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전봉석 2018. 1. 1. 07:05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세아 12:6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

시편 28:7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나의 하나님.’ 말씀 앞에 울컥한다. 어떤 알 수 없는 소외감에 휩싸였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삶이 아니면, 그 모든 것은 허사로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부족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적군을 섬기게 될 것이니 그가 철 멍에를 네 목에 메워 마침내 너를 멸할 것이라(신 28:47-48).” 딸애마저 다른 교회 사역자로 내보낸, 마지막 주일 날.

 

좀 더 솔직해지면 기운이 쭉 빠졌다. 아이들은 모두 오지 않았고 큰애도 어디 탈이 났다고 무심히 문자를 주었다. 언제까지 누가 오고 안 오고에 연연해야 할지. 방학 중이라 들어온 아들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내와 각오를 했으면서도 소외감이란 감정이 여기서 맞기는 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공연히 울적하기도 하였다. 누굴 보고 하랴. 그래, 나를 붙드시며 이르신다. 믿음은 주 안에서 만족하는 것.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주께서 세우셨으면 주가 이루시고 이어가고 채우시고 다스리실 것을. 나는 다만 여기 있는 자로, “이는 내가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주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시 132:14).” 누가 물으면 그걸 왜 나한테 묻나? 하나님께 물어보시게! 하고 답은 하면서 그 속은 안달복달 요지경인 내게 오늘 호세아서는 ‘나의 하나님’을 주목하게 한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그는 나의 전부시다. 나의 힘이시고 방패시며 도움이시다. 내 기쁨이고 내 노래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시 28:7).” 마음이 들썽거리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여전히 내 안에 길들여지지 않은 옛 사람이 있었으니. 저가 소외감을 안긴다. 서글픔을 몰아세운다. 어쩌나, 하는 근심도 걱정도 다 저의 농간이다. 알면서도 이를 떨쳐버릴 수 없으니, 길 위에서 길을 들인다.

 

악은 결국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 근원이다.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2-13).” 그렇지. 나는 왜 이 글을 쓰나? 누구에게 보이려고 묵상을 하나? 나는 왜 여기에 있나? 사람으로 위로를 삼으려고 이 일을 하나? 나의 올해 기도제목은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주소서, 하는.

 

그래놓고는 또 주춤하는 것이 나는 무얼 바라고 있는 것일까? 아내의 뜬금없는 질문. 당신은 소원이 뭐야? 새해에 바라는 소원 말이야! 하는데 어떤 알 수 없는 낯설음이 일었다. 소원? 그러게 나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왜 이 말이 생소한 것일까? 나는 그 비밀을 안다. 그것은 터진 웅덩이 같은 것이다. 스스로 웅덩이를 파려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나는 나에게 소원이 없었다는 데 놀랐다. 큰 교회를 이루는 것? 누가 또 누가 교회에 나오는 것? 어디가 좀 안 아픈 것? 여유로운 삶? 아이들이 잘 되는 일?

 

내 안에 있는 여러 생각들이 마뜩찮았다. 다시 말해 그걸 소원으로 품고 싶지 않았다. 누가 교회에 나오고 안 나오고 하는 일이야,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교회를 키우네, 생활이 여유로워지네 하는 따위의 바람은 조금 민망한 셈이고. 나는 소원이 없다! 하고 말하자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나의 한 가지 소원, 예수님을 닮고 싶어요. 하는 찬양이 떠올랐다. 나는 피식, 웃었다. 다른 소원이 없는 게 소원이다. 오직 나의 한 가지 소원,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길이었으면 좋겠다. 이것도 내 의지로 되는 게 아니어서.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마 13:44).” 내 전부를 거는 일이다. 나의 건강도, 앞날도, 자식도, 성취하고 싶은 꿈도, 낭만도, 나의 모든 만족도 다 팔아서 이 감추인 보화만을 갖는 해였으면 좋겠다. 나를 설교자로 세우셨고 내 앞에 아내 한 사람만 두신다면, 수십 명을 두신 것과 뭐가 달라져야 하는지? 교회를 이뤄가는 데 있어 나 혼자 주 안에서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일이나 수백 명이 함께 이뤄 그 만족을 배가시키는 일이나?

 

만족하는 영혼은 다른 부수적인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누가 오고 안 오고야 주가 붙이셔야 할 일이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고 말고는 엄연한 죄다. 그래서 설교하고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찬송할 일은 아닌 것이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여.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것을. 그래서 나는 죽어도 유익한 것이었구나. 내 감정, 소외감? 우울감? 의기소침? 낙심? 이 모두는 소모적일 뿐 참된 것은 오직 나와 하나님의 일이다. 아, 이 예수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이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3:8-9).”

 

나머지 나의 모든 것은 버려져도 괜찮다. 나의 감정 따위는 중요할 거 없다. 저 혼자 들썽거리는 것일 뿐. 그러므로 주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일. 오늘 호세아서는 개인적으로 만난 하나님과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었다.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 12:3-5).”

 

내가 누굴 구원하는 일이 아니다. 저로 영생을 얻게 하는 자가 내가 아니다. 나는 다만 벧엘에서 만난 나의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로 삼고 묵묵히 저를 기억하는 이름을 붙들고 가는 것이다. 자식도 아내도 내가 그처럼 공들여 매일 기도하고 또 바란 누구를 함께 하여 그 길을 지나는 게 아니었다. 좁은 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혼자만이 지날 수 있는 길이다. 많은 이들이 싫어하는 길이다. 후에는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할 길이다.

 

조금은 외로웠고, 이상하게 딸애가 보내오는 사진을 볼 때마다 어떤 소외감이 들기도 하면서. 감정은 참 주체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저 혼자 그 난리다. 하나님으로 만족하라는 것은 권면이 아니고 마땅한 지상명령이다.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지어다(시 100:2).” 혼자여도 이 길을 가야 한다. 사람들이, 여느 교회는, 누가 그러는데 하는 따위의 저울은 모두 가짜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누가 와서, 어떤 성취감에 또는 만족으로 기뻐하라는 게 아니다. 주 안에서 주님만으로, 노래하며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

 

그러자면 늘 봉착하는 문제가 있었으니, 나를 부인하는 일. 내 안에 이는 고도로 숙련된 당위와 맞서는 일.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어쩔 것인가? 곧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35).” 천국 가자고 예수 믿는 게 아니라 천국 갈 자여서 예수 믿는 일이라면,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36).”

 

소용없는 것에 대하여는 미련만 들 뿐,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37).” 남들이 어떠한지, 뭐가 어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시 28:1).” 내가, 나의, 내게, 내가…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2).” 주와 나의 관계다. 결국은 저들들 사랑하려 해도 주님과의 주님 안에서 만족할 때이다.

 

그렇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도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예수를 바라보자.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참으셨다. 지금이 아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누가 오고 안 오고, 뭐가 어떻고, 내 처지가 어떻고, 확신이 어떻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행 20:35).” 나는 다만 나의 외로움에게까지도 나를 내어주어야 할 거였다. 조금 늦었지만 올해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은 말에 답은, 나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0-21).”

 

그래 그러자. 살든지 죽든지 그러하자.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소원으로만 살자. 곧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시 28:7).” 아멘.