휑하니 아이가 돌아가고 설교원고 초안을 잡다, 막연하여서 또 우울하였다. 평생을 인디언 마을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이가 말하길, ‘저는 아무 것도 희생한 게 없습니다.’ 하는 고백이 새삼스러웠다. 엄마들의 폭력은 ‘내가 너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이다. 끊임없는 참견과 관여를 헌신으로 삼는다. 사랑을 강요하면 폭압이 된다. 동생이 잘못한 거지 넌 잘못한 게 아니잖아!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다소 엉뚱하게 물었다. 그래도 엄마가 화가 나면 모두가 피곤하잖아요.

 

아이가 남기고 간 말이 내내 마음을 울렸다. 짜증나니까, 피곤하니까, 행여 또 불똥이 튈 테니까. 이내 따르고 굴복하는 것을 사랑의 승리로 아는 데에 서글펐다. 죽어야 산다. 내가 살아보니까 그렇다. 내가 죽지 않으면 그러는 동안 내가 아이를 죽이고 있었다. 부모라는 이름의 자기암시가 그래도 된다는 살인면허를 부여하는 식이다. 자기감정에 겨워 아이들에게 총구를 겨눈다. 총구 앞에서 숨죽이는 걸 바른 교육이라 여긴다.

 

내가 뭐라 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나는 일체 토를 달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모두가 산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빙충이 같고 서러울 텐데 이를 오히려 자랑으로 여기는 덴 다 이유가 있었다. 앞서 말하였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19).” 바라는 결이 다른 것이다. 추구하는 의가 그게 아닌 것이다.

 

‘신경질적인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는 왜곡된 성(性)이 싹튼다.’는 어느 심리학자의 말이 옳은 것 같다. 관음증으로 번지고, 지독한 자기애에 함몰되어 자위행위에 빠지고, 급기야 모든 동성애의 기본은 엄마의 잦은 참견과 간섭(반대로 무관심과 결핍)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당하다는 말, 그럼 그 기준은 무엇이겠나.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시 50:22).”

 

무서운 일이다. 오늘 호세아서를 보면 그렇다.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호 9:6).” 나름 한다고 하는데도, 아이들은 병들고 있었는데 아무도 아프단 소리를 하지 못하였다. 아픈지 어떤지, 나름의 자기 위로를 찾아 게임에 빠져들거나 성에 매몰되거나 자기애에 집착하거나.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망각한 부모의 헛된 관여는 찢어지고 건질 자 없을 때에야 가슴을 치며 통곡할 일이다. 갑자기 한 아이엄마가 생각난다. 저는 큰 애에게 몰입했다. 아래로 두 아이는 찬밥 신세였다. 가장 좋은 학원, 과외 선생님, 진로 상담 등 아이엄마는 큰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한참 논술을 대비할 때 글방 앞에서 두세 시간씩 차 안에 앉아 기다리며 데려오고 데려가고 했으니까. 그나마 좋은 대학 영문과에 입학시키고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여길 때, 아이의 여성편력은 극에 다했다.

 

서너 달을 못 넘기고 이성을 바꿨고, 그때마다 어김없이 성적관계를 서슴지 않았으며, 그러고 나면 또 싫증이 일어 새로운 이성을 더 자극적인 관계로 복원하려드는 청년이 되었다. 이를 마치 무용담처럼 지껄여대는 아이는 이미 누구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쾌락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 엄마만 모른다. 동생도 글방엘 왔었는데, 심지어 사촌 동생들도 다 아는 사실을 아이엄마만 설마, 하면서 그저 그럴 수 있는 일로 치부하고 마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의 헌신은 소진되었다. 그러는 동안 자신의 젊음도 탕진되었다.

