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호세아 10: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26:12
인생을 길로 비유하는 덴 유구한 지혜의 표현인 듯하다. 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왕래가 더해져 길로써 위용을 더한다. 아이들을 보면서 순수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맑음이 어른들보다 많기 때문이다. 길은 언제나 앞선 이의 것이었으나 지금에는 내 것이 되어 길 위에 선다. 곧 걷는 자의 몫이다. 두 아이가 방학 동안에 쉰다고 하자 아이는 뾰로통하여 자신도 쉬고 싶어 하는 걸, 그 몫의 값을 설명해주느라 생각하였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이란 없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를 동시에 가진다.
길 위에서는 성실함이 가장 큰 장기다. 길을 들일 때 마음에도 길이 난다. 나는 아이에게 말을 하고 아이는 내 말의 의미를 통해 자기 마음에 길을 내는 것이다. 하든 말든 그 몫은 네 것이나 성실함이란 무던함의 것이라 승부는 거기서 난다고 말해주었다. 처음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도 놀고 싶다는 마음이었던 데에 나의 말을 길을 내어 그 마음에 길들였다. 길은 그래서 함축적인 용어다. 생각과 이해와 판단을 머금는다. 이는 언어이다.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골 4:4).” 그리하여 항상 나의 기도는 “주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고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사 50:4).”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도 그렇게 읽는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말은 짐승의 말이 있고 사람의 말이 있다. 사람도 본성이 짐승과 닮아서 저들의 길을 걷곤 한다. 그 특징으로 몸으로 말한다. 짐승은 좋고 싫고, 원하고 원하지 않음을 몸짓으로 말한다. 의성어나 의태어로 우린 그 소리를 구분할 뿐이다. 사람이 짐승과 확연히 다른 것은 태초부터 말을 주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 언어는 온전히 길을 낸다.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소서. 아침마다 나를 말씀으로 깨우치소서. 내 귀를 깨우치사 알아듣게 하소서.
길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진리를 향하게 한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우리의 모든 말과 말, 행실과 행실, 판단과 기준은 진리를 향한다. 오늘 호세아서는 이를 경작하여 개간하라는 태초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내버려두면 자연의 길을 닮는다. 짐승의 말과 같다.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는 동물의 그때와 닮았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묵은 땅을 기경하라. 곧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 2:15).” 길을 들이지 않은 마음은 자연의 상태다. 말이 필요 없는 몸짓의 세계다. 본능이 지배하는 마음이다. 두 아이가 논다니까 자신도 놀고 싶어 한다. 이제 5학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아이에게 나는 말을 한다. 아버지의 성실하심과 아버지의 아버지가 성실하심에 대하여. 성실함이란 무던함이어서 ‘어떠하든’의 영역이다. 조건에 따른 결과가 성실이 아니다. 조건을 능가하는 게 성실이다.
세상이 저를 이길 수 없는 이유다. 두 부친이 열심히 일하는 것을 들어 말하고, 아이의 단점인 지구력이 부족함에 대하여 언급하자 아이도 동의하였다. 자신의 한계를 안다. 생각하기가 가능한 것이다. 이해는 말하는 자의 몫과 듣는 자의 몫이 반반이다. 나는 아이의 마음에 길을 내는 것이다. 길을 들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마음은 자연의 언어에 가깝다. 길이 없어 길을 잃는다. 아직 어린 녀석이 진지하게 듣고 말하여, 말하는 맛이 있었다.
이를 경작하고 지켜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처음 사람 때부터 주신 말이다. 그 말이 말씀으로 우리 곁에 계셨고, 이내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그 영광을 우리가 볼 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인생은 누구에게나 확실치 않고 불분명하여서 얼마나 자주 길을 읽곤 하는지.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짐승의 말이 호시탐탐 노린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붙여진 광고지에서도 나는 종종 유혹을 느낀다. 각종 노래방과 성인 마사지업종이 주를 이룬다. 오락이 난무하고 쾌락이 즐비하다. 짐승은 다만 좋은 게 좋을 뿐이다.
