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전봉석 2017. 12. 28. 07:07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

호세아 8:1, 12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편 24:1

 

 

 

산다는 일은 때로 너무 가혹하여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다. 이제 서른여덟, 젊은 목사에게는 아이 셋과 아직 어린 사모가 있는데 저이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신대원 동기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하고 기도를 모으는가보았다. 오전에 그와 같은 연락을 받고 내심 마음이 무겁고 안타까웠다. 더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은 언제나 속수무책이다. 오후께 아이들이 글방에 와서 재잘거렸고, 수업이 끝나고 나는 아들애와 같이 영화 <강철비>를 보고 왔다. 그러다가도 문득 저이를 떠올리면 가슴이 철렁하였다.

 

우리는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디모데전서 6장을 본문으로, 곧 사역을 받아 최전방으로 나갈 딸에게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말씀으로. 진로에 대해 생각이 많은 아들에게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9-10).” 말씀을 내어놓았다.

 

곧 우리 모두에게 오늘의 경건이 이익을 도모하는 방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였다.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5).” 이제 우린 주의 이름을 부르며 산다. 주의 일을 도모한다. 나름의 경건을 발판으로 삼는다. 한데 그것이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주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익을 추구하려는 심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6).” 이를 극복하는 비결은 있는 것에 감사하자. 주신 날들을 감사로 살자.

 

생은 가혹하여서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다. 이는 참으로 개별적이어서 더는 다가갈 수도 더는 멀어질 수도 없다. 오롯이 각자는 각자의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산다. 나에게 하나님이란 어떤 분인가? 이를 어찌 알겠나? 나는 아이들에게 언제나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를. 그러자면 말씀을 붙들고 살기를. 다른 어떤 영웅을 또는 성공한 이의 간증을 표준으로 삼지 않기를. ‘나팔을 입에 댈지어다.’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내가 그를 위하여 내 율법을 만 가지로 기록하였으나 그들은 이상한 것으로 여기도다(호 8:1, 12).” 주가 내게 두시는 여러 말씀은 하나다. 족한 줄로 알고 살라는 말씀으로 비춰 다시 읽는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삶의 단출함에 대하여, 적어서 홀가분한 삶의 자유를 묵상하고 있다. 이는 느긋하게 사는 일에서가 아니라 전쟁 가운데서의 홀가분함이다.

 

가장 최소의 필요만을 충족하는 삶으로써의 단출함. 디모데에게 바울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생은 그런 게 아닐까? 사는 게 전쟁이다. 온통 지뢰밭이다. 언제 부르시면 가야 할지 모른다. 이를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구는 이는 어리석다. 그러자면 부하려는 욕망을 주의해야 한다(9). 아들에게 일렀다. 마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린 다만 영생을 붙잡아야 한다(12). 딸에게 일렀다. 그리하여 참된 생명에 대하여,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19).”

 

그러니 사는 날 동안 끊임없이 들이닥치는 근심 따위에서 놓여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린 사는 데 있어 돈을 필연적으로 요구하니까,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10).” 유용하나 위험하다. 탐냄은 더 가지려드는 마음이어서 자족과는 반대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숱한 사람과 사건과 여러 이야기를 주셨지만 우린 이를 이상히 여기곤 한다. 당장 와 닿는 게 아니어서, 지뢰는 밟기 전까지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러니 여기가 전쟁터라는 사실. 날마다 매순간이 전시상황이라는 것. 한데 뭐 그리 학벌을 운운하고 집문서 땅문서를 챙겨 더 고급스런 복장을 하고 살려고 드는지. 들고 뛰는 일이 얼마나 힘에 겨운가. 우리는 늘 부자를 부러워하나 부자는 단적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실 자리가 없다. 돈 사람처럼 돈돈거리지 마라. 일만 악의 뿌리다. 그래서 예수님은 따로 언급하셨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마 6:20).”