 

영국으로 유학까지 다녀온 유능한 그이는, 그 표현을 빌리면 아이 하나 키우는 데 모두 허비된 셈이다. 갱년기가 오고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 자신의 중년을 부정하게 되었다. 그러느라 모태신앙으로 젊을 때 가졌던 신앙도 잃었고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도 버렸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자신은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항변하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뭐라 한들, 들을 줄 모르는 귀는 자기 말로 꽉 막혀 있는 것이다. 말해달란다고 솔직하게 말해주어서는 안 된다. 졸지에 저는 총구를 내게 겨눈다. 그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모두 적으로 돌려야 자신이 살 수 있을 것 같은, 억울함. 그이 표현대로 인생에 남은 건 억울함뿐이다. 모 로펌 변호사 남편에 호강에 겨운 푸념처럼 들리지만 저이보다 초라한 인생도 없었다. 스스로 그게 억울해서 울며 전화를 했던 게 기억난다. 그러면서도 끝내 주를 돌아보지 않으려 하니, 아직 더 찢어져야 할 게 남았는지. 그런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명절 날과 여호와의 절기의 날에 무엇을 하겠느냐(호 9:5).” 저들처럼 굴다간 타작마당에서 찢겨지는 가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10).” 아랑곳하지 않는 영혼에 대하여는, 별 수 없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내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시리니 그들이 여러 나라 가운데에 떠도는 자가 되리라(17).” 저주의 말씀이 아니라 축복의 말씀이다. 이로써 돌이켜 주를 바랄 수 있다면 말이다.

 

‘저는 희생한 게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특혜를 입었습니다.’ 선교사 리빙스톤의 고백이 귓가를 맴도는 이유다. 다 버렸더니 모든 것 그 이상을 얻었다. 자신을 죽였더니 모두를 그 이상을 살렸다. “여호와의 친밀하심이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있음이여 그의 언약을 그들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그렇지. 아는 사람만 아는 특혜다.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할 때, 안다고 하나 머리로만 취할 때 그 마음은, 삶은 여전히 황폐한 것이어서. 주의 친밀하심은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만 있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을 누구만 받는 격이다. 이를 알면 과감해진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당장 벗어나야 할 오해 몇 가지 중에 자식이 전부라는 말, 가족이 우선이라는 말, 자신이 급선무라는 말. 그에 따른 보상과 가시적인 성과에 우쭐해하는 마음. 아이엄마는 아이가 그래도 적당히 상위권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면서 우쭐하였다. 자신이 일궈낸 성과라 여겼다. 거 보란 듯 큰소리쳤다. 그저 일시적인 것일 뿐인데도 말이다.

 

장차 올 영광을 알면 지금의 고난은 견딜만하다. 지금의 영광을 취하면 장차 올 고난은 견딜 수 없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단언하였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7-9).”

 

맡기신 것을 주신 것이라 여길 때, 이 사소한 오해가 스스로를 하나님이 된 줄로 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어떤데요? 하고 물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말을 주께 고한다. 저들은 다 하나 같이 기껏 솔직한 대답을 물었다가 항상 이를 변명하고 핑계 대며 급기야 총구를 내게 겨누는 것을 숱하게 보았다. 저들에겐 늘 당신이 틀린 것이다. 나는 말해줄 수 없는 말들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라. 특별히 그 아이를 위해 어머니가 기도 많이 하셔야 합니다.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다. 저이도 안다. 알고 싶지 않을 뿐이어서, 듣고 싶지 않을 뿐이다.

 

무엇을 바랄 것인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왜 하나님이 이 귀한 보배를 나 같은, 질그릇에 담으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주객이 전도되어 보배는 간 데 없고 그릇만 덩그러니 남겨질 걸 아셨기 때문이다. 그토록 ‘금쪽같은 내 새끼’가 뻐꾸기 둥지로 날아갈 날이 오나니, 종종 나는 아내에게도 너무 애들에 대해 미련을 떨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는 나에게 하는 소리이기도 하다. 끝내 남을 것은 주의 영광뿐이라. 그 능력은 하나님께 있지 내게 있는 게 아니었다. 이를 알게 하시려고, 내가 질그릇이어서 감사하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12:9).” 그러므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나이다(시 25:1).”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