이를 경작하라. 다스리라. 지키라. 아이에게 해주는 말은 고스란히 나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말은 길이며 길은 내가 걷는 것이다. 막연하여 생각만으로는 길을 나설 수 없다. 딛고 선다는 건 엄연한 숭고함이다. 나는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발목이 점점 약해진다는 걸 느낀다. 지팡이를 짚고 걸으면서, 언제든 걷지 못할 날이 올 것에 대해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때 나에게 있어 걷는다는 일은 숭고하여서 비록 더디고 느려도 값지다. 이를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어 나의 두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중학교 때 부모를 다 잃고 할머니 밑에서 자란 친구가 있다. 저는 방탕하여 중학교를 자퇴하고 힘겨웠다. 늦게 검정고시를 치러 대학에서 우리가 만났고, 뒤이어 공부를 더하더니 지금은 고향에서 한의사로 산다. 또 한 친구는 부친이 청소부로 평생을 사셨어서 그 생에 부채감이 있었던 터, 저도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느닷없이 재수학원을 다니는가 싶더니 늦깎이로 교대에 들어가 지금은 강원도 어디 초등학교 선생을 하고 산다. 우리가 같이 보낸 서너 해의 시간동안에 누가 저들의 길을 알 수 있었겠나.
길은 함의를 안고 있다. 비밀하다. 숨기고 있는 길을 드러내지 않는다. 헤아려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길을 숨기셨다. 누가 앞날을 알까? 알지 못하는 길을 갈 때 앞선 이의 발자취가 나의 길로 포개진다. 그보다 앞서 말씀이 계셨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오셨는지, 언어는 읽는 이의 이해의 전제로 하고 말은 듣는 이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 소 귀에 경 읽기란 말처럼 말은 해도 해도 허비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아직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길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길들이지 않은 말은 짐승의 말에 가깝다. 몸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싶어 한다. 게임을 좋아하니까 컴퓨터 관련된 일을 하고 싶고, 연예인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그 쪽 일이 쉬워 보인다.
허튼 꿈이다. 개간이 되지 않은 마음인데, 실은 마음에 길을 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좋아하는 걸 멈춰야 한다. 하고 싶은 걸 참아야 한다. 때론 억지로라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그래서 어릴 때 가장 큰 싸움은 고집을 꺾는 일이다. 마음 밭을 경작함이란 돌을 걷어내고 땅을 뒤집어엎어 새로 고르고 다져 인분을 뿌려 옥토로 만들어야 한다. 다 고역이다. 어릴 때 똥내 나는 밭길을 걸을 때면 싫으면서 좋았던 냄새다. 구수한 듯 역겨웠고 역겨운 듯 구수하였다. 오늘 말씀은 ‘하라’는 것이다.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누굴 위한 몫이 아니다.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는 일은 저를 위하여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다. 그러자면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한다. 일구어서 갈아엎어야 한다. 곧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 10:12).” 아이에게 들려주고 열심히 말하였던 게 이것이었구나. 아이가 돌아가고 나는 이제 주님이 하세요, 하고 기도했다. 말은 내가 했지만 그 말을 듣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 있어 공의를 비처럼 내려주실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걸 심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는 아이의 몫이다.
그러할 때 성경은 그 길에 설 것을 말씀하신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시 26:12).” 무리 가운데서 주를 송축하리라. 누가 뭐라 하든, 저들은 어떠하든, 내 발이 평탄한 데 섰다. 말씀밖에 더 좋은 길을 나는 알지 못한다. 가봐야 아는 길 위에서 나는 막연할수록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그리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월등히 나은 것은 기록의 능력을 갖고 있어서다. 짐승은 몸으로 언어를 답습하여 유전인자로 계승하지만 사람은 기록을 통해 말을 익힐 수 있다. 그래서 말씀을 기록하셨다. 성경이 길이다.
주를 송축하리라. 곧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길,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그 안에 기쁨이 있다. 이 기쁨은 이 길 위에서만 알 수 있다. 딛는다는 일. 길 위에 선다는 일. 발을 떼 한 발 한 발 아이가 처음 걸음을 옮길 때의 그 경이로움과 같이. 우리가 함께 이 길을 딛고 간다는 것은 경탄이다. 송축이다. 기쁨으로 주를 섬기며 노래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길 안에 있는 것, 길을 들여 길들여진 마음이 기쁨이라.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역량은 ‘항상’이었다. 꾸준함이고 일관됨이며, 성실함이고 무던함이 함의된 표현이다. 항상은 한두 번 그래보고 마는 게 아니다. 120년을 방주를 지은 노아의 길이다.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무던히 나아간 아브라함의 길이다. 주가 이끄시는 모세의 길이다. 그 길에 합하여진 다윗의 길이며, 항상 기뻐하길 바라였던 바울의 길이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길,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내 마음에 내신 길을 걷게 하심이다.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성령의 길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4).” 하긴, 무슨 재미로 아이가 혼자 온다고 하겠나. 내가 뭐라고 아이가 기뻐하겠나. 저 아이가 뭐라고 내가 어떤 보람을 찾겠나. 주가 이루실 길이다. 내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의 길이다. 마음의 길은 서로 통한다. 몸을 넘어서 영혼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길 위에서 만난다.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시 26:12).” 그러므로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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