 

나름은 내세우는 주장이 각각 있다. 저마다 의를 도모한다. 결국은 돈벌이를 염두에 두고서도 경건을 이익을 도모하는 데 쓰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지 모른다. 각종 희귀한 말로 열변을 하나 누가 그래서 얼마의 이익을 냈다는 게 관심 있는 것 아닌가? 이는 낡아지는 배낭일 뿐이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눅 12:33).”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을 담아두어야 하는데, 젊음을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으로) 만들라.’ 어리니까, 아직 젊으니까, 마치 뭘 해도 괜찮을 것처럼 구는 일은 어리석다. 그 입에 나팔을 불라. 날마다 주의 말씀을 선포하라. 모든 기준이 말씀이어라. 주께 묻고 또 묻기를 그치지 않으며, 중심에 하나님 두기를 한 시도 게을리 마라. 그러려면 실제의 삶에서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삶이어야 한다. 더 좋고 더 나은 생활을 추구하라고 우리를 이 땅에 (아직) 두시는 게 아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먼저는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자칫 젊음이 주는 무모함은 아직 젊다는 게 가장 큰 난제라. 늙은이처럼 살아라. 다 산 사람처럼 살자. 오늘을 늘 마지막이라 여기자. 언제든 부르시면 가야 한다. 이를 슬픔이나 저주로 받지 마라. 바울이 말했다. 한 시라도 빨리 그리스도 곁에 갔으면 좋겠다. 한데 오늘을 다시 허락하신 덴 주의 일을 맡기신 까닭이다. 감당해야 할 주의 영광이 있다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췌장암 판정을 받은 나의 젊은 신대원 동기 목사를 생각하였다. 저보다 그의 처와 자식들을 생각하였다. 감당해야 할 주의 영광을 생각하였다. 때론 가혹하다. 복음을 위해 안락한 생활을 버려야 한다. 자신을 충족하는 삶을 동시에 갖고 이 길을 갈 수는 없다.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막 10:23).” 그래서 홀가분함이란 단지 기분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단출함이 청빈한 삶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다.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홀가분함이라야 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주를 위해 저들 모두를 버릴 수 있는.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29-30).” 박해를 겸하여 받는 일. 지식이 소중하되 자식에게 연연하지 않고, 돈이 꼭 필요하되 돈을 추구하지 않으며, 나름의 신념과 신조까지도 언제든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예수님은 그리 사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눅 9:58).” 이게 너무 허구 같은가? 영화 <강철비>를 보면서도 느꼈다. 저 역시 더 나은 것을 위해 처와 자식과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버리지 않던가. 단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닌 것이다. 나는 무엇을 희생했노라 말할 수 없을 만큼 그 가치는 마땅하여서, 주님도 우리를 위해 저의 모든 걸 버리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게 아니었겠나.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 나는 나의 젊은 동기 목사를 생각하다 해주고 싶은 말로 나를 다잡고 우리 가족들에게 들려주었다. 경건으로 이익을 도모하지 마라. 부하려고 하지 마라. 자족해라. 족한 줄 알고 살자. 이를 증거 하는 게 우리의 삶이어야겠으나 남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내 나에게 두시는 잠시 하는 한 생의 목소리였다.

 

왜냐하면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다 여호와의 것이라는 데 크게 안도한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고통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우리가 의연히 붙들 것은 결국 말씀뿐이지 않겠나. 내가 주의 것이라면 나의 삶도 죽음도 모두 주가 감당하시는 것일진대. 허튼 데 마음 두고 살지 말자.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7).” 정작 한 생의 허망함에 대하여.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 한 날의 수고가 그것으로 족하다. 모두 주의 것이다. 땅도 거기에 충만한 모든 것도,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시 24:3).” 결국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4).” 부디 모두가 아니라 해도,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 (셀라)(5-6).”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7).” 곧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8).” 그러므로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9).” 곧 “영광의 왕이 누구시냐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 (셀라)(10).”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